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의 뒷골목]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에는, 아무 일이라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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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6 년 7 월 [통권 제3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73회 / 댓글0건본문
생명은 진화한다. 굳이 공룡이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다. 어쨌든 또는 어떻게든 살아남은 것이다. 가만히 있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몸을 먹이고, 그 몸을 다시 노동으로 내몰면서 버텨낸 결과다. 투쟁하고 타협하면서 때로는 굴복하고 개기면서 나는 나를 지켜왔다. 나는 ‘그들’을 싫어하지만, 그들에게 짓밟혀야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숱하게 경험했다.
한편으로 짓밟힘의 일상은 어찌하면 좀 덜 밟히고 또는 덜 아프게 밟힐 수 있는지를 터득하는 수련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진화의 핵심은 극복이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라던 헤라클레이토스는 천재였고 그만큼 세상을 못 견디던 자였다. 가끔 너무 아프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마음으로 탈출하고 싶다. 그러나 그의 아주 더러웠던 말로(末路) 앞에서, 턱까지 차올랐던 분노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다. 무엇보다, 행복은 언제나 남들의 지갑 속에 있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지만, 무아(無我)의 논리 앞에선 자주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알고 지내는 스님과 온라인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대인관계 스트레스로 무척 시무룩해했다. “모든 번뇌는 나를 내세우려는 업장 때문”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산사 주변의 이름 없는 꽃과 풀을 보니 위안이 됐다.”는 말에 무언가가 뇌리를 번뜩 스쳤다. 이기고 이겨도 언젠가는 패배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진화를 거듭하더라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법이다. 승승장구하는 영웅보다 애당초 이길 생각이 없는 돌멩이가 훨씬 더 부처님답다. 뜬금없이 ‘똥 막대기’나 ‘뜰 앞의 잣나무’를 찾던 선사들의 심정 역시 이러했겠구나…, 싶었다. ‘그들’이란 결국 나의 탐욕과 증오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진화의 끝은 완전한 퇴화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제54칙
운암과 대비보살(雲巖大悲, 운암대비)
운암담성(雲巖曇晟)이 천황도오(天皇道悟)에게 물었다. “대비보살에겐 왜 그토록 손과 눈이 많습니까?” “밤에 손을 뻗다가 무심코 베개를 만지는 이치다.” 운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무엇을 알았다는 말인가?” “온 몸에 두루 손과 눈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대답이 조금 모자란다.” “사형(師兄)은 어쩌시렵니까?” 도오가 일렀다. “온몸이 통째로 손과 눈이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은 자비의 화신이다. 천개의 눈으로 중생의 슬픔을 살피고 천개의 손으로 돕는다. 베개? 자비의 정신과 실천이 차고 넘쳐서 웬만하면 그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스쳐도 자비다. 두루? 심지어 끊임없이 선행과 인덕을 베푸는 성자를 뛰어넘는 수준임을 일컫는다. 온몸이 자비다. 그럼에도 나는 전혀 자비롭지 않아, 그런 그가 그저 흉측한 괴물로만 보인다. 무려 천수를 들고 환영하는데도 머뭇거린다. 하물며 쌍수여도 눈물겨운데 말이다.
제55칙
밥 짓는 설봉(雪峰飯頭, 설봉반두)
설봉의존(雪峰義存)이 덕산선감(德山宣鑑)의 문하에 머물면서 공양주 소임을 보았다. 어느 날 밥이 늦어지자 배가 고팠던 덕산이 참지 못하고 발우를 든 채 법당으로 갔다. 설봉이 구시렁거렸다. “저 노인네 아직 종도 치지 않았는데 어찌 호들갑인가.” 이 말을 엿들었는지 덕산은 얼른 방으로 돌아갔다.
설봉이 암두에게 덕산의 구겨진 체면을 일러바쳤다. 암두가 말했다. “변변치 못한 덕산이 말후구(末後句)를 알지 못하는군.” 둘 사이의 ‘뒷담화’를 전해들은 덕산이 암두를 불러다 앉혀놓고 따졌다. “그대가 내 흉을 보았다지?” 암두가 귓속말로 소곤거리자 덕산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튿날 법당에 들어온 덕산의 법문은 여느 때와 달랐다. 암두가 손뼉을 치며 깔깔거렸다. “저 노인네가 비로소 말후구를 알아들었군. 훗날 천하사람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말후구(末後句)란 최후의 한 마디다. ‘진리는 이것이다’ ‘인생은 무엇이다’ 존재와 세계의 이치에 대해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요약하는 궁극적 잠언이다. 선사들이 죽으면서 남기는 열반송도 말후구다. 말후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덕산은 새파란 후배들에게 능욕을 당했다. 천하의 호걸이라도 몇 끼 굶으면 영 비실거리게 마련이다. 또한 밥이 되어야 비로소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리하여 찬밥 무시하지 마라. 세상의 근본이다. 끼니때를 기다리는 일은 부처님을 모시는 일이다. 밥먹기 어려운 줄을 알아야 참으로 어른이다. 밥벌이는, 순례다.
제56칙
밀사의 흰 토끼(密師白兎, 밀사백토)
밀사백(密師伯)이 동산 양개(洞山 良介)와 함께 길을 떠났다. 갑자기 흰 토끼가 쏜살같이 눈앞을 달려 지나갔다. 밀사백이 감탄했다. “날쌔구나!” 동산이 은근히 법력을 떠보았다. “어떻습니까?” “마치 백의(白衣)가 졸지에 재상에 오른 격이로구나.” 동산이 비꼬았다. “너무 거만하신데요.” 밀사가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동산이 말했다. “여러 대(代)의 번영이 순식간에 몰락해 버렸습니다.”
조사들은 대법(對法)의 설법을 펼쳤다. 어떤 개념의 의미를, 그와 정반대인 개념을 드러내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상(無常)이 상”이라고 했고(하택신회), “무위(無爲)가 무엇이냐?”는 질문엔 “유위(有爲)”라고 맞받아쳤다(대주 혜해). 동문서답이니, 묻는 입장에선 매우 난감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있음’은 ‘없음’이라는 개념에 의해생겨나는 것이고, 영원이란 관념은 ‘유한하다’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장단(長短), 고저(高低), 시비(是非), 선악(善惡), 미추(美醜), 빈부(貧富), 승속(僧俗), 노소(老少)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있어야만 비로소 설 수 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는 것이고, 그림자가 없으면 빛도 대접받지 못한다. 사방이 온통 빛으로 가득하면, 눈이 먼다.
중도(中道)란 가운데이기도 하지만, ‘섞음’이기도 하다. 모순된 양변을 하나로 통합할 줄 아는 시선이다. 어느 한편에 치우치게 되면 결국 어느 한편을 편들게 되고, 결국 세상의 정의와 미덕을 그르치고 만다. 중도여야만 마음이 넉넉해지고 슬기로워지며…, 무엇보다 그래야만 모순을 견딜 수 있다. ‘벼락출세’는 이미 처절한 추락을 예비하고 있다. 낙담하지 말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쩌면 저토록 무시무시한 근면과 계략을 짜낼 수 있나 싶은 사람을 종종 발견한다. 대개 딸린 식솔이 많다. 부처님 가피력보다 센 것이 생존력 같다. 한편 생존력이 무슨 짓이든 하게 만드는 힘이라면, 무기력은 아무 것도 못하게 압박하는 힘이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에는, 아무 일이라도 해서 우울증을 탈출해야 한다. 그리하여 중도는 일견 집중력이고…, 몸부림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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