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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질주의 삶과 멈춤[止]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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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6 년 11 월 [통권 제4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6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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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의 삶을 멈추는 지관

 

현대인의 삶은 날마다 질주하는 삶이다. 출근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은 이른 아침 현관문을 나서기 무섭게 정류장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때로는 그렇게 헐레벌떡 내달리는 삶에 지쳐 문득 걸음을 멈춰보기도 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전철역에 이르거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을 생각하면 멈춤은 자신의 의사 밖의 일이 되고 만다. 살아 있다는 것은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하고,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며 날마다 정신없이 내달리며 사는 것이 현대인들의 고단한 삶이다.

 

그래서일까? 몇 년 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아마도 정신없이 내달리는 삶에 지친 현대인들의 마음이 투영된 결과일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 앞만 보고 내달리면 진짜 소중한 것을 불 수 없다. 모든 것들이 차창 밖의 풍광처럼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질주를 멈추어야만 진짜 소중한 것들이 보이는 법이다.

 


 

 

이렇게 질주를 멈추고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존재의 실상을 관조하는 것은 불교수행의 핵심이기도 하다. 천태학에서는 질주를 멈추고 존재의 실상을 관조하는 수행을 ‘지관(止觀)’이라고 한다. 지관 수행에서 핵심은 글자 그대로 ‘멈춤(止)’과 ‘봄(觀)’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남방불교 수행법인 사마타가 지(止)이고, 위빠사나가 관(觀)에 해당한다. 이는 불교수행의 핵심이 ‘질주의 멈춤’이라는 정(定)과 ‘실상의 관조’라는 혜(慧)에 있음을 보여준다.

 

지관의 의미를 좀 더 세심히 살펴보면 지(止)는 사마타(Śamatha)의 번역으로 말 그대로 ‘멈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멈춤’이란 단지 분주한 삶의 멈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멈춤의 핵심은 ‘분주한 욕망과 번뇌의 멈춤’이다. 따라서 지는 번뇌가 사라진 고요, 즉 선정(禪定)과 적멸(寂滅)을 얻기 위한 수행이다.

 

반면 관(觀)은 위빠사나(Vipaśyanā)의 번역으로 ‘관조’ 또는 ‘관찰’을 의미한다. 존재의 이치와 근본을 바르게 관조하는 것이므로 지혜의 체득을 목표로 하는 수행이다. 천태학에서는 이와 같은 수행의 두 주제를 ‘지관’으로 통일하고 있다.

 

지자 대사는 『마하지관』에서 ‘지(止)’에 대해서 세 가지 의미로 설명하고 있는데, 핵심 요지는 ‘쉼’과 ‘머무름’이다. 첫째 ‘쉼[息]’이란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갖가지 망념을 고요히 쉬는 것이다. 질주하는 삶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기에 멈추는 것이 수행의 관건이다. 우리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와 같은 목표를 향해 분주하게 질주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를 질주하게 한 그 무엇이 나의 선택이 아니거나 잘못된 꿈이라면 아무리 빠르게 질주해도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런 맥락에서 ‘멈춤’은 우리가 바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가에 대한 반문이자 성찰이기도 하다.

 

둘째 ‘머무름[停]’이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함 속에 평화롭게 정착하는 것이다.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마음을 멈추게 하려면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이 실체 없는 공(空)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모든 존재가 실체 없는 공이며,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을 할 때 일시적 멈춤이 아니라 고요와 평화의 세계에 정착할 수 있다.

 

‘관(觀)’에 대해서도 『마하지관』은 세 가지 의미로 설명하고 있는데, 요지는 ‘꿰뚫다’와 ‘통달하다’로 압축된다. 첫째 ‘꿰뚫다[貫穿]’의 의미는 날카로운 지혜로 모든 번뇌를 꿰뚫고 존재의 실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둘째 ‘통달하다[觀達]’의 의미는 모든 존재의 성품을 바르게 꿰뚫어보는 안목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지관은 질주의 멈춤이라는 정(定)과 실상의 관조라는 혜(慧)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의 실상으로서 지관

 

그런데 천태학에서 지관은 단지 질주를 멈추는 수행덕목에만 국한되지 않고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는 존재론이자 세계관이기도 하다. 천태지의는 『마하지관』에서 “법의 자성이 항상 적멸한 것이 지의 뜻이고(法性常寂卽止義),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는 것이 관의 뜻(寂而常照卽觀義).”이라고 했다.

 

여기서 ‘지(止)’ 언제나 고요한 존재의 성품이 된다. 존재의 본성은 고요하지만 무한한 광명을 항상 비추고 있는 것이 관(觀)이다.

 

이를테면 지가 존재의 본성이라면 관은 존재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천태지의는 “이치의 성품이 항상 적멸한 것(理性常寂)을 지(止)라고 하며,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어(寂而常照) 방편이기도 하고 실상이기도 한 것(亦權亦實)을 관(觀)이라 한다.”고 했다. 지가 맹목적 질주를 막고[遮] 제법의 본성을 성찰하는 것이라면, 관은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비춤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존재의 실상은 항상 고요하면서도 법성은 언제나 찬란히 빛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존재의 실상은 언제나 고요함 즉 ‘상적(常寂)’이지만 아무 작용도 없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상조(常照)’이기도 하다.

