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봉암사 결사 70주년과 해인총림 방장 취임 · 백일법문 5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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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7 년 2 월 [통권 제4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269회 / 댓글0건본문
“스님, 새해는 성철 큰스님의 봉암사 결사 70주년이 되는 해라고 <현대불교>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습니다.”는 보고를 듣고 쉽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하는 걸로 하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결사 70주년이 벌써 되었네. 세월 잘 가는구만.” 하면서 봉암사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봉암사 결사의 주역들인 청담 스님, 향곡 스님, 성철 스님의 모습
인터뷰 하기로 한 날 서울 백련불교문화재단 사무실을 찾아온 기자들과 한 시간 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은 좀 뜸해졌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광식 박사님이 주로 성철 큰스님의 봉암사 결사에 크게 관심을 보여 주시고 논문을 자주 발표하면서 봉암사 결사에 대한 학문적 바탕을 닦아주셔서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2017년 1월 1일자 신문에 ‘결사(結社)’라고 이름 지어진 <현대불교> 신년 특집섹션으로 4페이지를 구성하고 3면에 저의 인터뷰가 실려 있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성철 큰스님께서 산중 대중들에게 봉암사 결사에 대해서 법문하신 것은 1982년 음력 5월 15일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상당법문을 하실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유일한 자료로 남게 되었습니다.
1981년 1월에 조계종 6대 종정에 추대되시고 한 1년 6개월후쯤 봉암사 결사를 말씀하시면서 “수좌들이 백련암에 올라오면 ‘해방 후 봉암사에서 큰스님들이 모여서 결사를 하셨다는데 어떤 목적과 어떤 행동을 지침으로 결사정진을 하셨느냐’며 자주 물어 왔습니다. 그때 몇 마디씩 대답했지만 단편적이고 해서 오늘과 같은 대중법문 시간에 앞으로 서너 번 봉암사 결사에 대한 법문을 할까 합니다. 오늘은 그 첫날인 만큼 전체의 대강을 말하겠습니다.”고 서두를 시작하시며 60분 동안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서너 번 봉암사 결사에 대한 말씀을 하시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그날 법문 한 번으로 봉암사 이야기는 끝나고 더 이상 법상에서 하시는 법문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1993년 11월에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큰스님 사리탑 건립 불사가 진행되면서 모연에 동참해준 시주자님들께 상황을 알려드리고자 <고경(古鏡)>이라는 계간지 잡지를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계간지를 만든다고 하였지만 잡지를 한 권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를 실감했습니다. <고경>에 백련암 앞마당에 서 있는 불면석(佛面石)의 이름을 따서 인터뷰 꼭지를 만들었습니다. 성철 큰스님과 인연 있는 큰스님들을 찾아뵙는 기획입니다.
평소 그렇게 애지중지하시며 드나드시던, 저희들에게는 제대로 한번도 보여주시거나 설명해 주신 적이 없는 큰스님의 ‘장경각’ 문을 열고 처음 들어갔습니다. 책들은 문이 달린 찬장처럼 된 궤짝 속에 있고 밑에 서랍이 달린 문을 열어 보니 전지에 적힌 ‘佛’자 몇 장과 반절짜리 ‘佛’자 몇 장과 다른 붓글씨 몇 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묵서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시간이 가는 속에 한 장 한 장 자세히 살펴보는데 봉암사 공주규약이 눈에 들어오고 두루마리의 긴 문종이가 발견되었는데 결사에 참석했던 각자의 이름과 본사를 1949년에 자필로 적었습니다. 제일 처음에 청담 스님의 법명인 순호 스님이 적혀 있었고, 저 끝에는 어린 나이에 힘들게 쓴 듯한 한글 이름도 적혀 있었습니다.
