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돈수(頓修), 단박 닦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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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16 년 8 월 [통권 제4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912회 / 댓글0건본문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
선(禪)의 깨달음이 돈오라는 것을 이해한 분들도 단박에 닦는다는 돈수(頓修)에서 또 막힙니다. 평생 수행해도 깨치지 못하는데 단박에 닦는다니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돈오는 이해해도 돈수는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조사선의 바이블이라는 『육조단경』의 “돈수(頓修)”편에 재미있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조 스님 당시에 세상 사람들은 ‘남돈북점’이라 하여 남쪽 혜능 대사는 돈오법, 북쪽 신수 대사는 점수법을 가르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신수 대사는 어느 날 총명한 제자 지성에게 혜능 대사한테 가서 몰래 법문을 듣고 와서 누가 빠르고 더딘지 알려 달라고 당부합니다. 지성은 조계산으로 가서 혜능 대사의 돈오 법문을 듣고는 그만 그 자리에서 언하대오(言下大悟)하여 절하고 말합니다.
“저는 옥천사에서 왔는데, 신수 스님 밑에서는 깨치지 못하다 큰스님 법문을 듣고 바로 본래 마음에 계합하였습니다.”
혜능 대사가 “네가 거기에서 왔다면 염탐꾼이로구나!” 하니,
“말하지 않을 때는 그러하나, 말씀드렸으니 이미 아닙니다.”
“번뇌가 곧 깨달음[煩惱卽菩提]이라는 것도 이와 같다.”
아주 유명한 법문입니다. 신수 대사의 제자가 돈오한 대목입니다. 혜능 대사는 이와 같이 단박 깨치고 단번에 닦는 가르침을 폈으니 천하에 인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우리는 본래부처이니 중생이라는 착각을 단박 깨치면 단번에 닦아 부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조사선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 합니다. 번뇌와 보리(깨달음)가 다르다고 보는 것은 단지 양변에 집착하는 착각입니다. 번뇌도 보리도 연기라는 본질을 보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중도로 존재하며, 모두 실체가 없으니 무아, 공이라 합니다. 그러니 번뇌가 곧 보리, 깨달음입니다.
중생과 부처도 이와 같습니다. 중생과 부처를 각각 실체로 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하지만, 중생도 부처도 중도연기이고 무아, 공입니다. 그러니 중생이 곧 부처고, 부처가 곧 중생입니다. 존재원리로 보면 중생과 부처는 하나, 불이(不二)입니다. 이것이 중도연기법이고 부처님은 이것을 깨달아 어떤 물건이나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반면에 신수 대사는 중생과 부처, 번뇌와 보리가 따로따로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중생이 열심히 점점 닦아가 깨쳐 부처가 된다는 돈오점수가 옳고 돈오돈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철 스님과 서옹 스님께 돈오돈수를 묻다
나도 젊은 시절에는 돈오점수가 옳고 돈오돈수는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봉암사에서 서옹 스님을 모시고 살 때 어느 날, 노장께 “스님, 『서장』 「이참정편」에 ‘이치는 곧 돈오이나 일은 단박에 없애지 못한다[理則頓悟 事非頓除]’는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노장께서는 “나는 『서장』을 안 봤어.”해서 놀랐습니다. 『서장』을 보여드리니 서옹 스님께서 “이 부분은 대혜 스님의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다. 아마도 재가자에게 하는 말이니 방편으로 하였거나 뒷날 누군가 책 만들면서 임의로 넣은 것 같다.”고 하셨어요. 당시에는 서옹 스님 말씀이 납득이 안 되었습니다.
또 한번은 성철 스님께 대든 일이 있습니다. 1970년대 어느 날인가, 내가 머물던 남해 용문사 염불암에 성철 스님이 갑자기 오셨어요. 당시 제자인 비구니 백졸 스님이 용문사 주지를 하게 되어 아마도 노장께서 와보신 것 같은데(그때 해인사 청량사 원타 스님이 모시고 왔다는 것을 뒷날 알았다), 비구니 도량이니 노장께서 염불암으로 올라와 내 방에서 주무시게 되었어요. 당시만 해도 나는 돈오점수 기준으로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보림하던 터였으니, 돈오돈수 대장인 성철 스님이 온다니 잘 됐다 한판 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방으로 모시고 들어가 대들었습니다.
