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
마음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몸과 국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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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 2016 년 6 월 [통권 제3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89회 / 댓글0건본문
우리가 함께 읽어가는 『명추회요(冥樞會要)』는 제목 그대로 ‘그윽한 지도리에 대한 핵심을 모은 글’이다. 문을 여닫는 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지도리인 것처럼, 이는 이 세상의 온갖 것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해준다. 『명추회요』는 100권이나 되는 『종경록』을 대략 10분의 1 분량으로 줄여서 마음과 관련된 내용을 보다 압축적으로 접하게 해주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앞뒤로 생략된 내용 때문에 내용 파악에 곤란을 겪게 만들기도 한다. 이럴 때는 다소 번거롭더라도 원본인 『종경록』으로 다시 찾아들어가서 전후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런 사례는 『명추회요』 21권-7판에 나오는 ‘법성신과 법성토’(156쪽)라는 문단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한편 『종경록』 100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의미상 흐름을 이루는 보다 세부적인 결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질문-대답-인증’의 구조이다. 즉 『종경록』은 마음과 관련된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되어 그에 대한 대답이 이어진 뒤, 불경과 선어록에서 그 대답을 증명할 수 있는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하나의 의미상의 구성단위가 되고, 이런 작은 단위들이 총 300여 가지 정도 모여서 『종경록』이라는 큰 책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명추회요』에는 ‘질문-대답’을 생략한 채 ‘인증’ 부분만 길게 인용되는 곳이 종종 눈에 보이므로, 그 인용의 맥락을 찾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다행히 156쪽의 각주 186)을 보면 ‘법성신과 법성토’와 관련하여 청량국사 징관 스님의 『청량소』가 인용되는 맥락을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밝혀두고 있다.
『종경록』 권21에 따르면, 『청량소』를 인용한 맥락은 “모든 것이 일심이라면 별도의 의보와 정보가 없을 것인데, 어째서 교학에서는 정보인 신(身)과 의보인 토(土)에 대해 자세히 설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이다.
『종경록』의 저자인 영명연수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함한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다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점을 어떤 불교도보다 더 강조하는 분이다. 스님께서 하도 마음을 강조하다 보니, 대중들 역시 마음에 대해 여러 가지 궁금함을 가지게 되었는데, 위에 인용된 내용도 그 중 한 가지이다. ‘만약 모든 것이 하나의 마음이라면 어째서 불교의 논사들은 다양한 국토를 설하고 또 그 속에 살고 있는 다양한 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언뜻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들이 흔히 접하는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三身)이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등의 친숙한 문구를 떠올려 보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156쪽부터 157쪽까지 이어지는 『명추회요』의 단락은 바로 이러한 부처님의 몸과 국토에 대한 의문을 마음의 관점에서 풀어주는 내용이다.
일수사견(一水四見)과 유심정토(唯心淨土)
몸과 국토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주체를 ‘몸’이라고 하고, 그 몸이 놓여 있는 환경을 ‘국토’라고 한다. 특히 부처님의 경우 각각의 몸에 대응하여 서로 다른 국토가 현현하는데, 가령 화신으로 출현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통의 중생들과 동일한 예토(穢土)에서 생활하셨지만, 아미타불과 같은 보신의 부처님은 온갖 청정한 것들로 이루어진 정토(淨土)에 안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경에는 부처님의 몸과 국토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사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한 몸과 국토는 우리의 마음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수 스님은 불경에서 설하는 다양한 몸과 국토는 우리의 마음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지니는 ‘마음의 상태(state of mind)’에 따라 각기 다르게 현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유식학에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의 물을 네가지 존재가 각기 다르게 본다는 설명이다. 즉 인간, 물고기, 아귀, 천인(天人)의 네 존재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물’을 볼 때 각기 서로 다르게 파악하니, 인간은 이를 ‘물’이라고 보는 반면, 물고기는 ‘공기’로 보고, 아귀는 ‘불’로 느끼고, 천인은 ‘수정’과 같다고 파악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목마름을 시원히 해소해주는 물이 아귀에게는 목구멍을 태워버리는 불로 현현한다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대상이 인간의 마음에 의해서는 ‘물’로 파악되고 아귀의 마음에서는 ‘불’로 파악되는 것처럼, 번뇌 가득한 중생의 마음에는 이 세상이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찬 ‘예토(穢土)’로 나타나지만 번뇌가 사라진 무루(無漏)의 상태인 불보살의 마음에는 이 세계가 그대로 ‘정토(淨土)’로 향유된다는 것이 아마 몸과 국토에 대해 사유했던 불교도들의 결론일 것이다. 이런 관점을 연수 스님은 유심정토(唯心淨土)라고 표현했다. 정토 경전에 따르면 아미타불의 서방정토는 여기서 서쪽으로 10만8천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고 묘사되지만, 선종 조사들은 이러한 관점보다는 ‘각자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그가 속한 국토 역시 깨끗해진다’는 유심정토의 관점을 보다 중시했다.
