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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시봉이야기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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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6 년 3 월 [통권 제3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20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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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형님이 병환으로 위중하시자 어느 날 장조카가 “스님, 아버지 돌아가신 후 문상중에 오시는 분들에게 스님의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를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하여 마침 김영사에서 판권을 받은 뒤라 승낙을 하고 표지만 조금 수정하고 500권을 서둘러 인쇄하였습니다.

 

그런 후 한 달이 못되어 형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문상객들에게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를 나누어 드리니 조카에게 “너거 삼촌이 성철 스님 상좌스님이란 말인가?” 하며 놀라워하면서 흔연히 책을 받아가니,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형님의 49재도 마치고 나서 다시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를 출간하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리탑기도사진 

 

2001년 12월 초판을 발행하였으니 지금부터 벌써 15년 전의 일입니다. 15년이 지나는 동안 또 여러 불사들이 이루어졌습니다. 큰스님을 모실 때 잘 한 일은 없고 허구헌날 꾸중만 듣고 살았는데 큰스님 모시고 살았던 22년, 또 떠나신 후 23년을 맞이하고 보니 잘한 일은 무엇일까? 하는 곰새끼의 역발상이 떠올랐습니다.

 

큰스님 생전에 그래도 이것만은 ‘정말 잘한 일이야!’ 하고 떠오르는 일은 <선림고경총서> 37권과 <성철스님 법어집> 11권의 출간과 비록 큰스님 떠나신 후 발간되었지만 계실 때 계획했던 개정증보판 『백일법문』 상·중·하(2014년 11월 14일 발행), 23년 만에 빛을 본 『명추회요』(2015년 7월 15일 초판발행)발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큰스님께서 1980년대 7월쯤 내미신 『선문정로』와 『본지풍광』의 초고원고를 걸망에 지고 송광사 불임암으로 법정 스님을 찾아뵙고 ‘윤문을 부탁한다’는 큰스님의 뜻을 전해 드렸을 때, 법정 스님께서는 “글은 토 하나 의미 하나가 다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니, 될 수 있으면 성철 스님의 뜻을 따라 수정을 최소에 그쳐 윤문하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후 법정 스님께서 1년 여에 걸쳐 『선문정로』와 『본지풍광』 두 책을 출간해 주시니, 큰스님께서 “나는 이 두 책으로 부처님께 밥값하였다.”고 하시며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큰스님께서 불일암 법정 스님께 원고를 지고 보낼 때부터 오늘까지 그 심부름이 이어지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또 큰스님 열반에 드신 후 잘한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제일 먼저 떠오른 일이 ‘7일7야 8만4천 배 추모참회법회’입니다.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드신 지 1년이 다가올 즈음, 추모제, 다례제를 어떻게 모셔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1년 여의 세월동안 백련암을 텅 빈 마음으로 오르내리며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즈음 생전에 성철 스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평생 이 절 저 절 다녀보았지만 정혜사 있을 때 수덕사 큰절에서 정초기도를 올리는데 만공 큰스님의 지도하에 온 산중대중이 대웅전에 모여 24시간 대중들이 시간을 나누어 염불소리, 목탁소리 끊이지 않고 교대로 7일간 정월초 기도를 올리는데 참 신심이 나더라.”

 

그리고 또 석남사 주지 인홍 스님의 얘기도 들려주셨습니다.
“무념 등 상좌들이 성전암을 찾아와서 저거 대장 인홍 스님이 췌장이 아파 수술하게 되었다고 얼굴이 새파랗게 넘어가는데, 스님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기도방법을 일러 달라는 거라. 그래서 너거 대중들은 뭐하고 있는데… 눈물만 짜고있나? 그라믄 쓰나! 전 대중들이 나서서 두 사람은 2시간에 일천 배씩 하고 두 사람은 능엄주를 해라. 교대로 법당에서 24시간 촛불 꺼지지 않고 예불소리 꺼지지 말고 너거 대장 살아 올 때까지 기도해라. 그래 전 대중이 나서서 기도하는데 23일 만에 저거 대장 인홍 스님이 법당문을 열고 들어오더라 안하나!”

 

그런 말씀들을 떠올리고 성철 스님 추모 1주기 다례제를 생각해낸 것이 ‘7일7야 8만4천 배 추모참회법회’를 백련암에서 올리자는 것이었고, 신도님들과 의논을 하니 모두들 대찬성이었습니다. 큰스님 열반에 드신 후 그 허허로운 마음을 어떻게 채울 수 없었던 신도님들이기에 큰스님 말씀 따라 “모든 중생 행복하게 해주소서.” 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기에 모두들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 24시간을 2시간대로 나누니 12번이어서 하루 절하는 양이 1만2천 배이고, 일주일 동안 8만4천 배. 8만4천 번뇌를 참회하고 이웃을 위해 자비실천을 다짐하는 법회가 자연스레 이루어졌습니다. 말이 2시간에 일천 배 하는 것이지 그것도 절하는데 숙달되지 않으면 어려운 기도였습니다.

