[백련마당]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백련불자들 봉암사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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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6 년 2 월 [통권 제3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752회 / 댓글0건본문
‘조계종립 특별선원 봉암사’. 듣기만 해도 가슴 뛰는 이름이다. 봉암사에는 선(禪)이 살아 있고 조계종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 누가 ‘선’을 부정하고 폄훼하더라도 ‘선’은 여전히 펄떡거리고 있다.
대중공양에 나선 대중들이 봉암사 대웅전에서 정진하고 있다
부처님 성도재일 정진 기운이 채 사라지지 않은 1월 19일(음 12월 10일), 80여 명의 ‘백련불자’들이 봉암사를 찾았다. 희양산에서 내려와 온몸을 찔러 대는 삭풍에서 올겨울 최악의 추위를 실감한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법복에 칼바람이 들이닥치지만, 그래도 불자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로 백련불자들은 봉암사 대웅전으로 먼저 향했다. 수좌스님들은 죽비 삼배로 예불을 대신했지만, 대중들은 108배를 하고 능엄주를 독송했다. 차디찬 대웅전 마룻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깨부술 듯 했지만 사람들은 꿈쩍도 않는다.
‘성철’의 다른 이름 ‘봉암사’
백련암 불자들은 오래 전부터 봉암사와 인연을 만들었다.
성철 스님이 1993년 11월 열반한 뒤 1994년 하안거부터 본격적으로 대중공양을 시작했다. 성철 스님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봉암사가 조계종립 특별수도원으로서 계속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봉암사는 현대한국불교의 새벽을 연 사찰이다. 성철 스님을 비롯한 당대의 선지식(善知識)들이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1947년 가을 ‘봉암사 결사’를 시작한 곳이다. 현재의 조계종을 규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봉암사 결사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들 중에서 수많은 종정과 총무원장이 나왔을 만큼 이(理)와 사(事)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봉암사 대중스님들과 백련불자들이 함께 예불을 올리는 모습
당시 봉암사 결사에 임하는 심정을 성철 스님은 <수다라>10집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략)
봉암사에 들어간 것은 정해년(丁亥年), 내 나이 그때 36세 때입니다. 지금부터 36년 전입니다.
봉암사에 들어가게 된 근본 동기는, 청담 스님하고 자운 스님하고 또 우봉 스님하고, 그리고 내 하고 넷인데, 우리가 어떻게 근본 방침을 세웠느냐 하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이 원(願)이었습니다. 즉 근본 목표다 이 말입니다.
(중략)
우리가 신심으로 부처님 법을 바로 지키고 부처님 법을 바로 펴서 신도들을 교화하면 이들이 모두 신심을 내고 하여 우리 스님네들이 잘 안 살려야 잘 안 살 수 없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가장 잘 사는 것이 승려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좋으나 궂으나 할 것 없이 이해를 완전히 떠나서 신심으로 부처님만 바로 믿고 살자 이것입니다. 우선은 좀 손해 간다 싶어도 결국에는 큰 돈벌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봉암사에 살 때 이런 이야기 많이 했습니다. 먹고 살 길이 없으면 살인강도를 해서 먹고살지언정 저 천추만고에 거룩한 부처님을 팔아서야 되겠느냐고. 우리가 어떻게든 노력해서 바른길로 걸어가 봅시다.”
성철 스님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성철 스님은 봉암사에서 ‘공주규약(共住規約)’을 통해 쇠락한 불교를 살리고자 했다.
“삼엄한 불계와 숭고한 조훈을 근수역행하여 구경대과의 원만속성을 기함. 여하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불조교칙 이외의 각자 사견을 절대 배제함. 매불자생(賣佛資生)은 불법파멸의 근본 악폐이니 기복구명의 무축행위는 단연 일소함. 수도사의 만고방양(萬古榜樣)인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표치(標幟)하에 운수반시(運水搬柴) 종전파침(種田把針) 등 여하한 고역도 불사함. 발우는 와철(瓦鐵) 이외 사용을 금함. 일체언동은 장중적정을 기하여 분잡훤란(奔雜喧亂)을 피함. 여외 각칙은 청규 급 대소율제에 준함……”
모두 18개항으로 구성된 공주규약은 봉암사 결사의 성격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당시의 수행생활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공주규약은 승가의 규율을 바로잡고 결사의 정신을 대중들과 공유하는 근거가 되었다.
백련불자들을 이끌고 대중공양에 함께 한 원택 스님은 “봉암사는 현대 조계종의 뿌리다. 조선시대와 일제를 거치면서 피폐해진 한국불교를 봉암사 결사를 통해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자주 ‘봉암사의 꿈’을 말씀하시면서 결사 정신이 이어지지 못한 것에 많은 아쉬움을 표하셨다.”고 전했다.
원택 스님은 “봉암사에 올 때마다 큰스님이 말씀하셨던 ‘부처님 법’을 생각하게 된다.”며 “한국불교가 제대로 수행정진해서 우리사회에 회향하기를 항상 기대한다.”고 전했다.
선방과 수좌들을 일깨운 선지식, 성철 스님
백련암 불자들은 예불을 마치고 공양간에서 맛있는 밥도 먹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대중들은 선열당(禪悅堂)에서 봉암사의 어른 적명 스님을 친견했다.
적명 스님은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과 함께 선원 최고의 어른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영천 은해사 기기암 선원에서 주석하다 봉암사 대중들에 의해 2009년 2월 봉암사 수좌로 추대됐다. 대중들은 ‘조실(祖室)’로 추대했으나 스님은 한사코 ‘수좌’로 살겠다고 해 ‘조실 격 수좌’를 맡고 있다.
