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이야기]
관조적 의식으로서의 증자증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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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 2018 년 9 월 [통권 제6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66회 / 댓글0건본문
1. 인간의 삶은 관계라 한다. 관계그물망 속에서 인간의 삶이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 부부 사이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사제 사이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업무와의 관계, 티브이와의 관계, 술이나 담배와의 관계, 이러한 관계들을 제외하면, 삶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반론이 전혀 없을 수 없다. 인간만이 그러한가? 다른 동식물도 그렇지 않은가? 집에서 키워지는 반려견의 경우, 이것의 삶도 관계그물망 속에서 전개되지 않는가? 견주라고 불리는 부모와의 관계, 집안의 아이들과의 관계, 산책할 때 이따금씩 보는 이웃집 친절한 강아지와의 관계, 먼 집 사나운 개와의 관계, 풀 냄새와의 관계, 땅 냄새와의 관계, 심심할 때 물어뜯는 장난감과의 관계, 물이나 먹이와의 관계, 이러한 관계들을 제외하면, 반려견의 삶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시인 서정주(徐廷柱, 1915~2000)는 「국화꽃 옆에서」라는 시에서 국화가 맺고 있는 관계그물망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소쩍새와의 관계, 천둥과의 관계, 누님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가 국화로 하여금 국화꽃을 피워내게 했다는 것이다. 이쯤에 이르면, 독자들은 내심 말하리라. 옳거니, 연기가 법계를 이루니, 법계는 곧 인연일 뿐이니라!
2. 앞서 말해진 모든 관계는 수평적 관계에 해당한다. 그런데 수직적 관계도 있다. 수평적 관계그물망이 바로 세계라고 설파한 서양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에 그치지 않고 수직적 관계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그의 용어들은 아니지만) 대타적 관계도 있고, 대자적 관계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와의 관계”는 모두 대타적 관계이다. 예컨대 부모와의 관계는 대타적 관계인데,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관계란 인식적 관계가 아니라 존재적 관계이다. 다시 말해, 나는 부모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관계가 아니라 나는 부모에 대해 어떤 태도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관계이다. 나는 형제에 대해 이런 태도로 존재할 수도 있고, 저런 태도로 존재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존재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이리도 할 수 있고 저리도 할 수 있는 존재관계”이므로, 이를 하이데거는 “존재가능Seinkönnen, the potentiality-for-Being”이라고 부른다. 모든 대타적 관계는 결국 존재가능이라는 것이다. 존재가능으로서의 대타적 관계는 식물은 몰라도 동물에게서는 성립할 것이다.
3. 그런데 인간은 대자적 관계도 갖고 있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에 대해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기관계 역시 인식적 관계가 아니라 존재적 관계이자 존재가능이고, 여기서의 ‘자기’도 추상적 자아가 아니라, 우선은 위에서 말한 대타적 존재가능이다. 대타적 관계가 이러저러할 수 있는 존재가능이듯이, 대자적 관계도 이러저러할 수 있는 존재가능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너는 2중적 존재가능’이라는 것이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너는 2중적 존재가능을 각각 선택적으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인간인 한에서는 달리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대자적 관계가 자기와의 존재관계이고 자기가 대타적 존재가능인 한에서, 대자적 관계는 ‘대타적 존재가능에 대한 존재적 관계’인데, 이때의 존재적 관계가 역시 존재가능이므로, 결국 대자적 관계는 대타적 존재가능에 대한 존재가능의 관계라는 것이다. 필자가 이해한 바로는 이것이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하이데거가 전개한 마음의 분석이다. 대자적 관계는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이 존재 자체를 문제시함’이기도 한데, 이것을 하이데거는 ‘실존’이라고 부른다. 결국 인간은 대자적 관계를 갖고 있는 자, 곧 실존하는 자이다.
