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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공과 유의 걸림 없는 소통[空有交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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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7 년 4 월 [통권 제4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77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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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오지마을 석정리에 들이닥친 인민군과 주민들 간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그린 영화다. 석정리에는 당시 정보소통의 매개였던 라디오도 없는 마을이었다.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살던 사람들은 인민군조차 여느 손님들처럼 맞이했다. 작은 오지마을에서 적과 동지가 서로 뒤죽박죽 뒤섞여 사는 모습을 그린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네 편 내 편 나눠 끊임없이 싸우는 세상을 보면 영화 속에서나 볼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서로 대립적인 것들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존재의 실상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 살펴볼 ‘공유교철(空有交徹)’ 또한 이런 맥락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공(空)과 유(有)는 상호 배척되는 것으로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이다. 텅 빈 공이 있으면 유로 표현되는 존재가 사라지고, 반대로 유로 표현되는 존재가 있으면 텅 비었다는 공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존재의 실상을 보면 석정리 사람들처럼 적과 내가 뒤섞여 있다. 따사로운 봄볕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은 현상적으로 보면 ‘꽃이라는 개체[有]’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꽃은 햇살, 봄비, 대지의 자양분 등 무수한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피어날 수 있다. 꽃이라는 개체는 오로지 관계 속에서만 있음으로 눈앞에 있는 꽃이라는 개체는 공하다.

 

현수법장이 말하는 ‘공유교철’ 역시 ‘공과 유가 서로 걸림 없이 소통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공과 유는 서로를 배제하는 개념이지만 실상은 서로 소통하고 뒤죽박죽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백일법문』은 다음과 같은 법장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공유교철을 설명한다.

“공으로써 유를 온전히 빼앗으니, 공은 있고 유는 없어져 있다는 견해[有見]가 없어진다. 유로써 공을 온전히 빼앗으니 유는 공하고, 공은 없어져 공에 대한 집착이 모두 없어진다. 공과 유가 상즉상입하여 전체가 서로 통하여 한 가지 모습으로 둘이 없으니, 두 견해를 함께 떠난다. 상즉하여 서로 통하여 걸림이 없으면서 무너지지 않아 두 상이 서로 존재하니 그릇된 견해[非見]가 모두 사라진다.”

인용문은 네 가지 논리적 단계로 설명되어 있다. 첫째 공으로써 유를 부정함, 둘째 유로써 공을 부정함, 셋째 공과 유가 함께 사라짐, 넷째 공과 유가 함께 존재함이 그것이다.

 

첫째 공으로써 유를 빼앗는 것[空全奪有]이다. 중생의 번뇌와 고통은 ‘무엇이 있다’는 집착에서 비롯된다. 욕망하는 주체로서 내가 있고, 타자에 의해 상처 받는 내가 있고, 욕망할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존재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나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대상에 대한 욕망이 생겨난다. 삶이 끝없는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것은 이와 같은 주관과 객관에 대한 왜곡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첫 번째 단계는 나와 대상은 공한 것임을 철저히 깨닫는 것이다. 잘못된 믿음이 깨지면 그것에 근거한 집착도 해소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체라고 믿고, 실재라고 보는 나와 대상이 관계적 맥락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면 우리가 믿었던 존재들은 텅 빈 공이 되고, 실체 없는 무만 존재한다[有空而無有]. 존재의 실상이 텅 비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당연히 나와 대상이 존재한다는 왜곡된 유견이 사라지게 된다[有見蕩盡]. 나와 객관이 존재한다는 유견이 사라지면 그에 대한 집착도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면 고통도 사라진다. 철저한 부정을 통해 그릇된 인식을 깨고, 집착에서 오는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 공유교철의 첫 번째 가르침이다.

 

둘째는 유로써 공을 완전히 빼앗는 것[以有全奪空]이다. 공은 존재에 대한 집착을 끊는 최고의 양약이다. 그러나 아무리 몸에 좋은 양약이라도 지나치면 독약이 된다. 손에 묻은 때를 씻기 위해 비누를 썼지만 비누를 몸에 바르고 있으면 독이 된다. 강을 건너가기 위해 뗏목이 필요하지만 강을 건넌 뒤에도 뗏목을 매고 다니면 뗏목 자체가 장애물이 된다.

