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원교사문, 갈등을 바라보는 네 가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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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6 년 9 월 [통권 제4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12회 / 댓글0건본문
갈등사회와 사구비판
한반도에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정부와 시민단체 간에 찬반이 팽팽하다. 정부는 북한의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 반드시 배치해야 한다며 성주를 예정부지로 발표했다. 반면 지역사회와 시민단체는 사드 배치는 군비경쟁을 촉발하고 한반도를 군사적 표적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며 반대한다. 이 사안은 어떤 형태로든 합의점을 찾겠지만 문제는 이와 같은 갈등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 사바세계라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사회갈등요인지수가 OECD 34개국 중 4번째로 높은 반면 갈등관리 능력을 나타내는 사회갈등관리지수는 27위로 꼴지에 가깝다.
물론 갈등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다양한 주의와 주장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 민주사회이고, 여러 주장을 조율하고 통합하는 것이 민주정치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 사는 세상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쉴 틈 없이 발생하는 갈등과 대립을 관리하고 조율하는가이다.
대개의 경우 갈등은 나와 상대의 견해와 주장이 서로 다른 데서 촉발된다. 따라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역지사지의 태도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옳고 그름, 나와 남이라는 두 가지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상대의 입장을 수용한다 할지라도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또 다른 갈등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하는 길은 모든 차별과 변견이 사라진 중도(中道)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중도를 성취할 수 있을까? 천태 대사는 원교사문(圓敎四門)을 통해 중도의 세계를 설명한다. 원교사문에는 중도를 설명하는 천태의 독창적 교학이 담겨 있지만 논리적 형식은 사구분별(四句分別)을 차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한 알의 사과가 ‘있다(有)’고 했을 때 4가지 측면에서 그것의 진실성을 파고드는 것이 사구분별이다. 제1구는 사과가 있다는 ‘유(有)’에 대한 정립이다. 배나 수박과 구별되고, 독특한 맛과 색깔이 있음으로 사과가 있다는 명제는 긍정된다. 하지만 사과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사과의 본질은 실체가 없는 ‘공(空)’이다. 여기서 사과의 있음을 부정하는 제2구가 등장한다. 한 알의 사과는 대지를 적셔준 봄 비 때문에 싹이 돋고, 토양 속의 자양분 때문에 성장하고, 따사로운 햇살의 에너지 때문에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에 의해 열매를 맺는다. 이처럼 실체로서 사과는 본성이 공하기 때문에 사과의 있음이 부정되는 ‘무(無)’가 성립된다.
하지만 사과의 있음과 사과의 없음은 서로 모순되지만 둘 다 맞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둘을 모두 긍정하는 ‘역유역무(亦有亦無)’라는 제3구가 성립된다. 사과는 독립적 실체가 없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매끈한 과육이 만져지고, 고운 빛깔이 보이고, 단맛이 느껴짐으로 사과는 ‘또한 있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하지만 아무리 눈앞에 사과가 있어도 무수한 조건으로 있을 뿐 고정된 실체가 없음으로 ‘또한 없다’라는 명제도 성립된다. 따라서 제3구는 있음과 없음을 모두 긍정하는 긍정종합이다.
반면 제4구는 있음과 없음을 모두 부정하는 부정종합이다. 사과는 무수한 존재들과 관계 속에 존재할 뿐 실체가 없음으로 ‘있지 않음(非有)’이 성립된다. 또 사과의 실체가 없다고 해도 눈앞에 사과의 향기와 빛깔과 맛이 존재함으로 사과가 없다는 명제 역시 부정됨으로 ‘없지 않음(非無)’도 성립 된다. 따라서 제4구는 있음과 없음이 모두 부정되는 ‘비유비무(非有非無)’가 된다. 3구와 4구는 대립하고 모순되는 두 명제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구시구비(具是具非)’라고 한다. 옳음과 그름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태는 이를 ‘쌍조쌍비(雙照雙非)’라고 했다. 비춤과 부정이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원교사문과 네 가지 관점
이상과 같은 사구분별은 세친 보살의 논서 『구사론』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 논서는 당나라 때 현장에 의해 번역되어 법상종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천태 대사는 이 논서가 번역되기 전에 이미 『마하지관』을 통해 원교의 중심사상을 ‘유(有)’・‘공(空)’・‘역공역유(亦空亦有)’・‘비유비무(非有非無)’라는 네 가지 명제로 설명했다. ‘무’가 ‘공’으로 대체되었지만 논리적 맥락은 동일하다. 천태는 원교사문을 통해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와 같은 차별과 대립을 넘어 소통과 융합이라는 중도의 세계로 인도하는데, 그 과정은 아래와 같이 네 단계로 구성된다.