4. 인간은 ‘대타적 존재관계’에서도 선택을 행할 수 있고, ‘대자적 존재관계’에서도 선택을 행할 수 있다.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존재관계는 (‘격의 없이 대한다’, ‘거리를 두고 대한다’, ‘때에 따라 거리를 정하면서 대한다’ 등 “일 수 있기” 때문에) 존재가능에 해당하며, 우리는 이 존재가능이 지닌 여러 가능성들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대개 선택하지 않고 살아간다. 아니, 세상 사람들이 선택한 가능성을 부지불식간에 선택한 채로 살아간 다. 비의지적 선택 속의 삶, 그것을 하이데거는 “일상성”에서의 실존이라고 부른다. 대타적 존재관계에서의 선택은 대자적 존재관계에서의 선택을 전제로 한다. 나는 세상 사람들의 방식대로 살면서 대타적 존재관계를 ‘등한시할 수도’ 있고, 나의 절대성과 유한성을 염두에 두고 대타적 존재관계를 ‘책임지려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책임지려는 자세는 나의 절대성(타인에 의한 대체불가능성)과 유한성(죽음의 회피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고, 이러한 자각은 하이데거에 따를 때 양심의 부름에서 비롯된다. 그가 말하는 양심이란 ‘자신의 존재를 염려하는 자기 자신’을 가리킬 뿐,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종교적인 개념이 아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고, ‘대타적 존재관계’에 대해 ‘책임지는 방식으로 관계맺음’은 ‘대타적 존재관계’에 대해 ‘무책임한 방식으로 관계맺음’과 구별된다. 전자를 하이데거는 본래적 실존이라고 하고, 후자를 비본래적 실존이라고 한다. 이 둘 중의 하나를 우리는 가끔 선택한다. 그러나 대개는 선택 없이, 아니 세상 사람들의 선택을 선택한 채로 존재한다.
5. 그렇다면, ‘대타적 존재관계에 대한 존재관계’의 선택은 “현상학적으로” 다시 무엇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가? 하이데거는 그것을 자기개시성Sebst-erschlossenheit, self-disclosedness이라고 부른다. 자기개시성이란 개인에게 자기가 개시되어 있음을, 곧 개인에게 대타적 존재관계와 대자적 존재관계가 언제나 이미 알려져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자기개시성 덕분에 이러한 자기개시성을 들여다보는 자기반성이 비로소 가능하다. 자기개시성은 후설의 용어로는 자기의식Sebst-bewusstsein, self-consciousness에 해당한다. 후설은 인식론자로서 자기의식 덕분에 자기인식이 가능하다고 보고, 하이데거는 존재론자로서 자기개시성 덕분에 본래적 실존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의 존재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 존재가능의 실행(대타적 관계와 대자적 관계), 2) 존재가능이 언제나 이미 알려져 있음(자기개시성), 3) 2중적 존재가능의 반성적 선택(본래적 실존). 후설이 말하는 인간의 인식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 대상에 관한 의식의 진행(대상의식), 2) 대상의식이 언제나 이미 의식되어 있음(자기의식), 3) 대상의식의 반성적 파악(자기인식). 후설의 자기의식과 하이데거의 자기개시성을 구태여 비교하면, 전자에서는 대상의식의 ‘증명’이 강조되고 있고, 후자에서는 존재가능의 ‘저장’이 강조되고 있다.
6. 자기의식(자기개시성)은 대상의식(존재가능)을 증명하고 저장하는 의식으로 대상의식과 동시발생적이다. 그렇다면, 자기의식이 (대상의식이 아닌) 반성의식과 맺는 시간적 간격은 어느 정도일까? 후자는 전자와 동시적일 수도 있는가, 아니면 후자는 전자보다 언제나 사후적이기만 한 것일까? 사후적이기만 하다고 볼 경우, 의식구조는 대상, 대상의식, 자기의식, ‘사후적’ 반성의식이라는 요소들로 이뤄져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사후적’ 반성의식은 (자기의식이 이미 저장해 둔 ‘이전의 대상의식’을 ‘대상’으로 삼는 의식이므로) 이전의 대상, 지금의 대상, 미래의 대상에 모두 관계하는 (기억하고, 지각하고, 예상하는) 대상의식에 포함될 수 있고, 이로써 의식구조는 대상, 대상의식(‘사후적’ 반성의식 포함), 자기의식이라는 3요소를 지니게 된다. 반면에 동시적일 수도 있다고 본다면, 위의 3자 외에 ‘동시적’ 반성의식이 별도의 요소로 의식구조에 포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동시적’ 반성의식은 ‘이전의 대상의식’을 대상으로 삼는 의식이 아니라, ‘자기의식’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리 보면, 심4분설과 심3분설은 ‘동시적’ 반성의식의 인정여부에 따른 귀결이다.
