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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바보’가 되어야, 병신을 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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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6 년 10 월 [통권 제4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3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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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음의 감옥엔 창살이 없다. 마음만 열면, 언제든 나갈 수 있다. 마음만 쉴 수 있다면, 지옥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법이다.

 


● 제63칙
조주가 죽음에 대해 묻다(趙州問死, 조주문사)


조주종심(趙州從諗)이 투자대동(投子大同)에게 물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경지에 관해 말해보라.”
투자가 말했다. “밤에 나다니지 말고 날이 밝으면 떠나야 합니다.”

조계종 제2대 종정을 지낸 청담 스님(1902~1971)은 성철 스님과 절친이었다. 지난해 불교신문에 당신의 삶과 사상을 연재한 적이 있다. 아낙들에게 들려주는 생활법문이 인상적이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첫날 저녁부터 생과부가 되어 일생 동안을 지내는 사람이라도 남편을 나쁘다고 하지 말라.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남편을 따라주어야 한다. 밤에는 남편이 가는 대로 등불을 들고 바래다주고, 상대에게 몇 십만 원씩이라도 갖다 주면서 우리 남편 비위 좀 맞추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한다.”

 


 

 

상대란 남편의 내연녀다. 부인 입장에선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여자에게, 외려 잘 보이고 굽실거리라는 당부다. 요즘 세상에서 이렇게 발언했다면, 빗발치는 ‘악플’ 속에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할 판이다. ‘사내’ 자체가 권력이었던 시대적 배경이 얼마간 작용했을 것이다. 여하튼 설법의 요지는 보살이 지녀야할 무궁한 자비심이다. 끊임없이 용서와 배려로 일관하라는 이야기인데, 반전이 절묘하다. “그래야만 다음 생에 그러한 남편을 안 만날 것이다. 빚을 다 갚았기 때문이다.”

 

대사각활(大死却活). 크게 죽어야 도리어 산다는 뜻이다. 사람은 시련 속에서 성장한다. 평탄한 인생은 사실 무방비의 인생이다. 지금 힘들고 괴롭다면,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내생에 받을 벌을 금생에 받고 있을 뿐이다. 또한 부활에는 인내와 함께 시간이 필요하다. 안달이 난다고 분통이 터진다고 섣불리 밤에 돌아다니면, 넘어지거나 강도를 당하기 십상이다. 청담 스님의 말씀을 첨부한다. “불교 신앙이란 인과를 철저히 믿는 자세다.” 차라리 바보가 되려면 ‘큰바보’가 되어야만, 병신을 면한다.

 


● 제64칙
자소의 법맥(子昭承嗣, 자소승사)


법안문익(法眼文益)은 장경혜릉(長慶慧陵) 밑에서 오랫동안 공부했는데, 정작 법(法)은 지장계침(地藏桂琛)에게서 이었다. 자소(子昭)라는 수좌가 물었다.
“스님께선 개당(開堂)을 하셨는데, 누구의 법을 이으셨습니까?” “지장이다.” “장경 선사가 들으면 서운해 하시겠는데요.” “나는 그 자의 말을 알지 못한다.” “왜 묻지 않으셨습니까?”
법안이 되물었다. “만상 가운데서 홀로 몸을 드러낸다 함은 무슨 뜻인가?” 자소가 말없이 불자를 들어보였다. “장경에게서 배운 것이군. 자네의 경지를 말해보게.” 자소가 잠자코 있자 법안이 다시 질문했다. “만상(萬象) 가운데서 홀로 몸을 드러낸다는 말은 만상을 무시하는 것인가? 무시하지 않는 것인가?” 자소가 대답했다.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개로구만(兩箇).” 좌우에서 법안의 가르침을 듣던 이들이 “만상을 무시하는군요.”라고 입을 모았다. 선사가 외쳤다. “만상 가운데 홀로 드러냄이여! 에라이!”

늙어가면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알고 보면, 사회생활의 전부다. 오로지 혼자 힘으로 일할 것 같은 프리랜서도 결국은 인맥장사다. 직장인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제대로 갈아탄 ‘라인’ 하나가 100명의 아버지보다 낫다. 명리학에서는 권력을 기반으로 한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관성(官星)’이라 부른다. 그리고 ‘관’은 나(비겁, 比劫)를 극(克)한다. 실제로 이와 같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면 나의 욕망을 억눌러야하고, 벼슬을 하려면 나의 진심을 숨겨야 하는 법이다.

 

자소는 법안의 배신을 비웃고 있는 듯하다. 하긴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고 그늘 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랴. 그래도 “나는 그 자의 말을 알지 못한다.”며 옛 스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태는 자못 지나치다. 자존심의 다른 말은 질투심이다. 법안 본인도 켕기는 게 많았는지, 장경의 아래서 공부한 자소의 도력을 애써 깎아내리는 분위기다. ‘양개(兩箇)’란 분별심 그러니까 철저하지 못한 깨달음을 가리킨다. 법안의 추종자들도 한통속이 됐다. 아무리 천하장사라도 3명 이상이 덤비면 버거운 게 이치다.

 

‘만상 가운데서 홀로 빛나는 자’는 관성을 부숴버린 자다.
돌이켜 생각하면 명예가 없어도 먹고는 산다. 열심히만 살면, 별처럼 반짝이진 않더라도 살 수는 있다. 누군가의 개가 되기 위한 노력은, 개도 안 물어갈 헛수고다. 반쯤은 욕설이 섞인 법안의 마지막 외침은, 자책으로도 들리고 반성으로도 들린다. 떠들기 전에 돌아보자. 물이 아래로 흘러야만 떠먹을 수 있고 설거지도 할 수 있거늘, 중력을 거슬러 산에서 혼자 쓸쓸하게 살았다. ‘거래’가 아닌 ‘거울’의 글을 써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도 그 글에 얼굴을 비춰본다.

 


● 제65칙
수산의 신부(首山新婦, 수산신부)


어떤 승려가 수산성념(首山省念)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수산이 말했다. “시어머니가 끄는 나귀에 며느리가 탄 격이라.”

 

유기론적 세계관과 갈등론적 세계관. 사회발전의 원인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사조다. 전자는 서로 도우면서 후자는 서로 싸우면서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권리는 양보와 협조의 몫이란 게 유기론자들의 입장이다. 반면 갈등론자들은 권리는 쟁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를 생각하면 유기론이 맞는 듯도 하고, 민주화를 향한 고난의 투쟁을 생각하면 갈등론이 정답이다.

 

‘본래부처’라지만 1%의 부처와 99%의 부처는 삶의 태가 완전히 다르다. 강자의 지배와 약자의 굴종을 정당화한다는게 유기론의 약점이다. 아수라장을 조장하는 갈등론 역시 예쁘게만 봐주기는 어렵다. ‘며느리를 상전으로 모시는 시어머니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란 게 선사의 가르침이다. 결국 ‘참회론’이 제3의 길로 보인다. 단 한 번도 남을 위해 울어본 적이 없다면, 그 누구도 부처와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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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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