 

따라서 공이 집착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공으로만 바라보면 공병(空病)이라는 또 다른 병에 빠진다. 공병에 걸리면 노력할 일도 없고, 성실히 살아갈 이유도 없고, 선행을 베풀 필요도 없는 허무론에 빠진다. 이런 사유는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극단적 견해이므로 ‘단멸공(斷滅空)’이라고 하고, 공을 왜곡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함으로 ‘악취공(惡取空)’이라고 한다. 따라서 공관으로 유견에서 오는 집착을 극복했다면 다음 단계는 비눗물을 씻어야 하고, 뗏목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유로서 다시 공을 빼앗는 두 번째 치료약이다. 실상은 공이지만 눈앞에 펼쳐져 있는 가상으로서의 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개체적 실체는 없지만 관계 속에서 삼라만상은 존재한다. 이런 이치를 깨닫게 되면 공에 대한 집착도 사라진다[空執都亡].

 

셋째는 공과 유라는 두 가지 극단적 견해가 모두 사라짐[雙見俱離]이다. 공의 눈으로 보면 유가 없고, 유의 눈으로 보면 공이 사라진다. 여기서 공과 유라는 대립적 변견은 모두 해체된다. 그 이유는 공과 유가 서로 침투[空有卽入]하여 유는 공 속으로 들어가고, 공은 유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공과 유가 서로 침투해서 상호 소통하고, 전체가 통하여 하나로 소통하면[全體交徹] 모든 것은 공하다는 견해도 사라지고, 모든 것은 실재한다는 견해도 사라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공을 보아도 그 속에서 유를 볼 줄 알고, 유를 보아도 그 속에서 공을 볼 줄 안다. 공과 유라는 대립적 인식은 사라지고 모든 존재는 하나[一相無二]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두 견해가 모두 사라지는 쌍민(雙泯)은 절대부정이 되는데, 절대부정은 절대긍정과 상통한다.

 

넷째는 공과 유가 함께 존재함[兩相雙存]이다. 실상의 눈으로 보면 공과 유가 걸림 없이 서로 소통한다[交徹無礙]. 그렇다고 공이 완전히 사라져 유가 되고, 유가 완전히 사라져 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은 공대로 여전히 존재하고, 유 역시 유대로 각자의 독자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공이나 유라는 두 개념은 무너지지 않고[不壞] 각자의 고유한 성품을 유지한다.

 

그러나 여기서 공과 유는 처음의 공과 유와는 차원이 다르다. 유를 보되 유에 집착하지 않고, 공을 보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공과 유에 대한 그릇된 생각은 모두 사라진다[非見咸泯]. 그릇된 견해가 사라지면 공도 오롯이 존재하고, 유도 오롯이 존재하는 쌍존(雙存)이 된다. 모든 것이 드러나는 절대긍정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구슬 같은 중도의 지혜

 

공유교철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유를 보아도 유에 속박되지 않고, 공을 보아도 허무에 빠지지 않는다. 이런 경지에 대해 법장은 “둥근 구슬[圓珠]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듯 모든 견해에 구속받지 않으며, 자성의 바다를 마음[心端]에서 증득하여 사물 밖에서 한가하다[逍然物外].”고 표현했다.

 

법의 실상을 알고, 중도의 이치를 바로 보면 온갖 괴각(乖角)과 모난 견해들이 사라진다. 법장은 그런 지혜를 ‘둥근 구슬’로 비유했다. 모나지 않고 걸림 없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둥근 구슬이 걸림 없듯 갖가지 견해와 주장에 걸림이 없는[諸見不拘] 자유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둥근 구슬은 모든 차별과 변견이 사라진 중도의 지혜를 상징한다. 차별된 견해와 치우친 편견은 모난 것이다. 그러나 중도의 눈으로 보면 그런 모서리가 모두 사라진다. 우리가 추구할 마음의 상태는 바로 이 둥근 구슬처럼 온갖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일직선이 있으면 끝과 중간이 있고, 평면이 있으면 변방과 중앙이 있고, 네모나 세모가 있으면 귀퉁이와 중앙이 있다. 하지만 둥근 구슬에는 변방도 없고, 중앙도 없다. 어디를 찍어도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중앙인 동시에 변방이다. 이것이 존재의 실상이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중앙인 동시에 변방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자체가 둥근 구슬이라는 점이다. 모든 존재들은 지구라는 거대한 구슬 위에 있다. 인간들은 물질적 잣대를 가지고 중심과 변방을 따진다.

 

하지만 우리가 서울에 있든, 깊은 산속에 있든 상관없이 모든 존재는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세상의 중심이다. 반대로 권력자나 부자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앙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도 세상의 변방에 서 있기는 매 한가지다. 우리가 서있는 곳이 바로 중앙이자 변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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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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