7. 심4분설의 입장에서 보면, 명상은 자기의식과 ‘동시적인’ 반성의식에 의해 자기의식을, 또 자기의식과 ‘동시적인’ 대상의식을 관조하는 것이다. 명상에서는 대상의식, 자기의식, 반성의식이 동시적이다. 자기의식과 동시적인, 이로써 물론 대상의식과도 동시적인 반성의식의 작용은 관조이다. 관조는 지관止觀에 불가결한 요소이다. 자기의식을 관조하면서 이와 동시적인 대상의식을 점차 소멸시키는 것이 사마타(止)라고 한다면, 자기의식을 관조하되 이와 동시적인 대상의식을 소멸시키지 않고, 다만 이것의 옳고 그름을 알아차리는 것은 위파사나[觀]일 것이다. 유교에서는 지관止觀을 미발未發공부와 이발已發공부로 해석하였다. 미발공부란 7정七情의 미발생 상태를 유지하는 공부를 말하고, 기발공부란 이미 발생한 7정의 상태의 옳고 그름을 알아차리는 공부를 말한다.
8. 마음의 구조에 대해 일찍이 안혜는 심1분설을, 난타는 심2분설을, 진나는 심3분설을 주장하였는데, 호법은 심분을 확대하여 심4분설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심과 심소들 하나하나가 일어날 때에, 이치로 미루어보면 각기 3분이 있는데, 인식하는 것, 인식되는 것, 인식 결과가 각기 별개이기 때문이다. 상분과 견분에는 반드시 그것들이 의지하는 몸체[體]가 있기 때문이다. 『집량론』의 게송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다. ‘흡사 대상의 모습인 듯한 것은 소량[인식대상]이고, 대상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과 자증하는 것은 각기 능량[인식작용]과 양과[인식결과]이다. 이 세 가지는 몸체에 있어서 별개가 아니다.’ 또한 만약 심과 심소들을 세분하면, 응당 4분이 있어야 한다. 3분은 앞서와 같고, 다시 제4의 증자증분이 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무엇이 제3분을 증명하겠는가? 심분이라면, 이미 동일하게 모두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증자증분이 없다면) 자증분은 양과를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능량은 반드시 양과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견분이 제3분의 양과일 수는 없다. 견분은 때로는 잘못된 인식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견분은 제3분을 증명하지 못하는데, 자체自體를 증명하는 것은 반드시 현량[직접적 인식]이기 때문이다.”(주1)
여기서는 우선 견분의 인식결과(양과)가 있어야 하고 또 상분과 견분의 의지처가 있어야 한다는 두 가지 이유에 의해 자증분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자증분도 그것이 심분이기에 증명되어야 하고 또 그것이 인식작용(능량)이기에 인식결과(양과)를 소유해야 한다는 두 가지 이유에 의해 증자증분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또한 견분이 자증분의 양과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견분이 반드시 현량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호법은 왜 다른 이들과 달리 자증분을 ‘증명하고 저장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증자증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일까? 수행자들은 ‘수행의 체험’에 비추어 다른 이들의 설명보다 호법의 설명이 더 적절하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김양동 화백이 그린 '성철 큰스님 - 미당 서중주 추모시' 그림의 부처님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주)
(주1) 『成唯識論』, T1585_.31.0010b11-b22: 然心心所一一生時. 以理推徴各有三分. 所量能量量果別故. 相見必有所依體故. 如集量論伽他中説‘似境相所量 能取相自證 即能量及果 此三體無別.’ 又心心所若細分別應有四分. 三分如前. 復有第四證自證分. 此若無者誰證第三. 心分既同應皆證故. 又自證分應無有果. 諸能量者必有果故. 不應見分是第三果. 見分或時非量攝故. 由此見分不證第三. 證自體者必現量故.
『성유식론 외』, 김묘주역주, pp.17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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