 

성철 스님 다례제를 맞이하여 누구나 7일 동안에 한번이라도 일천 배를 하면 8만4천 배 참회기도에 동참한 것이라고 전하였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모제에 동참하였습니다. 매일 3~400여 명이 넘는 신도들이 와서 일천 배나 이천 배 또는 삼천 배를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일주일동안 머물면서 참회법회에 꼬박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 1주기 기도기간에 또 다시 백련암 주변과 뒷산 또 큰절 퇴설당과 장경각 판전 근처에서 시차를 두고 보현암 쪽에서 들녁 노적가리 형태의 주황색 발광체가 떠다니는 방광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정확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3년째 되는 해인가 불필스님이 8시쯤 해서 금강굴로 내려와 보라고 하여 긴가민가 하는 마음으로 내려가서 백련암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말로만 들었던 노적가리 형태의 주황색 발광체가 백련암 주변에서 일어나더니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며 큰 절 쪽으로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판전 및 퇴설당 주변에서 머물다 차츰 사라지기 시작하는데 20~30분 동안 펼쳐진 그 광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고, 그 흥분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7일7야 8만4천 배 추모참회법회’를 열지 않았으면 큰스님의 이런 큰 법력을 어떻게 볼 수 있었을지. 우리들 기도에 감읍하여 큰스님의 법력을 당신의 추모기도 때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기도에 동참한 신도들이 감동 또한 컸습니다. 큰스님 다비식 때도 방광이 여러 번 있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 분들이 더 많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한결같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영 못마땅해 하셨던 기억입니다. 방광현상을 보지 못한 분들이 무슨 평가를 하든간에 좋은 날 좋은 시에 극락에 가서 나서 큰스님을 친견하면 제일 먼저 “큰스님께서 극락세계에 가시고 나서 해인사에 산중에서 다녀간 중생들에게 보여주신 방광현상은 신비로움과 감격스러움과 놀라움으로 숨을 멎게 하는 크나큰 법력이셨습니다.”라고 말씀드릴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다음으로 『성철스님 시봉이야기』의 발간이라 생각합니다.
1996년부터 생가 복원 및 사찰 창건이라는 조감도를 그려놓고 산청군과 불필 스님과의 본격적으로 협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해인사뿐만 아니라 산청군 단성군 묵곡면의 큰스님의 선대산소로 향하는 순례객들이 온 산과 들을 덮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풍수설에 따라 “조상의 묘자리가 얼마나 좋길래 성철 스님 같은 대도인이 나셨나.” 하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산청군수의 전언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생가 복원이 끝나고 2001년 3월 30일, ‘성철 스님 생가 및 겁외사 창건 회향법회’를 성대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중앙일보>의 이헌익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스님, 큰스님 생가터에 겁외사를 창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도 큰스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크니, 스님께서 성철 스님 평전을 우리 신문에 연재하였으면 합니다.”

 

처음엔 거절하였지만 몇 차례 끈질긴 실랑이 끝에 <중앙일보>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가 5월부터 매주 5일 연재물로 시작하여 거의 6개월 동안 이어져 10월 말쯤에 마치게 되었습니다. 연재를 마치고 12월 1일 김영사 출판사에서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가 1, 2권으로 출판되어 1년 간 20만부 넘게 판매되는 나름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때 신문에 “길 없는 길”을 연재하는 최인호 씨가 해인사로 찾아와서 “경허 큰스님께서 친히 쓰신 선방 방함록”을 보자고 요청한 인연과 대학교 선후배이기도 한 인연으로 나는 형님, 최인호 씨는 동생의 인연이 되었습니다.
“동생요,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는 재미없는 산중 암자 생활묘사인데 크게 인기가 있었다고 하니 그 이유는 뭘까요?”


“형님! 첫째는 이번 연재한 형님 글은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읽기 쉽게 써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성철 스님은 살아계실 때보다 돌아가시고 나서 오히려 국민들에게 유명해지셨어요. 우리 곁에 그런 큰스님이, 도인이 계셨나? 어떤 분이시기에 그렇게 평가를 받으시는가 하는 궁금증을 모든 국민들이 갖고 있었어요. 저 구름 속에 가려진 성철 스님의 모습을 형님이 이번에 세상에 보여주셨지요. ‘성철 스님은 이런 스님이었다’고 과장없이 솔직하게 표현하여 산중스님들의 산 모습들을 잘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고인이 된 동생의 표현도 표현이지만 모두가 나 자신의 자의적 판단이라 여기며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랍니다. 마침 『법정스님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설전(雪戰)』이 출판되었습니다. 불교를 알고 싶어 하는 이웃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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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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