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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연기를 보는 네 가지 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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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6 년 10 월 [통권 제4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79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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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본다

 

부처님은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이 연기의 진리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철 스님도 “일체 불법의 근본사상이 십이인연에 포함된다는 것은 원시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도록 일관된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연기법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의 존재론이며, 객관세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물론 연기법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고(苦)의 발생과 소멸에 관한 내용이기도 함으로 수행론이기도 하며, 행위와 그 행위에 대한 과보를 설명함으로 불교적 도덕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연기법은 불교사상의 근간이 되는 핵심이며, 불교적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천태 대사는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신 것이 모두 십이인연에 의거하였다.”고 했고, 성철 스님은 “십이인연을 제외하면 불법이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 행하는 모든 의례에서 빠지지 않는 『반야심경』에는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亦無老死盡.”이라는 구절이 있다.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고, 나아가 노사도 없고 노사가 다함도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무명(無明)에서 시작하여 노사(老死)로 이어지는 12연기 전체를 부정하는 내용이다. 연기설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뒤 하신 법문이고, 대소승의 모든 사상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기에 ‘연기를 보는 것이 곧 법을 보는 것’이라고 했는데 왜 그와 같은 핵심교설을 부정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오늘 살펴볼 『마하지관』에 등장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의 내용은 분명 하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안목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천태 대사에 따르면 연기에 대한 이해는 네 가지 해석으로 확장된다. 천태 대사는 부처님의 모든 교설을 내용적으로 분석하여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로 분류했다. 부처님의 말씀은 하나이고, 그 의미도 ‘한 맛[一味]’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네 가지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이 왜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까? 그 이유에 대해 성철 스님은 “중생은 눈병난 사람처럼 하나의 물건을 두고도 제각기 달리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일한 구슬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검게 보고, 어떤 사람은 푸르게 보고, 어떤 사람은 노랗게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네 가지로 설하신 것이 아니라 동일한 말씀을 하셨는데, 중생들이 받아들일 때 자신들의 근기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대품반야경』에 따르면 “만약 십이인연법을 깊이 관한다면[深觀] 도량에 앉는다[坐道場].”는 구절이 있다. 누구나 십이인연에 대해 깊이 이해하면 그것이 곧 도량에 앉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량에 앉음’이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룬 바로 그 자리, 즉 ‘보리좌(菩提座)’에 앉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누구나 십이인연을 깊이 관찰하고 그 의미를 바로 깨치면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고,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보리좌에 앉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의 그릇과 안목에 따라서 비록 자기 분상에서는 십이연기를 다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도달한 경지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구분된다.

 

연기법에 대한 네 가지 이해

 

첫째, 장교(藏敎)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장교란 초기 불교의 경율론 삼장을 의미하는데, 장교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경전에 기록된 문자대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 따르면 십이연기는 무명(無明)에서 시작하여 행(行)과 식(識)을 거쳐 생(生)이 발생하고, 최종적으로 생으로 인해 노사(老死)가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고(苦)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유전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무명으로 인해 생이 있고, 생으로 인해 죽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고의 소멸과정을 설명하는 환멸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무명이 없으면 행이 없고, 마침내 생이나 죽음도 없어진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런 차원으로는 십이연기를 아무리 깊이 이해했다할지라도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목수초좌(木樹草座)’라고 했다. 겨우 나무 위에 풀을 깔고 앉는 매우 소박한 경지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생멸의 견해로 십이인연을 보면 설사 공부를 성취했다 하더라도 생멸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아무리 경전을 달달 외워도 언어와 문자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생멸이라는 이분법적 변견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통교(通敎)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통교는 성문, 연각, 보살이라는 삼승에게 공통되는 가르침을 말한다. 앞선 장교의 이해 방식이 경전에 기록된 문자의 의미대로 생과 사가 발생하고 소멸한다고 이해하는 관점이었다면 통교의 관점은 모든 번뇌의 뿌리가 되는 무명 자체가 실체 없는 공(空)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생사의 원인이 되는 무명이 공하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행도 공하고, 종국에 가서는 생도 공하고, 죽음도 공하게 된다.

 

이렇게 경전에 기록된 연기설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그 실체가 공하다고 관찰하는 사람은 ‘칠보수천의좌(七寶樹天衣座)’에 앉게 된다고 했다. 귀한 칠보나무에 좋은 비단으로 꾸민 멋진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그만큼 향상됐음을 의미한다. 십이연기가 모두 공하다고 단언하는 『반야심경』의 내용은 바로 이런 통교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안목은 문자적으로 이해한 단계보다는 향상된 것은 맞지만 궁극적 경지는 아니다. 모든 것이 없다는 관점에 매몰되어도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분법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공이라고만 바라보면 공병(空病)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다.

 

셋째, 별교(別敎)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별교란 삼승 중에 보살승만을 위해 따로 설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보살은 십이인연을 단지 거짓 이름 즉, ‘가명(假名)’이라고 바라본다. 보살은 무명이 생사의 뿌리이므로 그 무명을 밝히겠다고 수행에만 투신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공함으로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보살은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존중하며 중생을 향한 연민과 자비의 실천에 몰두한다. 연기를 이렇게 이해하면 칠보로 장식된 보석의 자리[七寶座]에 앉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천태는 이런 이해와 실천도 궁극적 경지는 아니라고 했다. 보살승의 관점과 실천은 비록 노사나불이 앉는 칠보좌에 앉는 높은 경지는 맞지만 그와 같은 이타적 실천만으로 광명이 두루 빛나는 ‘광명변조(光明遍照)’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실천은 자신이 살아 실천하는 시공에만 자비가 머물기 때문에 언제나 법계에 머무는 ‘상주법계(常住法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넷째, 원교(圓敎)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원교란 부처님이 체득한 깨달음을 그대로 담고 있는 가장 완전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원교의 관점에서는 십이인연을 생사의 관점, 모든 것이 공하다는 관점, 오로지 중생을 위한 실천만이 옳다는 세 가지 관점을 모두 넘어서서 중도(中道)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때로는 무명을 밝히기 위해 수행에 몰두하는 것이 옳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과 존재에 대한 집착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것이 공하다고 설명하는 것이 옳기도 하다. 나아가 형이상학적 담론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고 고통 받는 중생 속으로 달려가 그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베푸는 것이 옳기도 하다.

 

중도의 관점은 한편으로는 어느 것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정하여 고집하지도 않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점이다. 십이연기를 이와 같이 중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마치 비로자나불과 같이 어떤 자리도 집착하지 않고 허공을 자리로 삼는다[虛空爲坐]고 했다.

 

연기법은 분명 불교의 핵심 교설이지만 그것만을 금지옥엽으로 잡고 있으면 오히려 독단이 되고 스스로를 속박하는 감옥이 된다. 그런 독단을 깨기 위해 『금강경』에서는 ‘정해진 법은 없다[無有定法]’라는 공의 처방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법에 대한 집착을 치료하는 약일뿐이므로 공도 집착할 것은 못된다. 또 어떤 이는 이론도 필요 없고, 공도 필요 없고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천만이 최고라고 한다. 하지만 바른 지혜에 근거하지 않은 실천은 결코 오래 갈 수도 없고, 세상의 빛이 될 수도 없다. 따라서 연기법을 이해하는 가장 수승한 태도는 교리도 중요하고, 법에 집착하지 않는 열린 태도도 중요하고, 자비의 실천도 중요함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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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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