첫째는 유문(有門)이다. 중생들은 견혹[見]과 사혹[思]으로 대변되는 온갖 번뇌에 휩싸여 있지만 번뇌 자체가 거짓임[假]을 꿰뚫어보면 중생의 삶이 그대로 법계이며, 모든 것이 진리의 성품[法性]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유문은 중생 그 자체를 긍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둘째는 공문(空門)이다. 중생들은 사바세계를 실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마치 허공의 꽃과 같아 실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천차만별로 펼쳐진 중생세간과 그에 따른 모든 번뇌는 실체가 없는 공이다. 유문에서 인정했던 중생세간을 부정하는 것이 공문이다.
셋째는 역공역유문(亦空亦有門)이다. 마치 하나의 대지에서 수많은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이 법계에는 번뇌도 있고, 불성도 모두 있다. 중생의 번뇌도 인정하고, 깨달음과 법성도 모두 인정하는 긍정종합이 역공역유문이다.
넷째는 비유비무문(非有非無門)이다. 법성은 불가사의하여 세간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간을 떠난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와 보리, 세간과 법계라는 두 명제를 모두 부정하는 부정종합이다.
이상과 같은 원교사문은 중도의 실상을 설명하는 심오한 교리체계이고, 그것은 대립과 갈등을 초월하여 원융무애한 중도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형식은 서로 다른 견해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푸는데 유용한 틀로 활용할 수 있다.
첫째, 유문은 긍정이므로 먼저 나를 긍정하는 것이다. 다만 맹목적 자기 긍정이 아니라 왜 나의 주장이 옳은지 성찰하고 바른 논리와 내용을 갖추는 것이다. 화합과 공존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침묵이 아니라 나 스스로 바른 견해를 가지고, 그것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에서 온다. 따라서 갈등을 넘어서는 첫 번째 단계는 나 스스로 바른 견해를 갖고 올바르게 발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성찰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둘째, 공문은 부정이므로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틀렸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 타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속에 담긴 내용의 타당함도 발견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나와 남의 견해와 주장을 모두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셋째, 역유역공은 모두를 긍정하는 것이다. 나의 견해와 상대의 주장을 곰곰이 성찰하면 나의 주장과 상대의 주장에는 모두 일리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아집을 내려놓고 각자가 주장하는 내용을 곰곰이 성찰하면 비록 표현과 방식은 다르지만 근본은 서로 다르지 않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나의 주장은 왜 옳고, 너의 주장은 왜 옳은지를 성찰하고, 서로의 주장이 갖는 정합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넷째, 비유비공은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의 주장도 틀렸지만 너의 주장도 틀렸음을 인정하는 상호부정이다. 자기주장의 허점을 알고 굽힐 줄도 알아야 하지만, 상대방의 주장에 담긴 허점과 오류도 걸러낼 줄 알아야 한다. 상대가 나의 견해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내 주장에 허점이 있는 것이고, 상대의 주장이 납득되지 않는다면 그 주장에도 모순이 있는 법이다. 따라서 비유비공의 단계는 나와 너의 주장이 갖고 있는 허점과 모순을 인정하고 걸러내는 것이다.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똑같은 물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네 가지로 보인다고 했다. 견해 차이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도 결국은 하나의 사안을 나와 너의 방식으로만 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 그런 점에서 천태의 원교사문은 어떤 사안을 바라보는 네 가지 관점과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내 속에 너의 생각이 있고, 너 속에 나의 생각이 있는 입체적 안목을 갖게 될 때 이원화된 대립과 갈등을 넘어 조화와 화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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