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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로 세상 읽기]
진정한 스승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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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  2018 년 6 월 [통권 제6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3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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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희운 화상이 대중에게 “너희는 모두 지게미에 취해 다니는 놈들이다. 하릴없이 이 절 저 절로 나다니니 어찌 오늘의 나 같은 경지에 이르겠느냐?” 하고 말했다. 이때 한 승려가 불쑥 나와 따졌다. “도처에서 가르치고 있는 선사들은 도대체 뭐가 되는 겁니까?” 황벽은 “선이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올바른 선사가 없을 뿐이다.”고 대답했다. (『벽암록』 제11칙)

 


 

 

1993년 11월 4일 대한불교조계종 제6〜7대 종정 퇴옹당(退翁堂) 성철(性徹) 큰스님이 입적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큰 별 지다’라는 한결같은 표현으로 성철 스님의 입적을 애도했다. 성철 스님은 실제로 불교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그분이 우리 사회를 향해 필요할 때마다 어떤 가르침을 주거나 메시지를 준 적이 없는데도 어느 날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던 1970〜80년대 유신과 군부독재에 맞서던 세력들이 큰스님에게 ‘제발 한 말씀만 해달라’며 메시지를 간청했지만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일화 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어떻게 스님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할 수 있었을까?

 

성철 스님이 우리 사회에 본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1년 제6대 종정으로 추대되면서다. 물론 불교계 내부에선 큰스님의 이력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이라며 당시 청담·자운 스님 등 20여 명과 봉암사 결사를 주도했었던 일이나, 고성 문수암・통영 천제굴 · 파계사 성전암 등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정진(精進)을 거듭한 수행이력은 한국불교의 자랑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1980년 10월 27일에 발생한 이른바 10·27법난은 큰스님의 지도에 의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을 맞게 됐다. 10·27법난으로 망신창이가 된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단은 숨쉬기조차 버거운 상처를 입고 허덕이고 있었다.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회생(回生)을 위해 불가피 하다면 내 이름을 빌려주겠다며 종정직(宗正職)을 수락했다. 조계종단은 법난의 후유증을 벗기 위한 시도로써 1981년 종정 성철 스님에 대한 대대적인 취임식 행사를 준비했다. 언론매체는 성철 스님의 서울 나들이에 깊은 관심을 표명이라도 하듯 행사장인 조계사로 대거 몰려들었다.

 

산문 밖에 절대 발을 내놓지 않은 ‘산승(山僧)의 첫 외출’이라는 수식어를 달며 스님을 기다렸지만 스님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로 압축되는 법어만 보내왔다. 법어 역시 세상에 어떤 가르침을 내린다는 내용이라기보다 종정 수락에 대한 수락법어 형태였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법어는 일반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선설(禪說)이었지만 대중에 회자(膾炙)됐다. 그만큼 성철 스님에 대한 기대와 의지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성철 스님은 말 그대로 산승으로서의 본분을 한 번도 거스르지 않았다. 80년대 군부독재의 종식을 요구하는 거센 민주화의 바람 속에서 ‘한 말씀’만이라도 간절히 바랐던 국민의 열망에도 스님은 왜 그리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을까? 그 깊은 속뜻을 우리는 세월이 지나서야 어렴풋이 알게 됐다고 생각한다.

 

훗날 세월이 흘러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이후 스님이 입적하신 뒤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침묵이 거대한 메시지이자 큰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시비(是非)는 시비를 부른다. 입을 여는 순간 그르친다는 뜻의 개구즉착(開口卽錯)은 이때도 비켜갈 수 없었을 것이다. 불보살의 입장에서 보면 못된 권력자도 가슴에 품어야 할 가련한 중생일 뿐이다.

 

세속에서는 못된 놈에게 왜 벌주지 못하느냐고 원망할 수 있으나 그 어떤 누구도 인과의 사슬을 벗어날 수는 없다. 큰스님은 일찍이 자신의 출가에 큰 영향을 끼친 『증도가(證道歌)』를 통해 이 같은 이치를 꿰뚫고 있었으리라. 스님은 “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부터는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自從頓悟了無生, 於諸榮辱何憂喜)는 『증도가』를 강설하면서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열반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대중들에게 설파하기도 했다.

 

선사로서, 산승으로서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인내와 정진이 필요한 것인지를 세속 사람들은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만일 성철 스님이 단 한 순간, 단 한마디라도 세속 일에 대해 언질하였다면 산승의 지위는 물론 선사로서의 수행이력이 단박에 어긋나는 사태가 벌어졌을지 모른다.

 

혹자들은 성철 스님의 침묵이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처사라고 비난하기도 했으나 한마디 말로 중생의 구제가 완성되거나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스님은 더 큰 울림과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님은 『증도가』 46번째 문장 속의 「야승가(野僧家)」를 이렇게 해석했다.

 

“그러면 도를 깨친 사람이 깊고 깊은 산중에서만 사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산중에 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들녘에 나와 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야승가란 서울 한복판에 살기도 하고, 인연에 따라서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면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함을 말합니다.

 

도를 깨쳐 대자재를 얻은 사람은 아무리 깊은 산중에 있다 하여도 적적함이 없어 분주한 도시에 있는 것과 같고, 아무리 분주한 도시 가운데 있다 해도 저 심산궁곡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해야 진실로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지 깊은 산중에 들어가면 조용해서 마음이 편하고, 도시에 나가면 분주해서 싫다면 실로 바로 깨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되면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지 진실로 자유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신심명·증도가 강설』, 성철스님법어집 1집 5권, p170)

 

스님의 이 같은 해석은 비록 스님이 산승으로 불렸다고 하나 속세의 일에도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던 경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본다. 실제로 이 같은 스님의 깊은 내공과 통찰이 스님을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만든 배경이자 원인이라고 단언한다.

 

우리 사회에 성철 스님 같은 큰 스승이 없을 때 『벽암록』 제11칙에서 황벽희운 화상이 말하는 ‘지게미에 취해 다니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게미를 먹는 사람을 당주조한(噇酒糟漢)이라고 하는데, 당(唐) · 송(宋) 시대의 속어(俗語)로 ‘순수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욕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세속사회에서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스승이 없는 경우 땜질처방식의 단기처방에 유혹되거나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사술(邪術)에 빠져들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이와는 반대로 자격도 되지 않는 이들이 스스로 스승을 자칭하여 온갖 허세를 부리거나 방정을 떨다 망신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최근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진정한 스승이 없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앞서 지적했듯이 진정한 스승이 없으므로 이런저런 병리현상도 아울러 증가하는 문제가 빈번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옛 문헌에 따르면 스승은 원래 ‘중’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월인석보』, 최세진의 『훈몽자회』 등에서는 출가한 중을 일러 ‘스승(師)’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실제로 과거 승가에서도 상대 승려를 존경해서 부를 때 ‘사승(師僧)’ 혹은 ‘사(師)님’이라는 호칭을 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를 놓고 보면 불교계는 스승을 배출하는 보고(寶庫)다. 그럼에도 세속사회를 상대로 스승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비천해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세속의 걱정을 사는 일이 있어선 더욱 안 되겠다. 또한 도처에서 스승인 양 행세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들 올바른 선사를 키워내는 선불장(選佛場)이 제 기능을 못한다면 무슨 효험이 있겠는가? 황벽희운 선사의 말에서 성철 스님처럼 진정한 스승의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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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선시 읽는 법을 소개한 『마음의 밭에 달빛을 채우다』를 펴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오도송에 나타난 네 가지 특징」·「호국불교의 반성적 고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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