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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삼제원융과 자기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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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6 년 2 월 [통권 제3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72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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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사상의 계보와 천태사상

 

『백일법문』의 내용 전개는 초기불교와 인도대승 불교의 양대 산맥인 중관과 유식을 거쳐 중국불교의 천태종 사상으로 넘어간다. 천태종은 방대한 불교경전을 섭렵하여 오시팔교(五時八敎)라는 교학체계를 확립했지만 사상적 근본은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설명하는 데 있었다. 천태학을 집대성한 천태지의 대사는 중도사상을 통해 법성(法性), 즉 존재의 근본을 설명하고, 어떤 관점에서 존재를 통찰할 것인지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중론』에 등장하는 삼제(三諦) 사상은 천태사상의 핵심적 개념으로 수용되었으며, 천태학의 교리체계는 중도사상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봉암사 마애불 

 

용수 보살은 『중론』에서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기는 법(衆因緣生法)을 나는 곧 무라고 하고(我說卽是無), 또한 가명이라 하며(亦爲是假名), 또한 중도라고 한다(亦是中道義).”고 설파했다. 모든 존재는 수많은 조건(緣)에 의해 생성되며, 여러 조건을 따라 성립된 것이므로 모든 존재의 본성은 공(空)하다는 것이다. 존재는 상호의존 속에서 존재하며, 의존을 통해야만 비로소 있을 수 있는 존재에게는 ‘나(我)’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개별 존재는 ‘무(無)’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눈앞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거짓 이름’으로만 존재함으로 용수 보살은 이를 ‘가명(假名)’이라고 했다.

 

성철 스님은 용수 보살의 이와 같은 중관사상은 부처님의 중도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도사상의 흐름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을 통해 설법한 중도사상은 용수 보살에 의해 중관사상으로 체계화되고, 이는 모든 대승불교의 사상적 젖줄이 된다. 그리고 『중론』에서 제시된 삼제사상은 천태종의 개조로 추앙받는 혜문 선사에게 깊은 영감을 주게 된다. 그는 『중론』의 삼제게로부터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는 천태학의 주요 개념을 도출한다.

 

용수 보살의 삼제사상이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는 개념이었다면 혜문 선사는 여기에 일심(一心)이라는 마음을 결부시킨 것이다. 공가중이란 존재의 통합적 속성이지만 우리들의 마음이 그것을 세 가지 측면으로 구분해 보고 있다는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존재의 속성을 바로 보고자 한다면 공가중을 개별적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안목을 제시한 것이다.

 

천태지의는 혜문 선사의 이와 같은 일심삼관 사상을 계승하여 ‘삼제원융(三諦圓融)’이라는 개념으로 확장시킨다. 존재의 본성으로서의 ‘공’과 현상적 모습인 ‘가’, 그리고 그 양자의 통합적 속성인 ‘중’이 서로 자유롭게 소통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중관사상은 천태종에 의해 중국의 학파불교로 수용되고, 천태지의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체계화된다. 나아가 당대에 이르면 화엄종에 영향을 미치면서 중국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천태의 삼제원융 사상

 

“어째서 그대로 공(空)인가? 모든 것이 연(緣)에서 생기니 연에서 생기면 주체가 없고(緣生卽無主) 주체가 없으니 공이다(無主卽空). 어째서 그대로 가(假)인가? 주체가 없이 생기니(無主而生) 바로 이것이 가(假)이다. 어째서 그대로 중(中)인가? 법성(法性)을 벗어나지 아니하여(不出法性) 모두가 그대로 중이다. 마땅히 알아라. 한 생각이 즉공・즉가・즉중이기 때문에 모두 필경공이며, 모두 여래장이며, 모두 실상이다.”


