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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성지순례기-불법(佛法) 없는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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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2017 년 5 월 [통권 제4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96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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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성지순례기 / 문선이(고심정사 불교대학 총동창회장)



문선이 회장

150여명의 도반들이 성지순례 적금을 14개월간 부어 가는 동안 “간다”, “안 간다”를 얼마나 많이 번복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결원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지고 계약금, 비행기 티켓 비용을 송금해 가며 14개월을 버텼다. 적금 날짜에 제때 입금이 되지 않아 혼자서 짜증을 내가며, 어떻게 그럭저럭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적금을 찾고 보니 순례를 취소한 분이 30명이나 되었다.

 

14개월 동안 적금을 부으며 이름과 법명을 알아갔다. 모르는 분들은 도량에서 인사를 하고, 불교대학에서도 얼굴을 익히니 순례 설명회 때는 낯선 분이 거의 없었고 각자의 성향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룸메이트를 정할 때도 도움이 되었다.

 



 

 

기나긴 준비를 거쳐 진행된 순례는 참석자들의 신심(信心)과 여행사의 빠른 일처리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일을 추진했던 사람으로서 모든 것이 부처님의 가피가 아닌가 싶다. 사람이 일일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시스템(system)이 구축되어 있으니 몇몇이 흐트러져도 일은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을 선방 팀, 법당 팀, 불교대학 팀, 선방과 법당 연합 팀으로 섞어 4개조를 만들었다. 참가자들의 연령대와 ‘취향’들을 고려하고 불교대학 팀은 기수별로 묶으니 마치 수학여행 온 소녀들처럼 까르르 거리며 즐거워했다.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불자들답게 이번 순례도 여법하게 진행됐다.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고맙고 감사드린다.

 

신심(信心)으로 전해진 불교

 

10시간 가까이 걸린 비행의 피곤이 채 풀리기도 전에 아침 일찍 보리수 사원과 이수루무니야 사원을 향해 4시간을 달렸다. 내가 속한 4조는 정말 조장을 잘 뽑았는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중광 스님의 묘비명 “괜히 왔다가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와 같은 꽤 ‘고급정보’도 사심 없이(?) 일러준다. 그러나 참새의 윙크까지만 기억나니 두 눈 뜨고 있으면서도 정신 줄을 놓고 있었나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보리수가 있는 보리사 사원. 철 기둥으로 받쳐진 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본격적으로 순례를 시작하니 가만 서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BC 535년,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때는 ‘아루나’가 빛나는 시각이었다. 아루나는 ‘붉은 기운을 머금은 별’이라는 의미와 함께 새벽과 태양의 뜻도 함축되어있다. 즉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이다. 한역 경전에서 ‘샛별이 뜰 때’라는 표현은 이러한 연유이리니 별과 함께 부처님의 성도 순간을 지켜본 나무 한 그루! 깨달음을 상징하는 보리수이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셨던 보리수 나무의 가지를 아쇼카 왕의 딸 상가밋타 스님께서 스리랑카 보리수 사원에 옮겨 심었으니 전 세계 보리수 나무의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는 무너지지 않고 대를 이어나간다. 언젠가 들었던 최재천 교수의 강의가 떠오른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생물은 그 유전자를 남긴다….” 우리 불자들의 가슴에 옴도 없고 감도 없다는 표현을 학자는 그렇게 표현하나보다.

 


시기리야 정상에서 원택 스님을 모시고 자리를 같이 한 고심정사 불자들 

 

선 채로 재를 올리고는 한 낮의 열기로 달궈진 후완베리사이어 대탑을 둘러보는 길은 신을 벗고 가야하니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듯 했지만 대탑을 돌고 정문을 향해 달리는 보살님들의 박하향 같은 웃음소리가 스리랑카 한낮의 뜨거움을 시원하게 날린다.

 

둘째 날은 시기리아와 폐허가 되어버린 플론나루와, 갈비하라, 담불라 석굴로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전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저녁도 먹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행히 가지고 간 비상약을 먹어서인지 대중들과 함께 할 정도는 되었다.

 

시기리아에는 처음부터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올라 가려고 마음먹었지만 두 사람을 고용한 건 아무래도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좁은 철 계단을 절대 세 사람이 오를 수 없고, 또 그렇게까지 못 걷지도 않았지만 지레 겁을 먹고 시기리아 성을 올랐다. 인도의 타지마할이 인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예술로 표현한 곳이라면 이 곳 시기리아는 인간의 공포가 얼마나 두려움을 남기는지 보여주는 예술품의 흔적이다.

