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사물에 의탁하여 드러나는 진리[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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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8 년 3 월 [통권 제5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915회 / 댓글0건본문
한 떨기 들꽃의 실체를 알 수 있다면
산을 오르다 보면 갈라진 바위틈에 뿌리내린 키 작은 소나무를 발견하곤 한다. 그때마다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비단 산이 아니라도 후미진 골목의 돌담이나 시멘트 담장에서도 그런 풍경은 있다. 갈라진 작은 틈바구니에 흙먼지가 쌓이고 바람을 타고 날아온 씨앗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모습은 우리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19세기 영국 시인 테니슨(Tennyson)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돌담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한 떨기 이름 모를 꽃을 발견하고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시인은 꽃을 뿌리째 뽑아들고 “작은 꽃이여! 그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나는 신이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노래했다. 양지바른 담장 밑에서 외롭게 피어난 한 떨기 들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인간은 물론이고 신(神)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에 선(禪)을 처음 알린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는 테니슨의 이 시와 함께 17세기 일본 시인 바쇼(芭蕉)의 하이쿠 한 수를 대조적으로 설명한다. “자세히 보니 냉이 꽃이 피어 있네. 울타리 밑에.”라는 짧은 내용이다. 후미진 곳에 피어난 한 떨기 들꽃을 보고 썼지만 꽃을 바라보는 두 시인의 관점은 매우 대조적이다. 스즈키는 테니슨의 시가 소유의 양식이라면 바쇼의 하이쿠는 존재의 양식이라고 해석했다.
프롬(E. Fromm) 역시 이 두 시를 소개하면서 두 사람은 존재에 대한 본질적 관점의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테니슨의 관점은 꽃을 소유하려는 욕구를 드러낸 것이며, 그 결과 한 생명이 파괴되었다고 지적한다. 반면 바쇼는 단지 꽃이 피어 있음을 느낄 뿐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꽃의 생명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동서양의 사유양식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또 다른 맥락에서 보면 테니슨의 관점을 소유의 방식이라며 그 의미를 깎아내릴 일만은 아니다. 테니슨은 한 떨기 야생화의 존재를 알 수 있다면 인간과 신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 사물은 단순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보잘 것 없는 사물을 통해 궁극적 실재인 신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나와 사물, 사물과 궁극적 실재가 둘이 아니라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담고 있는 대목이다.
화엄의 눈으로 보면 테니슨의 견해는 존재에 대한 매우 탁월한 통찰이다. 하나의 미세한 존재에도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고, 그 작은 존재를 알면 곧 법계를 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치를 깨달을 때 진리의 세계, 즉 법계연기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와 같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 가지 문 가운데 여덟 번째 문이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이다. 이 문은 한 떨기 꽃이나 하찮은 사물을 통해 전체 우주가 드러나 있음을 깨달을 때 들어가는 문이다.
법장은 탁사현법에 대해 “제석천궁의 보배구슬 그물과 같으므로 하나를 따르면 일체가 다함이 없기 때문에 탁사현법생해문이 있다.”고 했다. 모든 존재는 인드라의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를 따라가면 무궁무진한 전체로 연결된다. 그래서 “하나를 따르면[隨一] 곧바로 일체가 다함이 없다[一切無盡]”고 했다. 하나의 존재를 따라가 그것의 실상을 알면 개별적 존재의 실상에 그치지 않고 온 우주의 실상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작고 미세한 먼지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기에 의상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고 했다. 한 떨기 꽃이 아니라 바람에 흩날리는 미세한 먼지 속에도 온 우주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사물에 의탁해 드러나는 진리[託事顯法]
미세한 먼지 속에 우주가 들어 있는 것은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라는 진리[法]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연기적 관계를 통해 성립하고, 관계에 의지하여 존재하고, 관계의 작용으로 소멸해 간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존재의 실상인 연기법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날까? 연기는 모든 존재를 관통하는 존재의 실상이자 이법(理法)이지만 어떤 형상도 띠지 않고 있다.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고, 여섯 가지 감각의 저 편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테니슨은 담벼락 아래 피어 있는 한 떨기 들꽃을 알면 존재의 근원인 신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화엄에서도 우주를 움직이는 진리는 우리들이 보고 있는 “무수한 사물에 의탁해 드러나 있다.”고 한다. 연기라는 법(法) 자체는 형태도 없고, 색깔도 없고, 촉감도 없다. 법은 아무런 형태도 없지만 우리들의 눈앞에 드러나 있는 무수한 사물에 의탁해 자신을 드러낸다.
법은 ‘자아’라는 정해진 형태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형태가 될 수 있고, 모든 존재로 들어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이처럼 고정된 실체가 없는 이법이 개별적 사물의 모습을 빌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탁사현법(託事顯法)’이라고 한다. 하나의 “사물에 의탁하여 법(法)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법은 모습이 없지만 무수한 사물에 의탁하여 드러나고, 무한한 소리로 울림을 주며, 무한한 향기로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감미로운 맛으로 생명을 양육하고, 다양한 감촉으로 기쁨을 주며 도처에서 나타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화엄에서는 모든 사물을 그 자체로 법성(法性)이나 법신(法身)이라고 본다. 사물은 단지 사물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인 법성(法性)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사사(事事), 즉 티끌 하나하나, 구슬 하나하나, 흙덩이 하나하나, 똥 덩이 하나하나, 어느 것 할 것 없이 그 하나하나에 전체가 완전히 구비되어 사사무애가 완전히 성립된다.”고 했다. 이처럼 법은 한 송이 꽃을 통해 드러나고, 무수한 관계적 맥락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법을 보거나 법신을 보고자 한다면 어떤 초월적 형상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사물을 보면 된다. 그 사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보면 되고, 그 사물들이 작용하는 역용(力用)을 보면 되고, 그 사물들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보면 된다.
그래서 화엄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을 설명하는 대신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사물의 실상을 보라고 하고, 그 속에서 진리를 깨달으라고 한다. 이런 안목을 가질 때 모든 생명을 부처님처럼 존귀하게 보게 되고, 모든 존재를 법신으로 존중할 수 있다. 이처럼 아무리 작고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법성이 담겨 있기 때문에 천태는 ‘일색일향무비중도(一色一香無非中道)’라고 했다. 하나의 빛으로 드러나는 미세한 존재들, 바람에 떠도는 미세한 향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중도(中道)라는 존재의 본성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는 연기법이라는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존재하지만 연기법은 형태가 없기 때문에 은밀히 숨겨진 비밀과 같다. 하지만 그 비밀은 무수한 사물들의 모습으로 모두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존재의 실상을 알지 못하면 그것은 알 수 없는 비밀이지만 이법은 모든 사물의 모습을 빌어서 백일하에 드러나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테니슨은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한 떨기 야생화를 통해 존재의 궁극인 신을 알고자 했다. 한 송이 꽃이 사물[事]이라면 신은 그 이면에 있는 이법[理]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을 통해 본질을 알 수 있다면 현상과 이법은 둘이 아니다[不二]. 그래서 의상은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이라고 했다. 본질[理]과 현상[事]이 분명하게 각자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법은 사물이라는 현상에 의지하여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런 안목이 열릴 때 우리는 모든 존재를 통해 법신을 만나게 되며, 매 순간순간 법성이 체현된 궁극의 삶을 살게 된다. 여기서 번뇌는 곧 보리가 되고, 중생 또한 부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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