봉암사 결사 공주규약
몇 가지 자료를 더 모으면서 ‘불면석’ 난에 큰스님께서 약속하셨지만 다하지 못한 봉암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어른스님들을 우선 찾아뵙기로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봉암사 결사운동이 조계종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성철 큰스님의 구술 법문과 <고경>의 ‘불면석’ 난에 실린 큰스님들의 말씀이 그 역사 자료가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고마웠던 분은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 학장 묘엄 큰스님이었습니다. 봉녕사로 찾아뵈었을 때 그렇게 반가워하시면서 “큰스님 떠나신 후에 뒷일을 감당하느라 수고가 많다.”고 거듭거듭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때까지 고이고이 간직해 오셨던, 성철 큰스님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손수 만들어 주셨다는 유일한 사미니 계첩본과 단군조선부터 8·15해방까지 시대별로 간략하지만 8절 크기의 옛날 시험지에 주요 사건을 적어 가르쳤던 국사 강의표 등 숨 막힐 듯한 자료를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를 회상하시며 봉암사 대중시절의 삶을 자상하고 감격스럽게 설명해 주시던 그날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자료가 봉녕사 묘엄 스님 기념관에 지금 그대로 보존 전시되고 있으며 묘엄 스님의 『회색고무신』이라는 자서전에서 봉암사 생활을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큰스님께서 ‘묘엄’이라고 써주신 법명을 잘 간직한다고 깊숙이 숨겨 놓았는데 지금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법명 종이를 찾지 못하니 얼마나 서운한지 몰라요.”라고 하시면서 울음 반 웃음 반으로 짓던 서운한 표정은 지금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모은 것들이 오늘에 이르러 봉암사 결사에 대한 역사적 자료로 남아 있게 되었으니 절판된 계간지 <고경>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
지난 1월 10일에 백련암과 고심정사 신도님들 90여 명과 23년째 계속 이어오고 있는 봉암사 대중공양을 다녀왔습니다. 봉암사 주지 석곡 스님이 “올해 봉암사 결사 70주년을 맞아서 문도스님들이 무슨 행사를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계획은 세워졌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백련암에서 성철 큰스님을 중심으로 한 학술 회의를 개최해 온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봉암사 결사는 큰스님 혼자서 하신 것이 아닌 만큼 이제는 청담 큰스님, 자운 큰스님, 향곡 큰스님, 월산 큰스님, 혜암 큰스님, 법전 큰스님 등과 인연 있는 분들을 다 함께 모시고 기념 법회를 올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만 여러 의견들을 모아서 봉암사 결사 70주년을 뜻 깊게 기념하였으면 합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1966년 9월경에 문경 김룡사 조실로 계시다가 해인사 백련암으로 주석처를 옮기게 되었고, 다음해 7월에 해인총림 초대방장으로 추대되시고 동안거 중에 ‘백일법문’의 사자후를 떨치셨습니다.
저는 1972년 1월에 백렴암에서 출가하였는데 몇 년이 지나서 백일법문이 릴 테이프로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다시 카세트 테이프 녹음으로 복사되기는 1976년 전후가 아닌가 기억됩니다. 뒷방에서 큰스님 몰래 테이프를 듣다가 언젠가부터 녹취록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얼마의 세월의 흘러 큰스님께 이것이 들켜 큰 꾸중을 들었습니다.
“지금 어디까지 했는데?”라고 물으셔서 “지금은 상당법어를 풀고 있습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너 같은 먹통이 듣는다고 아나?” 하시며 당신의 상당법어로 개당설법과 같은 의미를 가진 ‘덕산탁발화’의 부분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정리된 원고를 드렸다가 혼이 나고 1년 여가 걸려 겨우 『본지풍광』의 원고를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큰스님께서 1980년 후반기에 “법정 스님에게 가서 『선문정로』, 『본지풍광』 두 권의 원고 윤문을 부탁하라.”는 말씀이 있어 송광사 불일암으로 법정 스님을 찾아뵙고 큰스님의 뜻을 전해 올렸습니다. 법정 큰스님께서 허락하시어 1981년 12월에 『선문정로』를 출간하고 1982년 11월에 『본지풍광』을 출간하였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이 두 권의 출간을 기뻐하시면서 “나는 이 두 권으로 부처님께 밥값 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백일법문’은 경전의 이론서인 만큼 쉽게 손을 대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침 정심사 주지인 원영 스님이 동국대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서 원고정리를 부탁하여 1992년 4월 30일에 상·하 두 권으로 된 『백일법문』을 큰스님 법문 이후 25년 만에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7년만인 2014년 11월 14일에 개정증보판 『백일법문』을 상·중·하 3권으로 출간했습니다. 개정증보판 책이 반갑기보다 큰스님께서 법문하신 지 47년 만에 겨우 형태를 갖춘 『백일법문』을 출간하게 됐으니 큰스님께 어떻게 참회를 올려야 할지 부끄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지금의 가치와 50여년 전에 출간된 『백일법문』의 가치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1970년에 지금의 『백일법문』이 출간되었다면 선교(禪敎)에 미친 파장은 거의 ‘쓰나미’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혼자서 상상해봅니다.
봉암사 결사 70년의 역사는 그래도 살려내었다 싶지만 ‘백일법문’의 늦은 출간은 큰스님의 불교적 진면목이 드러날 때를 놓친 것이 아닌가 싶어 상좌로서의 죄송함이 가늠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현대불교>가 신년 특집으로 ‘결사’를 주제로 한 지면을 구성하고 한국불교 결사의 역사와 봉암사 결사를 다뤄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법보신문>에 2015년 1월부터 2016년 6월까지 연재되었던 『성철 스님 평전』을 모과나무 출판사에서 봉암사 결사 70주년을 맞이한 새해에 큰 선물로 주신 것 같아 고마운 마음입니다.
갖은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슬기롭게 노력했던 한 해로 기억되기를 불보살님께 기원 드리고 우리 모두가 국운융성에 마음을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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