법성신과 법성토, 그리고 일심
이상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 다시 『명추회요』로 돌아가 보자. 먼저 『명추회요』에 생략된 연수 스님의 질문은 이미 위의 인용에 나타나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된 답변을 살펴보자.
대답. 단지 자기 마음의 본성과 모양에서 몸과 국토의 명칭을 나눈 것이니, 자기 마음의 모양의 측면을 몸이라고 하고, 자기 마음의 본성의 측면을 국토라고 한다.
연수 스님이 보기에, 불전에 나타난 다양한 몸과 국토에 대한 설명들은 결국은 자신의 마음이 지닌 본성(性)과 모양(相)의 두 가지 측면이 다양하게 현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탐・진・치 삼독으로 가득 찬 중생의 마음에는 그 마음의 본성과 모양에 상응하는 몸과 국토가 나타나지만, 번뇌를 자꾸 끊어가게 되면 또한 그에 상응하는 몸과 국토가 현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번뇌가 끊어져 버린 궁극의 경지인 법성(法性)의 상태에 이르면 몸과 국토는 어떤 관계를 갖게 될 것인가. 연수 스님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157쪽에 나온 『청량소』의 문구를 인용하였던 것이다.
묻는다. 법성신(法性身)과 법성토(法性土)는 다른가, 다르지 않은가? 다르다면 법성이라고 하지 못하니 법성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르지 않다면 능의(能依, 몸)와 소의(所依, 국토)가 없을 것이다.
답한다. 경론(經論)에서 각기 다르게 설명하고 있는데, 법신(法身)으로 통괄하면 대략 열 가지가 있다. …(필자 생략)…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유정(有情)의 무리 중에 있을 때는 불성(佛性)이라 하고 무정(無情)의 무리 중에 있을 때는 법성이라고 하여 방편으로 능소(能所, 주체와 객체)를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질문을 보면 법성신과 법성토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생길 수 있는 두 가지 문제점을 동시에 제기한다. 먼저 법성(法性)이란 제법의 본성을 뜻하므로 두 가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법성신과 법성토를 마치 다른 것처럼 사용하고 있으니, 이 두 가지가 다르다면 ‘법성’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두 가지가 다르지 않다면 몸과 국토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난점을 두고 대답에서는 다양한 경론의 해석을 제시하지만, 여기서는 『대지도론』의 설명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지도론』에서는 제법의 본성인 ‘법성’을 생명 있는 유정에 적용하면 ‘불성’이라 부르고, 무정에 적용하면 ‘법성’이라고 부르며, 또한 이를 법성신이나 법성토와 같이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표현하기도 하지만, 실제 이들은 차이가 없다고 설명한다. 즉 우리가 쓰는 관습적인 표현에 따라 ‘법성’을 몸과 국토 등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방편과 진실의 두 가지 차원에서 법성신과 법성토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이상의 논의는 매우 고원한 차원의 것으로 이해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울 수 있지만, 이를 인용한 연수 스님의 의도는 아마 그와 같이 고원하고 까다로운 문제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바로 사람들 각자의 마음에 있음을 상기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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