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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검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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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7 년 12 월 [통권 제5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64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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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담장이 만든 경계

 

최근 강남의 한 아파트에 관한 뉴스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뉴스에 등장하는 아파트는 명목상으로는 1단지와 2단지로 구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같은 동네에 있는 동일한 단지였기에 주민들은 단지 구분 없이 자유롭게 왕래하며 살았다. 그런데 단지 내 시설 이용문제를 놓고 갈등이 생겨 1단지와 2단지를 분리하는 담장을 쳤다고 한다.

 

이런 사례는 비단 이 아파트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같은 동네에 있는 아파트라도 일반분양과 임대아파트는 담장을 치고 다른 동네처럼 구분한다고 한다. 그래서 코앞에 있는 학교나 관공서를 가려면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본래 같은 동네였고, 한 단지였지만 담장을 치고, 경계를 만드는 순간 다른 동네 사람이 되고, 소통이 차단되고 고립되는 불편함이 초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늘 이렇게 분리장벽을 만들어 안과 밖을 구분해 왔다. 중세 유럽에서는 유대인을 격리시키는 게토(ghetto)를 만들었고, 비록 해체되었지만 베를린 장벽이 그랬고, 한반도의 허리를 갈라놓는 38선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도 모자라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과 멕시코를 가르는 분리장벽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장벽은 물리적 장벽에 그치지 않고 인종, 종교, 이념 등을 근거로 무수한 장벽이 둘러쳐져 있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境界)’이다. 같은 마을 주민으로 함께 살던 사람들이 경계를 나누는 순간 1단지와 2단지로 구분되고, 일반분양과 임대주택으로 구분된다. 그때부터 소통이 차단되고 각자 자신들의 경계 속에 갇혀 살아가게 된다.

 

세상의 존재들도 이렇게 경계를 만들면서 ‘나’와 ‘너’로 구분된다. 개체의 삶은 그와 같은 경계를 사이에 두고 나와 타자간의 경쟁으로 펼쳐진다. 경계를 나누기 전에는 서로 소통하는 하나였지만 경계를 나누는 순간 서로 다른 존재가 되고, 고립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화엄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들도 한 동네 주민처럼 전체와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경계를 만들면서 나와 나 밖의 타자로 구분되었다. 본래 하나였지만 경계를 만드는 순간 너와 대립되는 내가 되고, 나 밖에 있는 네가 된 것이다.

 

나와 남을 구분 짓는 경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데카르트의 사례를 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인간이라는 주체는 사유하는 능력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체가 성립되면 그 대상이 되는 객체가 생겨나고, 그 둘을 가르는 경계가 생겨난다. 이렇게 보면 나와 남을 구분 짓는 경계는 아파트 단지의 담벼락같이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주체와 객체는 객관적 현상이 아니라 사유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임의로 만든 마음의 경계를 불교에서는 ‘아상(我相)’이라고 한다. 사유하는 힘으로 확립된 주체는 사실 생각으로 빚어진 경계에 불과한 것이다. 경계가 만들어지면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삶이 시작된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 있는 경계를 허물고 ‘서로가 서로의 경계 안으로 들어감[相入]’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삶이 가능해진다.

 

자의적으로 형성된 생각의 경계를 깨는 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상(無相)’이다. 각자가 가진 ‘나’라는 ‘상(相)’을 깰 때 나는 너의 경계 속으로 들어가고, 너는 나의 경계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경계가 분명하면 주객의 대립이 생성되지만 경계가 해체되면 모두가 하나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는 ‘우리(we)’가 된다. 우리는 개별적 경계를 해체하고 ‘거대한 하나의 우리(cage) 속에 사는 존재’들인 셈이다.

 

상호 전환의 자유로움

 

화엄의 십현문은 존재의 실상으로 들어가는 깊은 문[玄門]이다. 불교에서 바라보는 존재의 실상은 무수한 경계들로 구획 지어진 고립과 개별자들의 세계가 아니다. 모든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성의 세계다. 그렇게 경계를 넘어 나와 너가 자유롭게 상호 소통하는 이치를 설명한 것이 네 번째 문인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이다.