“스님, 돈오점수가 맞지 않습니까?” 단도직입하니, 성철 스님은 갑자기 훽 하고 돌아누워 버리셨어요. 나는 비장한 각오로 대들었는데, 돌아누워 아무 대꾸도 않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냥 물러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돈오돈수를 알고 보니, 노장의 그때 그 행동이 그대로 훌륭한 법문이었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 어느 때 태백산 각화사 동암에서 무심코 『육조단경』 「정혜품」을 보다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뜻을 깨닫고는 비로소 돈오돈수를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그동안 돈오점수가 맞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다른 안목이 열렸습니다. 특히,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이 잘 정리되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런데, 돈오돈수를 바로 알아 공부 방향을 전환하니 그동안 맺은 인간관계에서 많은 문제가 생겼어요. 돈오점수 기준으로 볼 때 깨쳤다고 인정해주고 아껴주던 노장들께서 제가 돈오돈수 이야길 하고 아직 깨친 게 아니다 하니 완전히 외면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정리로 봤을 때는 제가 참 좋아하고 스승으로 따르고 형제처럼 지낸 분들인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수행자들조차 이러한데 학자들이나 재가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말합니다. “조사선, 간화선은 본래성불의 돈오돈수 입장이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돈오점수도 있다. 좀 느리고 빠른 차이는 있지만, 잘못된 길이 아니고 다 같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니 서로 다투거나 차별하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언젠가 도반들과 돈점(頓漸) 법담을 하던 중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서로 싸우면 나는 무돈무수(無頓無修)다”라고 했더니, 한 도반이 『육조단경』에 그 말이 나온다는 거에요. 그래서 찾아보니 과연 「돈수(頓修)」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점(漸)과 돈(頓)이란 무엇인가? 법은 한가지이나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다. 견해가 더디면 점이고, 견해가 빠르면 돈이다. 법에는 점과 돈이 없으나 사람에게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으니 점과 돈이라 이름한다.”
- 『돈황본 육조단경』
육조 스님 법문과 같이 법에는 돈과 점이 없습니다. 법은 하나입니다. 단지, 사람의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으나 이것도 방편으로 한 말이지 법이 아닙니다. 즉, 견해가 더딘 사람을 ‘점수(漸修)’라 하고, 견해가 빠른 사람을 ‘돈수(頓修)’라 하지만, 법에는 돈점이 없습니다. 중도연기, 무아 공인 본래부처 자리에 무슨 돈점이 있겠습니까?
돈수의 가치
그런데, 왜 돈수(頓修)라고 하느냐? 선은 본래부처인데 중생이라 착각에 빠져 있으니 그 착각 깨는 깨달음이라는 관문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대도무문(大道無門) 대도는 문이 없고, 무문관(無門關) 문 없는 문이요, 단박 깨치고 단박에 닦는 돈오돈수(頓悟頓修)라 이름합니다.
그러면, 돈수라는 것이 깨달음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한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이해하여 정견을 세우고 믿음과 발심을 내어 그렇게 공부해가는 사람은 몇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먼저, 자기 스스로 본래부처라는 자존감과 자신감이 나와서 언제 어디서나 당당합니다. 그리고, 항상 스스로 본래부처라 알고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부해 나가니 역경계나 순경계를 만났을 때도 덜 흔들리고 쉽게 중심을 회복합니다. 짜증이나 화가 나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욕망이 일어나거나 집착할 때도 본래부처인데 이러면 안 되지, 삼독심이 나는 것은 착각이고 집착이지 하고 쉬이 정견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나 수행에서도 매우 유용합니다. 나와 너, 번뇌와 지혜, 중생과 부처, 노와 사, 갑과 을, 심지어 돈수와 점수 같은 양변을 나눠 보고 분별망상이 일어나면 착각이다.
쌍차쌍조해서 다 아울러야지 하면서 중도 정견으로 대처해 나갈 지혜가 나옵니다. 우리가 본래부처라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기가 본래부처라는 가치를 아니까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달음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적극적이고 즐겁게 공부해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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