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화두 공부에서 적적 경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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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16 년 3 월 [통권 제3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208회 / 댓글0건본문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바로 이해해서 정견을 세우고 이것을 체험하고 실천하는 참선을 해나가면 공부가 쉽고 재밌습니다. 저는 이것을 무한향상(無限向上)의 길이라 합니다. 이 선은 착각과 분별망상에서 벗어나 지혜와 자비 광명을 실천하는 끝없는 길입니다. 간화선은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있지요? 화두 타파해서 바로 견성하거나 안 되면 ‘아무 것도 아니다’는 말인데요. 이렇게 양변에서 공부해서는 수행도 잘 안되고 그 과정에서도 즐겁지 못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깨친 길인 중도를 먼저 이해해서 자기가 본래부처라는 것에 믿음이 나면 과정도 재밌고 못 깨치더라도 간만큼 행복집니다. 왜 그런가? 중도 정견을 이해하면 내가 본래부처고 현실 이대로 극락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지금이 자리에서 어떤 집착과 갈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이 중도를 잘 이해했다고 깨친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 운전도 이론을 잘 이해했다고 바로 운전할 수 없듯이 본래부처라는 것을 이치로 알았다 해도 직접 실천하고 체험해야 깨칩니다.
그래서 자꾸 지겹도록 중도 정견을 세우고 참선하자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참선하는 과정도 즐겁고 공부도 잘 됩니다. 부처님이 깨쳐 일체 분별망상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성취하신 길이 중도이니, 이 길을 바로 알면 수행상의 크고 작은 경계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또 설사 화두타파를 못해도 공부한 만큼 자기를 비울 줄 알고 마음이 밝아져 지혜와 자비를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도 정견이 부실하면 공부 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경계에 휘둘려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적적삼매를 공부로 착각하여 빠지는 것입니다.
적적(寂寂)을 경계하라
적적(寂寂)은 적적삼매를 말합니다. 적적삼매는 마음이 그냥 고요하고 편안한 삼매를 말합니다. 이것도 삼매의 하나인데요. 마음에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냥 편안하고 고요한 삼매가 지속됩니다. 그러면 아늑해지고 편안한 마음이 지속되어 도를 성취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전통적으로 외도(外道)라 경계해 왔습니다. 불교 교법을 공부할 때도 무아(無我)・공(空)이 중도인 데, 잘못 알아 무아를 ‘내가 없다’는 허무주의로 알거나 유-무 양변의 무에 집착하여 무기공(無記空), 악취공(惡取空)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참선과 수행에서도 마음에 번뇌가 사라져 고요하고 편안하면 공부가 잘 되는 것으로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외도입니다.
불교의 삼매는 중도로 성성적적 또는 적적성성입니다. 마음이 고요하면서도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화두도 없고 번뇌도 사라져 고요하고 편안하기만 하면 공적(空寂), 적적에 머무는 것입니다. 반대로 화두와 번뇌가 왔다갔다 하면 성성(惺惺)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성적적 또는 적적성성으로 다 갖춰야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중도삼매를 회복하여 깨칩니다.
불자들이 고요한 적적을 수행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요가나 단전호흡, 기공 같은 경우에도 일체를 비워 고요한 자리를 어떤 신비한 경지로 말하여 그것을 터득하는 수련을 도(道)라 하는 말도 들립니다. 이것은 중도가 아니고 외도이니 잘 알아 두어야 합니다.
특히 재가생활인들이 이 적적 경계에 빠지면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나 관계를 외면하고 자기 안에 자꾸 안주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자기 마음은 편안한데, 가정이나 회사는 크고 작은 문제와 갈등이 늘 벌어집니다. 그러면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풀어나가야 하는데, 자기 마음이 편하고 허무하게 세상을 보니 소극적이 되고 방치하게 되어 문제와 관계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꾸 소극적이고 관계에서 고립되어 도 닦는다고 조용한 곳이나 산속 토굴, 암자로 갑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가정과 직장과 단절되고 함께 하는 것을 못하고 폐인이 되어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선할 때는 안으로나 밖으로 고요한 것에만 머물거나 집착하면 안 됩니다. 안으로는 화두룰 성성하게 하고 밖으로는 고요하든 시끄럽든 상관없이 공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철스님은 조용한 곳만을 찾아서 공부하는 선객을 고적병(孤寂病)이라 경책했습니다. 거기에 떨어지면 공부 성취는 고사하고 사람까지 버리게 된다고 야단쳤습니다. 선방 다니는 분들 중에 유독 시끄러운 것을 못 참는 분들이라면 자기 공부를 점검해보기 바랍니다.
고요한 적적에서 벗어나는 길
그러면 이 적적경계, 외도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요? 그 길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말해 왔듯이 중도 정견을 갖추고 화두를 성성하게 드는 것입니다. 화두가 성성하면 적적이 저절로 이뤄져 성성적적의 중도삼매가 되는데 그러면 체험하는 만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지혜가 나옵니다. 이 성성적적삼매는 체험할수록 마음이 밝아져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좀 급한 성격의 사람도 화두를 성성하게 체험하면 여유를 가지게 되고, 좀 느린 행동의 사람은 화두가 성성하게 챙겨지면 행동이 빨라집니다. 짜증과 화가 잘나고 마음이 늘 어두워 부정적인 성격의 사람도 화두가 성성하게 체험되면 화가 줄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밝아집니다.
요사이 미국 의사나 과학자들이 이 불교 삼매 원리를 의학이나 심리학과 연결시켜 심리 치유나 스트레스 관리 명상이 유행한다는데 중도 삼매의 가치가 과학적으로 입증되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성성적적삼매는 그런 효능을 본래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 삼매는 억지로 만들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본래 성성적적삼매로 이뤄져 지혜광명으로 항상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본래 그렇게 존재하는데 착각에 빠져 분별망상에 막혀 있다가 화두로 번뇌를 비워 가면 그 빛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두 참선을 마음의 고향 찾아가는 공부라 합니다.
대혜선사는 고요함의 적적 공부를 경책하면서 본래부처 입장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릇된 무리는 “마음을 거두어 고요히 앉아서 일상사(日常事)를 관여하지 말고 쉬고 쉬어라.”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마음으로 마음을 쉬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비우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할 것 같으면 어찌 외도이승(外道二乘)
의 고요한 단견 경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어찌 자기 마음의 밝고 오묘한 수용과 구경의 안락과 여실히 청정한 해탈 변화의 묘함을 드러내겠습니까?
모름지기 본인이 스스로 보아 깨치면, 저절로 옛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능히 고인의 말을 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청정한 구슬을 진흙 속에 두어 백천 년이 가더라도 능히 오염시킬 수가 없으니, 본체가 스스로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도 또한 그러해서 정히 혼미할 때에는 티끌세상의 번거로움에 미혹되지만, 이 마음의 당체는 본래 미혹된 적이 없으니 이른바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이 마음이 본래성불(本來成佛)이며 구경자재(究竟自在)하여 여실히 안락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으면, 갖가지 묘용이 또한 밖에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본래 스스로 구족해 있기 때문입니다.
- 대혜, 『서장』, 「진소경 계임에게 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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