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깨달음, 견성에 대하여
페이지 정보
박희승 / 2016 년 9 월 [통권 제4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502회 / 댓글0건본문
화두타파 확철대오해야 깨달음
화두 참선에서 깨달음은 화두가 타파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화두 참선을 시작해서 생소하던 화두가 익숙해지고 익숙했던 분별망상이 낯설어지면 공부에 진전이 있게 됩니다. 그러다 안거나 집중 수련 기간에 화두에 몰입하면 화두 삼매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와 화두가 하나 되어 화두 일념이 5분 이상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면 삼매에 들어갑니다.
화두 의심이 지속되는 삼매가 점점 깊어지면 선방에 앉아있을 때나 화장실이나 식당을 오고 가고 해도 화두 일념이 끊어지지 않는 동정일여를 체험할 수 있고, 또, 꿈속에서도 지속되고[몽중일여], 자나깨나 화두 삼매가 지속되면[오매일여], 깨달음이 가까워진 것입니다.
어쨌든 자나 깨나 화두 의심이 지속되는 오매일여 경지에 이르러도 아직 깨친 게 아닙니다. 이때에도 화두를 놓지 말고 힘껏 밀어붙이는 것을 “백척간두 진일보” 또는 “은산철벽 투과”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나라 스님으로 화두 참선으로 깨쳐 중국에까지 가서 인가를 받아 온 태고 스님이나 나옹 스님의 어록에 보면, 자나 깨나 화두삼매가 지속되는 것이 3일 내지 7일이면 깨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오매일여 상태에서도 화두를 밀어붙이면 마침내 화두 의심이 타파되어 확철대오(廓徹大悟)하게 됩니다. 간화선을 정립한 대혜 스님은 『서장』에서 확철대오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가슴속 밝음이 백, 천 개 해와 달 같아 시방세계를 한 생각으로 밝게 통달하되 한 털끝만큼도 분별심이 없으니 비로소 구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과연 능히 이와 같으면 어찌 단지 생사의 길 위에서만 힘을 얻겠습니까? 다른 날에 다시 권력을 잡아 임금을 요순의 지위에 올리기를 손바닥 가리키는 것과 같이 할 것입니다.”
대혜 스님은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백, 천 개가 떠있는 것처럼 마음이 환히 밝아져 분별심이 완전히 사라져 깨친다는 겁니다. 화두가 타파되면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한 번에 타파되고 일체 분별망상도 사라져 하늘에 백 개나 천 개의 태양과 달이 온 천하를 밝히듯이 마음이 그렇게 밝아집니다. 깨치면 생로병사를 해탈하여 부처가 됩니다. 아니, 본래 부처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본래부터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가진 부처인데, 분별망상에 가려져 중생이라 착각하며 살아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통해 분별망상을 타파하면 착각을 단박에 깨쳐 부처로 돌아가는 겁니다. 대혜 스님은 조정 대신인 한 거사에게 깨친다면 마음이 환하게 밝아짐은 물론 신하가 왕을 요순처럼 성군의 지위에 올리는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본래는 부처이나 ‘내가 있다’는 착각 속에서는 마음이 좁쌀만 하나 그 착각에서 깨어나 부처로 돌아오면 마음이 온 우주와 하나 되어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게 됩니다. 이제 나와 너, 선과 악, 생과 사, 좌와 우, 갑과 을, 부와 가난, 중생과 부처, 미망과 깨달음 등등 일체의 대립하는 양변에 집착과 분별심이 사라지고 공존과 공생, 지혜와 평화, 그리고 대자유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깨친 사람을 부처라 하고 또 영원한 대자유인이라 합니다.
화두를 타파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싯다르타가 명상하다 새벽별을 보고 깨쳐 부처가 된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초전법륜에서 당신이 괴로움과 쾌락의 양변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노라고 중도대선언을 하셨듯이 화두 타파하여 분별망상을 완전히 비워 중도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견성성불에 대한 오해와 정견
화두를 타파해서 중도를 깨쳤다는 것은 우리 본래 마음, 즉 자성(自性)을 보았다 하여 견성(見性)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본래 마음은 중도연기로 존재합니다. 나와 내 마음이라 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중도연기라 하고 이것을 다른 말로 불성(佛性),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화두를 타파해서 견성 성불하였다 함은 내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확연히 깨쳤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선종의 종지(宗旨)입니다.
