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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주인공의 삶]
4고 8고 중에 가장 큰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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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7 년 4 월 [통권 제4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70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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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만큼 인간의 존재를 명확하게 규정하신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인간은 고통을 겪는 존재라는 것이다. 불교를 처음 만났을 때 사성제(四聖諦)를 읽고 참말로 그렇다고 공감하며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에 쫓기고 사람에 치이다 보니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세월이 갔다. 가끔씩은 기쁜 일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꿀을 빨고 버티다 보니 여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 흐름 속에 있는 자는 이렇게 떠내려가기 바빠서 흐름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돌아보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고개를 내밀어 언덕을 보고 고통의 물결을 거슬러 헤엄쳐가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드문 이라 하겠다.

 

역류에 성공하신 부처님께서 제일 먼저 우리를 경각시킨 법문도 다름 아닌 고통에 관한 것이다. 수많은 고통을 크게 몇 가지로 분류하셨으니, 생로병사로 시작되는 4고 8고이다.

 


 

 

그러나 태어날 때의 고통을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숙명통을 얻어 세세생생 나고 죽던 고통을 볼 수 있는 수행자가 아니고서야 태어나던 순간의 기억은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늙는 고통은 어떤가. 젊어서는 느끼지 못하고 중년쯤 되어서 돌아볼 때에야 쇠하는 기운과 시들어가는 모습에서 늙음을 보게 된다. 혹은 늙었다고 푸대접을 받을 때 가끔 서글퍼지기는 하지만 고통의 강도가 그리 세지는 않다.

 

병고는 겪는 사람에게는 절실하겠지만 건강한 사람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쩌다 아팠다가도 회복한 다음에는 언제 그랬냐 싶게 잊고 산다. 죽음은 매일같이 다가오지만 요절이 아닌 다음에야 아주 천천히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한다. 주위에 먼저 간 사람을 보거나 죽음을 미리 생각할 때 두려움은 있지만 다급하지는 않다.

 

애별리고(愛別離苦)는 겪을 때는 절절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엷어진다. 벚꽃 떨어질 때 날 버리고 떠난 놈 때문에 인생이 괴롭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원증회고(怨憎會苦)는 사람을 달달 볶지만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는 고통이다. 직장을 떠나거나 이혼을 하거나 절연을 한 뒤 상황이 바뀌면 편해질 수도 있다.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오음이 탐욕과 집착을 부르기 때문에 오는 괴로움인데, 맞는 말이지만 이걸로 괴로워서 매일같이 머리를 싸매지는 않는다. 끝으로 구부득고(求不得苦)는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얼마나 간절히 구했느냐가 고통의 크기를 결정하겠지만, 평생 간절할 일이 몇 번이나 있겠나 싶어서 실은 가장 쉽게 생각했던 것인데, 이번에 구부득고를 절감한 일이 있었다.

 

『고경』 같은 고품격 지면에 돈 얘기를 몇 번째 쓰는지 죄송하기 그지없지만, 얼마 전에 목돈이 급히 필요한 일이 생겼다. 액수도 액수지만 급전이 필요한 경우는 대개 타이밍이 사람 피를 말리는 법이라,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좌불안석이었다. 당장 은행에 가서 대출신청을 했다. 얼마 전 가계부채가 1350조로 불어나서 대출받기가 더 까다로워졌다는 뉴스를 들은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은행을 찾았다가 은행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인생이 실전임을 절감했다.

 

친절한 대출담당 직원이 알려준 대로 서류만 준비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은행과 주민센터와 세무서를 돌아다니며 서류를 갖다 바쳤다. 그중에는 소득을 증명하는 서류도 있었고 카드를 사용한 내역서도 있었다. 돈 버는 능력과 돈 쓰는 능력으로 사람을 심사하고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출한 서류 몇 장에 나의 경제 상태가 감출 수 없이 죄다 드러났다. 몇 장이나 되는 서류의 빈칸에 이름을 반복해 써 넣으면서, 내가 누군지를 이만큼 명확하게 규정해주는 곳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채무자다.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내내 초조했던 보람도 없이 신청한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만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상환능력을 보고 빌려준다는 것인데, 돈을 적게 번 것도 불리하고 카드를 적게 쓴 것도 불리했다.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고 담당직원을 붙들고 늘어졌다. 나의 불우이웃 포스에 압도당한 직원이 아무래도 불쌍했는지 어디다 전화를 해서 문의를 하고나서는 잠시 동안 깊이 연구한 끝에,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별건으로 하나 더 시도해 볼 만한 것이 있다고 하여, 서류를 다시 써서 신청해 놓았다. 또 며칠이 지나는 동안 마음이 타들어갔다. 이럴 땐 어김없이 불안이 찾아온다. 안되면 어떡하나, 제2금융권으로 가봐야 하나, 그마저도 안 되면 사채를 써야 하나. 별의별 재수 없는 생각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통장과 집을 압류당하고 쩔쩔맸던 과거의 기억까지 자동으로 소환되어 근심어린 며칠을 보냈다.

 

불안에 떠는 동안 은행만 믿고 있을 수가 없어서 사업하는 초등학교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행을 제집 드나들듯 하니 아무래도 돈을 돌리기가 쉽지 않을까하는 기대에서였다. 반갑다고 안부 묻는 친구에게 앞뒤 자르고 콩팥 털리기 직전이라고 SOS를 청했다. 사업차 베트남 갔다가 그날 돌아온 친구는 알아보겠다며 다음날 연락을 주었다. 자기도 요즘 사업이 어려워서 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나는 일개인이지만 꼬박꼬박 직원들 월급을 줘야 하는 사람이 돈줄 막히면 그 고통이 얼마나 더 심할까, 괜히 친구한테 걱정만 끼쳤구나 하는 자책이 들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한 친구가 한 달 동안 빌려주겠다고 하여, 덕분에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한 달이 채 못 되어 막혔던 일이 풀려서 은행에 돈을 갚으러 갔더니 약정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갚는 경우에는 중도상환수수료를 받는다고 하였다. 웃는 낯으로 알려주는 액수를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약정한 기간을 다 쓰자면 이자가 훨씬 비싸니 울며 겨자 먹기로 내야하는 돈이다. 뒷간에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른 탓도 있을 테지만, 급할 때 고맙게 썼으니 기쁘게 뜯기자고 생각하기엔 억울한 액수다. 그래서 애꿎은 직원에게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이며 “중·도·상·환·수·수·료, 일곱 자나 낭비할 것 없이 그냥 ‘삥’ 한 자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말해 주었다. 직원은 울상에 웃음을 보태며 정문일침을 가했다. “그래도 받으셨잖아요. 대출도 못 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참, 그렇구나.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한 법이라더니. 하여, 어떤 고통이 제일 크냐고 묻는다면, 4고 8고 중에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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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경총서>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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