봉암사 태고선원
“봉암사가 이제는 고향 같습니다. 절이 바위 아래 있어서 그런지 다른 기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봉암사 대중 사이에서는 시비가 없습니다. 각자 다른 일을 하고, 험한 장면이 있어도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아마도 곧 다시 힘들게 참선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또 그 힘든 것을 알기에 그런 것 같아요.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선풍으로 면면히 내려와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이번 동안거에 봉암사에는 전국에서 온 선객(禪客) 61명이 태고선원 큰방인 서당(西堂)과 남훈루(南薰樓) 등에서 수행하고 있다. 정진이 가장 고된 성적당은 보수공사 관계로 이번 철에는 방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매년 1월이면 ‘만나는 사이’(?)어서인지 적명 스님은 백련암 대중들을 반갑게 맞아 주신다.
“1966년쯤인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해인사 선원장을 맡고 있었어요. 그때 도성 스님이 백련암에서 노장님을 시봉하셨습니다. 성철 스님은 지금까지도 보면 시봉복이 있었습니다. 어디에 있던 곁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성철 스님께서 백련암에 오셔서 암자 전체를 새로 고치던 때였습니다.
주변에서 노장께서 박학다식하다기에 찾아가 대뜸 여쭈었습니다.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 사실이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대승사상이 부처님 사상이 아니란 것은 무식한 얘기라고 하십니다. 초기경전의 팔정도(八正道), 중도(中道)는 『법화경』이나 『화엄경』에 다 들어있다고 하셨어요. 특히 중도는 이러한 경전을 관통하고 있다면서 대승비불설에 상심한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당시 노장께서는 사투리가 워낙 심해서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명쾌한 말씀이었습니다. 하하”
성철 스님의 ‘사투리’를 경험한 백련암 불자들도 박수를 치며 같이 웃는다. 적명 스님은 성철 스님에 대한 말씀을 이어갔다.
“노장님은 한번 결정하면 번복하지 않았어요. 끝까지 밀고 나갔어요. 또 스님은 지계(持戒)를 강조하여 수좌사회를 청정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는 선방에서 결제나 해제 날이면 ‘막걸리 파티’를 했습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이 지계를 강조하여 그런 풍토가 차츰 사라졌습니다.
백련불자들에게 법문을 해 주시는 적명 스님
성철 노장님은 또 수좌들도 공부해야 함을 알려 주셨어요. 저는 ‘백일법문’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성철 스님은 스님들이 무식을 자랑하던 시대에 ‘백일법문’으로 법(法)을 밝히셨어요. 무식을 타파했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어요. 처음으로 스님들 간에 논리경쟁도 촉발시키고, 선에 대한 참된 의식도 고취시켰습니다.
한번은 노장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시종 눈을 내리깔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철 스님이 준비한 원고를 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법상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두 스님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노장님은 정말 대단한 어른이었습니다.”
참선은 목숨 걸고 해볼 만한 일
성철 스님과의 인연을 소개한 적명 스님은 수행정진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했다.
“젊은 시절 봉암사에서 10여 명의 대중들이 같이 산 적이 있어요. 지금처럼 도량이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어요. 여느 시골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조그만 사찰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떤 스님은 밭에서 김을 매고, 어떤 스님은 마루에 앉아서 바둑을 두고, 어떤 스님은 방에 앉아서 참선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은 서로에 대해 아무 말도 안했어요. ‘무한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비 스님은 당시를 ‘꿈 같은 시절’이었다고 말할 정도예요. 그때처럼 대중들이 서로를 믿고 탁마하는 도량으로 봉암사를 가꾸고 싶은 생각입니다.”
봉암사 대웅전에서 자리를 함께 한 모습
적명 스님은 결제 때 대중이 오면 ‘최소 세 철에서 여섯 철 정도를 봉암사에서 살아보라’ 당부한다고 한다. 스님은 이 기간 동안 선(禪)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으며, 또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단언했다.
“생사(生死)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선(禪)’에 있습니다. 진정한 대자유를 누릴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체험을 하면 확신이 듭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부처님 가르침과 선에 대한 확고한 믿음(大信心)이 있어야 해요.”
스님은 ‘참선이 목숨 걸고 해볼 만한 일’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렇다고 불교와 선이 깊은 산중에 처박혀 있는 것에도 단호히 반대했다. 최근 불교계에 제기되고 있는 ‘세상과의 괴리’ 지적에 대한 답도 내놓았다.
“선이 사회에 줄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어요. 두 가지 정도로 보는데, 첫째는 선정(禪定)이고 둘째는 깨달음입니다. 선정을 통해 사람들은 특별한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깨달음을 통해서는 나와 네가 둘이 아니(不二)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거죠. 이렇게 되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고 아무런 시비와 분별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훗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다면 그 중심에는 부처님께서 전한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의 가르침이 있을 겁니다.”
적명 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대중들은 봉암사 경내 곳곳을 참배했다. 곧이어 희양산을 지키고 있는 마애불을 친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위를 장엄한 부처님은 언제나처럼 자비로운 미소로 대중들을 맞아주었다. 시간이 되자 스님들은 각자의 정진 공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절은 다시 고요속으로 빠져들었다.
백련불자들의 또 다른 고향, 봉암사는 이렇게 한국불교의 심장으로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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