 

여기서 ‘상즉(相卽)’이란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라는 뜻이다. 따라서 나와 너의 관계가 서로의 경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전환됨이 자유자재함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흙, 빗물, 햇살, 바람이라는 사대(四大)는 각자 서로 특성이 분명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모든 존재들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고, 전체와의 넘나듦 속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워낸다.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흙이 국화가 되고, 물이 국화가 되고, 햇살이 국화가 되고, 바람이 국화가 된다. 이것이 ‘상즉(相卽)’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를 본체의 관점에서 보면 상즉, 내가 곧 네가 되고, 네가 곧 내가 되는 관계 속에 있다. 흙, 물, 햇살, 바람이라는 사대가 인연을 만나서 하나로 모이면 국화가 되고, 그 인연이 흩어지면 흙, 물, 햇살, 바람이 된다. 제법상즉자재문의 요점은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자유롭게 상호 전환되는 것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화엄의 눈으로 보면 나는 너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너도 나를 완전히 받아들인다. 나와 너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는 ‘상입(相入)’의 관계에 있다. 경계를 해체하면 1단지와 2단지 주민을 모두 받아들이고, 1단지 주민은 2단지로 들어가고, 2단지 주민도 1단지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서로에게 들어가면[相入] 그들은 둘이 아니라 같은 단지 주민이라는 하나가 된다.

 

바닷물과 하얀 물거품

 

제법상즉자재문은 모든 존재가 상입하여 내가 곧 네가 되고, 네가 곧 내가 되는 상호 전환의 자유로움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소통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비유가 바닷물과 파도의 관계이다. 외형적 조건으로만 보면 철썩하고 바위에 부딪치면서 포말을 일으키는 하얀 파도와 망망대해에 출렁이는 검푸른 바닷물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작용에 따라 표면적으로 나타난 일시적 모습일 뿐 본질에서 보면 파도의 성분도 물이고, 바다의 성분도 물이다. 이렇게 본질을 추구해 들어가면 대해는 파도의 하얀 포말이라는 개별적 차이를 박탈하고, 하얀 파도는 검푸른 바다라는 특성을 빼앗아 버린다. 겉으로 드러나는 작용은 다르지만 본체의 관점에서 보면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물이 파도의 특성을 빼앗고, 파도가 바닷물의 특성을 빼앗는 것을 ‘호상형탈(互相形脫)’이라고 한다. 파도는 물이라는 배타적 형상을 빼앗고, 물도 파도라는 고립적 형상을 빼앗기 때문이다.

 

개별적 존재는 개체의 경계를 해체할 때 전체와 하나가 된다. 국화는 국화라는 개별자에 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의 관계 속에 있다. 그런 이치를 깨닫게 될 때 국화라는 개체적 특징은 박탈되고 만다. 이렇게 서로 고립된 존재성, 허구적 인식의 울타리를 허물어버리고 본질적으로 존재가 상호 소통하는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 ‘호상형탈’이다.

 

호상형탈은 네가 나의 존재를 파괴하고, 내가 너의 존재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있다’라는 ‘나’라는 고립적 개체성, 허구적 인식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다. 네가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다. 너 역시 나의 참여와 기여로 존재한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빼앗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존재한다는 ‘연기(緣起)’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인식이 여기에 이르게 되면 다음과 같은 법장의 설명은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법장은 “이것이 저것을 용납하여[由此容彼] 저것이 곧 이것이고[彼便卽此], 이것이 곧 저것이어서[由此便彼] 이것이 곧 저것과 동등하니[此便卽彼等], 그러므로 제법상즉자재문이 있다[故有諸法相卽自在門].”고 했다. 물이 파도를 받아들이면 파도가 곧 물이 되고, 파도가 물을 받아들이면 물이 곧 파도가 된다. 파도와 물이 같은 것이고, 1단지와 2단지 주민이 같은 것이다. 모든 존재는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라는 상즉 곧 상호 전환이 철썩이는 파도처럼 자유자재하다.

 

중생의 마음은 무수한 경계를 만들어낸다. 인종, 성별, 국적, 종교, 이념, 학벌, 가문 등으로 경계를 만든다. 그 결과 서로가 자신들이 만든 허구적 이미지에 나포되어 서로를 배타하고, 경쟁하는 고립적 삶을 살게 된다. 화엄의 사유는 그와 같은 허구적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것이다. 나와 너를 가르는 경계를 해체하는 첩경은 1단지 주민이 2단지로 들어가고, 2단지 주민이 1단지로 들어가는 자유로운 소통[相入]이다. 그런 소통을 통해 철썩하는 파도 소리에 바닷물이 하얀 포말이 되는 상호 전환의 자유로움이 제법상즉자재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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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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