 

갈비하라에서 재를 올리고 담불라의 다섯 석굴 앞에 선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과 엘로라 석굴, 돈황의 막고굴을 다녀왔기 때문인지 담불라 석굴의 ‘예술성’을 생각해 보았다.

 

인도, 미얀마 그리고 스리랑카

 

사두(sadhu)! 사두(sadhu)! 은둔 수행자를 일러 ‘사두’라 하는데 스리랑카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직역하면 ‘제발’, ‘부디’란다. 법회 때 스님이 “이 땅에 자비를 내려주소서”라고 창하면 대중들은 “사두! 사두!”라 응답한다. 이 때 “부디 그렇게 되도록 해 주시옵소서” 의미의 사두다.

 

알루비하라에 위치한 패엽경 사찰 대광명사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난다 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곳으로 이곳에서 가사불사와 만발공양을 올렸다.

 

알루비하라 지역의 어른스님들께서 다 오셨고, 지역 국회의원, 유지까지 다 모인 큰 행사가 되었다. 어른스님의 말씀이 이어지는 동안 “사두!”를 되뇌며 삼십분 넘게 가사를 모시고 서 있었다. 이마 위로 모시고 있던 가사의 높이가 점점 낮아진다.

 


알루비하라 대광명사에 모셔진 붓다고사 스님 상 

 

출발 전 여행사 관계자에게 난다 스님이 한국에 들어와 일을 보시고 스리랑카로 들어가신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나름 큰스님께 누가 되지 않게 대중들의 관심을 잘 살펴야 했다. 알루비하라의 대광명사는 붓다고사 스님이 『청정도론』을 쓰신 유서 깊은 절로써 상좌부의 중심 사찰이다. 사찰에는 붓다고사 스님의 상이 모셔져 보관되고 있었다. 동상 앞에서 스님께 깊은 목례를 보낸다. 붓다고사 스님 같은 분이 계셔서 오늘의 남방 상좌부 불교의 불씨가 끊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국의 침략으로 동굴 속에 숨겨둔 패엽경의 상좌부 경전은 1830년경 옥스포드 대학으로 옮겨져 아직까지도 스리랑카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난다 스님이 한국에 들어오셨다가 우리 일행들과 함께 스리랑카로 오셨기 때문에 일정도 빡빡하고 여유도 없을 터였지만 스님께서는 최선을 다해 대중들을 대접해 주셨고, 우리 역시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중들이 천도재를 지내며 거둔 공양 보시금을 회주스님께서 꼼꼼하게 챙겨 대광명사, 스리랑카 종정스님 및 어른스님들, 조계종 복지센터에까지 모두 전달해 주셨고 공덕 부회장님께서 봉투를 관리하고 계셨지만 필자역시 힘닿는 데까지 보시를 보탰다. 종정스님을 뵙는 자리에서, 가지고 간 인삼선물 외에도 종정스님을 모시고 있는 여러 어른스님들께 보시를 드리는 것을 보고 공덕 부회장님께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가졌는지 모른다.

 


플론나루와의 불교 유적들 

 

종정스님 덕으로 불치사에서 스리랑카 현지인도 보기 힘든 부처님의 진신 치아사리함을 친견하는 영광을 얻었다. 사리함을 친견하면서 『금강경』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무릇 있는 모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현상이 현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

그렇게 일정을 끝내고 강가라마 사원에 들렀지만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영상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진열대 속의 눈부시고 값나가는 사파이어 목걸이들이다. 일행과 함께 보석을 바라보며 “이렇게 귀한 것을 이렇게 진열해두다니…”라고 했더니 옆에 계시던 주지스님께서 씩 웃으시며 “이 나라 불심으로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됩니다.”하신다. 순간 머쓱해졌다. 보석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부처님은 그 많은 보화를 다 버리고 출가를 하셨는데…. 괜히 내 속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마지막 캘러니아 사원에서 회향을 하면서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까지의 순례를 통해 부처님 발자취를 더듬어 온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갠지즈 강의 회향, 미얀마의 불족(佛足) 앞에서의 회향, 그리고 스리랑카 캘러니아 사원에서의 회향!

 

부처님의 법설을 품지 못한 인도의 황량한 유적들. 생활 속 삶 그자체가 불심(佛心)인 화려한 사원들의 미얀마. 이번 스리랑카 순례는 인도와 미얀마의 경계선 상이었다면 느낌이 와 닿을까?

 

플론나루와의 훼손된 유적들. 불치사의 화려한 모습. 부처님의 법은 어느 곳에나 다 녹아 있건만 순례객은 부질없는 생각들로 머리를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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