 

고요한 본성으로서의 적(寂)과 항상 비추는 작용으로서의 조(照)를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하나의 법(法) 즉 존재를 관찰해 보면 된다. ‘항상 비춤[常寂]’이란 드러나지 않고 관계 속에 숨어 있는 연기적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송이 국화는 저 혼자 핀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봄부터 내린 빗물도 깃들어 있고, 따사로운 햇살도 스며있고, 바람과 허공을 떠가는 구름도 배어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한 송이 국화에는 단지 꽃만 보일 뿐 그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와 같은 수많은 조건들이 국화를 피우게 했지만 그것들은 소리 없는 침묵이 되어 조용히 있을 뿐이다. 이렇게 고요한 침묵에 쌓여 있는 존재의 본성을 ‘항상 고요함’ 즉 상적(常寂)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고요한 침묵들 즉, 봄부터 내린 빗물, 따스하게 스며든 햇살, 토양 속의 수많은 미생물들이 소리 없는 침묵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조건들이 있어 한 송이 국화는 필 수 있었다. 따라서 국화라는 개별 존재의 이면에는 수많은 존재들이 작용하고 있다. 고요하지만 하나의 존재를 있게 하는 연기적 작용이 바로 ‘항상 빛남’ 즉 상조(常照)가 된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본성의 관점에서 보면 개별적 존재만 드러나고, 무수한 조건들은 침묵 속에 있다. 하지만 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무수한 조건들은 침묵 속에서 개별 존재를 있게 한다.

 

삼라만상이 모두 이와 같으므로 온 세상은 ‘항상 고요한 빛의 국토’ 즉, 상적광토(常寂光土)가 된다. 상적광토는 고요히 침묵하고 있는 ‘차(遮)’와 그 침묵하는 존재들이 하나의 대상으로 드러나는 ‘조(照)’로 직조되어 있다. 이처럼 지관은 수행론에 그치지 않고 불교의 핵심적 교리인 연기와 중도를 설명하는 교리로 확장된다. 이는 『마하지관』에서 설명하는 세 가지 지의 의미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지는 체진이니(止卽體眞) 비추면서도 항상 적멸하고(照而常寂), 지는 수연이니(止卽隨緣)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고(寂而常照), 지는 그치지 않는 지이니[止卽不止止] 쌍차하며 쌍조한다(雙遮雙照). 지는 부처의 어머니이고(止卽佛母), 지는 부처의 아버지이며(止卽佛父), 또한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지는 부처의 스승이고 부처 자신이다.”

 

첫째 체진지에서 ‘지(止)’란 고요함이고, 그 고요함이 곧 ‘참다움(眞)’이라고 했다. 한 송이 국화는 눈앞에 있지만 국화라는 개별적 실체로 있는 것은 아니다. 국화의 실체를 추구해 들어가면 국화는 아무런 실체도 없는 공(空)이다. 국화는 수많은 조건들이 동참하여 만들어낸 연기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조건들은 국화를 피워내고도 자기들이 국화를 피웠다고 자랑하지 않고 침묵 속에 숨어 있다. 이것이 ‘비추되 항상 고요함[照而常寂]’이라는 존재의 연기적 본성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무수한 조건들로 인해 존재하며 개체적 실체가 없음이 진공(眞空), 즉 ‘완전한 공’이다.

 

둘째 수연지에서 ‘수연(隨緣)’이란 고정불변의 실체로 머물지 않고 무수한 조건을 따라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한 송이 국화의 개별적 실체를 추구해 들어가면 텅 빈 공이다. 국화를 피워낸 것은 빗물과 봄 햇살과 토양의 자양분이라는 무수한 조건이다. 그들 조건들은 국화 뒤에 숨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국화를 피어나게 했으니 이것이 ‘고요하되 항상 비춤[寂而常照]’이다. 하나의 개체를 있게 한 무수한 조건들은 고요하면서도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움직임(千變萬動)이 살아 있지만 고요히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무수한 조건 속에 하나의 존재가 드러나기 때문에 이를 묘유(妙有) 즉 ‘신비로운 있음’이라고 한다.

 

셋째 부지지에서 부지(不止)의 지란 ‘그치지 않는 지[不止止]’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침(止)은 쌍차를 말하고, 그치지 않음(不止)는 쌍조를 말한다. ‘그침[止]’은 무수한 조건들의 고요한 침묵이므로 쌍차이고, ‘그치지 않음[不止]’이란 침묵하고 있지만 항상 작용하고 있는 쌍조를 의미한다. 하나의 존재는 무수한 조건들의 침묵인 쌍차와 침묵 속에서도 늘 비추는 쌍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곧 쌍차쌍조로 표현되는 존재의 중도적 본성이다.

 

이처럼 지관은 질주의 멈춤이라는 차원을 너머 존재의 실상에 대한 통찰이고, 진공이고 묘유이며, 존재의 중도성을 설명하는 교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천태지의는 지를 단순히 수행의 절차로 보지 않고 ‘부처의 어머니이고 부처의 아버지’라고 했다. 모든 부처님과 천하의 선지식들이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달아서 성불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존재의 중도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곳에 인식과 삶이 머무는 것이 지관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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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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