그런데, 이 견성 성불에 대하여 근래에 몇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견성할 때 자성을 브라만교의 초월적인 자아인 아트만(ātman)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남방불교를 공부하신 분들이 선종의 깨달음인 견성은 아트만을 깨치는 것이라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선종에서 견성하는 성품은 불성, 자성을 말하니 곧 중도연기, 무아를 말합니다.
남방불교에서 말하는 사성제, 팔정도를 완성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오해가 생겼는지 살펴보면 선문(禪門)에서도 반성해 볼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선문에서 견성을 ‘참나’ ‘진아(眞我)’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것이 초월적인 자아인 ‘아트만’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나, 진아 이런 표현은 가능하면 쓰지 말고 중도연기, 무아, 공을 깨침이 견성이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다른 오해는 견성성불하고도 전생의 습기나 미세망념이 남아 있어 더 닦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선종의 견성을 돈오점수로 오해한 분들의 주장인데, 견성한 뒤에 더 닦을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선종의 견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돈오점수로 보는 분들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중도를 깨쳐 생로병사를 해탈한 부처님에게 전생의 습기니 미세망념이 남아 있을까요? 부처님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은 것이니 더 닦고 깨칠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견성했는데, 아직 뭐가 남아 있어 더 닦아야 하는 분이 있다면 아직 견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견성을 말하는 분들이 더러 보입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병폐입니다.
성철 스님이 고불고조의 깨달음이 ‘오매일여’를 투과한 것이라 주장한 것도 다 이런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분명한 기준을 세운 것입니다. 실제 이 병은 뿌리가 깊습니다. 화두 참선하다 보면 뭔가 신비한 경계를 체험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이때 바른 선지식을 찾아가 공부를 점검 받아야 하는데, 혼자 하니 그 신비한 경계에 빠져 뭘 보았다고 그것을 견성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견성했다고 깨쳤다고 큰소리치는 이들이 간혹 보이는데 들어 보면 깨달음 근처도 못간 안목들인데, 아집에 빠져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착각 도인에도 따르는 이가 생기고 인터넷에다 동영상도 만들어 올리고 책도 만들어 돌리니 점점 더 대중이 현혹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중도연기에 바른 안목을 세우고 수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 정견이 선 사람은 그런 착각 도인에 대하여 바른 안목으로 판별해 낼 수 있습니다.
또 이와 비슷한 오해가 ‘연기, 무아를 잘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주장입니다. 부처님이 깨친 것이 연기, 무아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그런데, 이 연기, 무아를 이해하는 것과 깨달아 증득하는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를 깨달음이라 한다면, 내가 연기, 무아를 잘 알게 되면 깨달음이라는 말인데, 이 기준으로 깨달음을 본다면 우리 주변에 깨친 부처님이 엄청나게 많겠지요. 그런데, 어째서 불교계가 이렇게 혼란스러운가요? 연기 무아를 이해해서 부처된다면 우리 종단에도 부처님이 많이 나와서 혼돈과 갈등을 능히 해결해 나갈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실제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연기 무아를 잘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있고, 내가 이해할 연기, 무아가 있다면 주관과 객관이 벌어져 있으니 주객합일인 깨달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깨쳐 증득해야 합니다. 중도연기, 무아 공을 깨쳐 하나가 되어 영원히 그런 삶을 살게 될 때 비로소 깨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분별심, 알음알이로 중도연기를 이해한 걸로는 생로병사를 해탈할 수가 없습니다.
혜능 스님은 『육조단경』에서 견성(見性)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識心見性] 스스로 불도를 이루나니 즉시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에 돌아간다.”
마음을 알아 견성하면 불도를 이룬다 하니 성불(成佛)이란 말입니다. 마음을 알아 견성함은 중도연기, 무아를 알아 견성함이 곧 성불입니다. 성불, 즉 부처된다 함은 확철대오하여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본래성불, 부처로 돌아감을 말합니다. 육조스님도 견성을 확철대오라 하였습니다.
화두 참선에서는 화두타파가 확철대오이고 곧 견성성불입니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