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법계의 실상을 설명하는 열 가지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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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8 년 9 월 [통권 제6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14회 / 댓글0건본문
지난 호에는 화엄의 세계로 들어가는 네 개의 관문으로 비유되는 ‘사문四門’에 대해 살펴보았다. 사문은 법계의 세계, 실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문은 물리적 문이 아니기 때문에 문이 없는 문, 즉 무문관無門關이다. 진리의 세계인 법계로 들어가는 문은 존재에 대한 미망을 깨고 실상에 대한 바른 자각을 통해서 들어가는 문이므로 그 문은 사유思惟의 문이자 인식의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적 실상
이번호에 살펴볼 ‘십의十義’는 사문으로 설명한 법계의 네 가지 특징을 열 가지 주제로 확장해 보다 세밀하게 설명하는 대목이다. 화엄의 종취宗趣는 사문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열 가지 주제로 확장할 수도 있기 때문에 논소에서도 ‘또한 열 가지 뜻이 있다[亦有十義]’라고 표현하고 있다.
티벳제2의 도시 시가체와 가까운 갤제현에 '빠코르곤빠'가 있다. 1418년 창건된 이 사찰의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들
십의라는 개념 역시 법장 스님의 『탐현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인데, 징관 스님은 이 내용을 수용하여 자신의 소疏에서도 그대로 다루고 있다. 십의의 핵심적인 내용은 ‘상相’과 ‘성性’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법계의 중도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 핵심이다. ‘성性’은 불변하는 본성이나 고유한 특성을 의미하는데, 이理나 법계法界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상相’이란 겉으로 드러나 있는 형상이나 사물의 표상을 말하는데 사事나 인과因果 등이 여기에 배대될 수 있다. 따라서 십의는 현상과 본질에 해당하는 성과 상을 주제로 법계의 연기적 실상과 중도적 특성에 대해 설명하는 교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열 가지 항목 중 첫째는 법계는 상相을 떠나 있다[離相]는 것이다. 우리들의 눈앞에는 천차만별한 현상, 즉 온갖 상相이 펼쳐져 있다. 나와 네가 있고, 유정과 무정이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고, 진보와 보수라는 것이 모두 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상이자 작용일 뿐 실체가 아니다. 법계의 실상이 모든 현상을 떠나 있다면 작용[用]에 해당하는 인과因果와 체體에 해당하는 법계는 서로 다르지 않다[不異]는 설명이 이어진다. 인과[用]와 법계[體]가 둘이 아니라면 인과 역시 인과라는 특성이 무너짐으로 인과는 인과가 아닌 비인과非因果가 된다.
둘째, 법계는 성性을 떠나 있다[離性]는 것이다. 성性이란 달리 자성自性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나무나 돌과 같이 개별적 존재의 본성을 말한다. 모든 존재는 자성이라는 개별적 실체가 있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자성이라는 개별성에 고립되어 있지 않고 연기緣起라는 보편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존재는 이렇게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개별적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만약 법계가 자성을 떠나 있다면 법계 역시 현상적 인과와 다르지 않은 불이不異의 관계가 된다. 존재의 실상인 법계와 눈앞에 펼쳐진 현상인 인과가 다르지 않다면 인과를 벗어난 법계도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법계 또한 법계가 아닌 비법계非法界가 된다.
첫째와 둘째 항목이 말하는 것은 인과가 곧 법계이므로 인과를 인과라 할 수 없고, 법계 곧 인과이기 때문에 법계를 법계라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인과라는 현상과 법계라는 본질을 모두 부정하는 쌍차雙遮의 원리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셋째, 법계가 비록 자성을 떠나 있지만[離性] 그렇다고 자성의 작용이나 흔적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不泯性]. 법계는 자성이라는 개별적 존재의 실체성을 초월해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허무적멸의 공空은 아니기 때문이다. 법계의 존재들은 비록 개별적 자성이 공하지만 무수한 작용[用]으로 드러나 있고, 다양한 현상[相]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렇다면 법계란 어떤 초월적 대상이 아니라 무수한 작용들이 만들어 내는 인과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법계도 법계라는 실체가 없다는 비법계非法界가 선언된다.
십의의 둘째 항목에서 법계는 자성을 떠나 있기 때문에 법계의 실체성을 부정[遮]했다. 하지만 셋째 항목에서는 불이不二의 논리를 통해 법계가 비록 자성이 없을지라도 무수한 작용과 현상으로 펼쳐져 있음을 통해 법계를 다시 긍정한다.
넷째, 법계는 상을 떠나 있지만[離相] 그렇다고 상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不壞相]. 법계의 존재들은 비록 상을 떠나 있지만 모든 상이 완전히 무너져 없는 것은 아니므로 여전히 상은 상으로 존재한다. 결국은 상은 상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고, 상이 없는 것이 곧 상이라는 논리가 된다. 색즉시공色卽是空과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논리와 같이 색 밖에 따로 공이 없으며, 공 밖에 따로 색이 없다. 그래서 아무리 상을 떠나도 상이 무너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인과 그대로가 법계이므로 인과도 인과가 아닌 것이다.