위의 인용문은 천태지의의 대표저작 『마하지관』에서 설명하고 있는 삼제원융에 관한 내용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일체 모든 것이 공하다(一切皆空)’고 했다. 불교사상하면 곧 공을 떠올릴 만큼 공은 불교의 핵심적 사상이다. 그런데 공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무 것도 없음(Nothingness)’을 떠올린다. 그러나 중론이나 천태에서 말하는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텅 빔’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은 완전한 ‘무’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연기(緣起)에 대한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모든 존재는 그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어떤 존재도 독립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일례로 한 송이의 국화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꽃이라는 실체가 본래부터 있어서 핀 것은 아니다. 토양 속에 국화의 씨앗이 파종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조건이 갖추어져야 국화는 필 수 있다. 얼어붙은 땅을 녹이는 훈풍이 불어야 하고, 대지를 적시는 촉촉한 봄비가 내려야 하고, 광합성을 할 수 있는 따사로운 햇살이 필요하고, 새싹을 자라게 하는 토양 속의 자양분들이 필요하다.

 

존재의 관계성은 이와 같은 1차원적 연결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국화를 피게 했던 훈풍, 봄비, 햇살, 토양 속의 자양분 역시 수많은 연결망 속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한 송이 국화꽃은 그 스스로 싹을 틔우거나 자란 것도 아니고, 스스로 꽃을 피운 것도 아니다. 국화는 국화가 아닌 무수한 타자들과의 복잡한 연결망 속에서 비로소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국화의 씨앗을 인(因)이라고 한다면 그 인을 싹트게 하는 무수한 조건을 연(緣)이라고 한다. 결국 하나의 존재는 무수한 조건들에 의존해 있으며, 그 스스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연기설이다. 공(空)이란 바로 그와 같은 연기적 존재를 설명하는 교설이다.

 

천태지의 역시 이런 맥락에서 모든 존재는 “연(緣)에서 생기니 연에서 생기면 주체가 없으며(緣生卽無主), 주체가 없으니 곧 공이다(無主卽空).”라고 했다. 모든 존재는 수많은 조건의 화합으로 생성된 것이므로 개별적 존재는 그 어떤 주체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我]’라는 실체도 있을 수 없고, ‘나의 것[我所]’이라는 소유도 성립될 수 없다. 부처님은 이것을 ‘연기’ 또는 ‘무아’라고 했고, 용수 보살과 천태 대사는 이를 ‘공(空)’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 실체가 없는 ‘무아’이고 ‘공’이기 때문에 수많은 타자들과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국화가 싹을 틔우려면 국화의 씨앗은 씨앗이라는 실체로 고정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씨앗이 씨앗을 고집하면 싹으로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씨앗이 자기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스스로 무가 되고, 공이 될 때 비로소 씨앗은 싹으로 피어나고, 마침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수많은 인연이 화합해서 생성되고(緣生), 또 수많은 인연들에 의해 소멸한다(緣滅). 인연에 의해서 생성되고, 인연에 의해 소멸함으로 모든 존재는 개체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렇게 보면 공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과의 복잡한 상호관계 속에 있는 존재의 역동성에 대한 진술이다.

 

그렇다면 눈앞에 존재하는 한 송이 국화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가? 분명히 눈앞에 한 송이의 국화꽃은 존재하고 있고, 꽃을 피게 한 무수한 조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씨앗을 적시는 빗물도 있고, 비구름을 몰고 오는 바람도 있고, 새싹을 자라나게 하는 자양분과 박테리아들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존재들은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눈앞에 펼쳐진 모든 존재들은 독립적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거짓 존재임으로 이를 ‘가유(假有)’라고 한다. 불변하는 개체적 실체로서 존재는 없지만 눈앞에는 수많은 존재들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삼제원융 사상은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는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의 실상에 대한 성찰은 곧 우리들의 인식과 마음가짐에 대한 성찰로 확장된다.

혜문 선사가 삼제계를 ‘일심삼관’으로 파악하는 순간 존재론은 이미 인식론의 의미를 띠게 된다. 눈앞에 삼라만상이 펼쳐져 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거짓 이름인 ‘가(假)’에 불가하다. 타자를 전재로 하지 않으면 개별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통찰할 때 자기 자신에 바른 인식도 가능해진다. 나는 무수한 타자들의 은혜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잘난 것 같고, 자신이 제일 훌륭한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타자들의 참여로 가능한 것이다. 이런 통찰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이 생겨나고, 타인을 존중하는 공경의 마음이 나타난다. 작은 먼지조차 소중하게 바라보는 안목이 열리고,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공존의 태도가 가능해진다.

 

결국 삼제원융은 존재의 실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가르침이 되며,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게 하는 가르침이 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론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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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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