첫째와 둘째 항목이 성과 상을 하나씩 부정하는 차문遮門의 관점에서 설명했다면 셋째와 넷째 항목은 성과 상을 다시 하나씩 긍정하는 조문照門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따라서 여기까지의 설명만 봐도 법계는 쌍차雙遮하고 쌍조雙照하는 중도의 세계라는 요지가 드러난다.
쌍차쌍조하는 중도가 모든 존재의 근본
다섯째, 상을 떠남[離相]이 곧 성을 떠남[離性]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현상으로서 상이 곧 본성에 해당하는 성과 다르지 않고, 성이 곧 상과 다르지 않다. 성과 상은 존재의 본성과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라는 차별적 개념이다. 하지만 성과 상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 다섯째 항목의 요지다. 성이 상과 다르지 않다면 굳이 성이 있을 수 없고, 상이 성과 다르지 않다면 굳이 상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성과 상, 인과와 법계가 모두 사라지는 쌍민雙泯의 상태가 된다.
여섯째, 무너지지 않음이라는 불괴不壞가 곧 없어지지 않음이라는 불민不泯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불민이 곧 불괴이고, 불괴가 곧 불민이기 때문에 인과와 법계가 함께 존재하며, 눈앞에 동시에 나타난다. 위에서는 인과와 법계를 함께 사라지는 쌍차雙遮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인과와 법계를 모두 긍정하는 쌍조雙照를 말한다. 인과와 법계, 체와 용이 모두 긍정되는 것이다. 위에서는 체가 곧 용이고, 용이 곧 체이기 때문에 체라 해도 안 되고, 용이라 해도 안 되는 쌍차를 말했다. 반면 여기서는 체가 곧 용이고, 용이 곧 체이기 때문에 체와 용이 함께 드러나는 구존俱存을 말하고 있다. 모두 중도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다.
일곱째, 쌍존雙存과 쌍민雙泯이 서로 다르지 않아서 원융무애하다는 것이다. 다섯째 항목에서는 성과 상을 부정하는 쌍민雙泯을 말했고, 여섯째 항목에서는 성과 상을 모두 긍정하는 구존俱存을 말했다. 그리고 일곱째 항목에서는 쌍차와 쌍조가 다른 것이 아니라 쌍차가 곧 쌍조이고, 쌍조가 곧 쌍차라는 중도의 원리를 설명한다. 따라서 둘 다 존재하는 구존과 둘 다 사라지는 쌍민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계의 세계, 화엄의 세계, 중도의 세계는 언어와 문자를 초월해 있음으로 보고 들을 수 없는 심오한 세계이다. 하지만 그 법은 또 항상 보고 듣고 소통하는[恒通見聞] 세계이기도 하다.
여덟째, 법계의 본성이 원융性融해서 체니 용이니 하고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법계의 과果 속에는 모든 존재를 하나도 빠짐없이 통섭하고[統攝法界] 있으며, 과의 씨앗이 되는 인因까지 포함하고 있다. 인이 곧 과이고, 과가 곧 인이며, 인 가운데 과가 있고 과 가운데 인이 있다. 이런 논리는 부처가운데 보살이 있다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부처는 수행의 결과이고 보살은 부처가 될 씨앗을 심는 인위因位이다. 부처 가운데 보살이 있다는 것은 과果 가운데 인因이 있어 부처 가운데 중생과 마구니가 있다는 것이다.
아홉째, 법계의 인因도 법계 전체를 빠짐없이 포섭하고 있다. 그래서 인 속에는 결과로서의 과도 함축하고 있다. 이처럼 인이 곧 과이고, 과가 곧 인이기 때문에 보현보살 가운데 부처가 있다[普賢中有佛]는 논리로 확장된다. 보현보살은 부처의 씨앗이 되는 인이며, 부처는 보살의 수행으로 성취되는 과이다. 그런데 인이 곧 과라면 보현보살 속에 부처가 있는 것은 마땅하다. 여기서 중생 속에 부처가 있다는 명제가 가능해지고, 진흙 속에 연꽃이 피고, 예토 속에 정토가 있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결국 부처 속에 보살이 있고, 보살 속에 부처가 있다는 것은 부처와 보살이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는 인식을 해체한다. 부처와 보살, 부처와 중생은 별개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되는 차원에 있다는 것이다.
열째, 모든 존재와 작용은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도적 특성을 총체적으로 포섭總攝하고 있다. 그래서 천태종에서는 “한 빛깔, 한 향기도 중도 아닌 것이 없다[一色一香 無非中道]”고 했고, 화엄종에서도 “진진찰찰이 부처 아님이 없다.”고 했다. 중생 속에 부처가 있고, 과속에 인이 있으니 삼라만상 모든 것이 부처 아님이 없고,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들이 진리 아님이 없다. 똥 덩이가 됐든, 흙덩이가 됐든, 금덩이가 됐든, 부처나 마구니가 됐든 모든 존재는 쌍차쌍조라는 중도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고, 중도의 원리가 드러난 것이다. 결국 화엄의 사문과 십의는 법계의 중도적 특성인 쌍차쌍조에 대한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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