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부정을 통한 인식의 확장, 긍정을 통한 의미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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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9 년 1 월 [통권 제6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655회 / 댓글0건본문
서재영(성균관대 초빙교수)
사람들에게 대화는 감정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는 수단이다. 묻고 답하는 대화를 통해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고 인식의 영역은 확장된다. 붓다 역시 묻고 답하는 대화를 통해 진리를 전했으며, 역대 조사들도 문답을 통해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했다. 여기서 대화는 일상적 감정의 소통이 아니라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문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대화가 일상적 감정의 소통이 아니라 지혜를 여는 문이 되려면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첫째는 상대방이 하는 말의 논지를 부정하며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장점은 화자의 오류를 깨닫게 하고 대화가 진행될수록 논리가 보완되고 논지가 단단해진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자칫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고 때로는 논쟁으로 비화되는 단점이 있다.
인도 아잔타 석굴 제20굴 조각. 풍만한 모습이 눈에 띈다.
둘째는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긍정하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긍정해주면 좋아한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자존감도 높아진다. 그러나 무조건 옳다고 긍정하면 사유가 깊어지거나 논리가 정교해지지 못한다. 자기 논리의 허점을 발견하거나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의 이야기를 무조건 긍정하는 것만이 좋은 대화나 문답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식을 심화시키고 지혜를 성장케 하는 대화가 될까? 화엄에서는 위에서 예로 든 두 가지 방식 모두를 활용한다.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차정遮情’과 ‘표덕表德’이 바로 그것이다. 두순은 대연기법계大緣起法界라는 화엄삼매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을 활용한다. 그 중에 언어적 문답을 통해 진리로 인도하는 방법이 차정과 표덕이다.
차정이란 ‘뜻을 막는다.’는 의미로 무조건적 긍정이 아니라 부정적 반문을 통해 상대를 진리로 인도하는 방식이다. 반면 표덕이란 ‘덕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긍정을 통해 화자의 진술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차정이 부정을 통해 상대를 근원적 영역으로 인식을 확장시키는 방식이라면 표덕은 긍정을 통해 사유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 방식인 셈이다.
차정遮情 - 뜻을 막는다
『화엄오교지관』에 따르면 차정의 방식은 연기법에 대한 네 가지 주제에 대한 응답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연기는 있는 가[유有]?’라는 물음에 아니라며 부정한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닫고, 모든 존재는 연기라고 했는데 연기법이 없다고 부정한다. 여기서 화자는 ‘연기법은 있다’는 고착화된 생각이 해체되고 새로운 영역으로 인식을 확장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연기법이 없다고 부정한 이유는 ‘연기는 자성이 없는 공[공성즉공無性卽空]’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은 개체의 무아無我와 관계로 성립하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교설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자기만의 성품, 즉 자성이 없기 때문에 본질은 공하다. 연기가 있다고 생각하면 연기법을 실체화하고, 그렇게 실체화된 인식은 상견常見이라는 독단이 된다. 그래서 연기가 있다는 진 술을 부정함으로서 고착화된 인식의 틀을 부셔버린다. 여기서 질문자는 자신이 가진 인식의 범주를 넘어 보다 심원한 깊이로 파고들게 된다.
둘째, ‘연기란 없는 것인가[무無]?’라는 질문에도 역시 아니라고 부정한다. 연기가 있냐는 첫 질문이 부정되었기 때문에 질문자는 자연히 ‘연기는 없는 것이냐?’고 묻게 된다. 만약 이를 긍정하면 질문자는 ‘연기는 없다’는 단견斷見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차정은 그것도 부정한다. 실제로 연기는 눈앞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아득한 과거부터 연기는 존재해 왔음[무시득유無始得有]’으로 연기는 없는 것[무無]이 아니다.
셋째, ‘연기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역유역무亦有亦無]?’라는 질문에 대한 부정이다. ‘연기가 있는 것이냐’는 첫 번째 질문에는 본래 공함으로 연기란 없다고 부정했고, ‘연기는 없는 것인가’라는 두 번째 물음에는 아득한 과거부터 연기해 왔다며 부정했다. 유有와 무無가 모두 부정되었음으로 질문자의 인식은 유와 무를 모두 긍정하는 ‘역유역무亦有亦無’의 영역으로 확 장된다. 질문자는 있음과 없음이라는 상호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차정의 답변은 이 역시 아니라고 부정한다. ‘공과 유가 한 가지[공유일제空有一際]’이고 ‘두 모습이 없음[무이상無二相]’으로 공이 따로 있고, 유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넷째, ‘연기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가[비유비무非有非無]?’라는 질문에 대한 부정한다. 모든 색은 비록 실체는 없지만 눈앞에는 환유幻有로서 존재하고 있다. 공 또한 사물의 본성이 공함으로 공은 공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님’이라는 진술도 부정된다. 연기법은 “공과 유를 서로 빼앗으며 동시에 성립한다[공유호탈동시성空有互奪同時成]”는 것이다. 색의 본질을 보면 공이므로 공은 색의 모습을 빼앗고, 공의 본질을 보면 환유로 있음으로 색은 공의 모습을 빼앗는다. 여기서 비유비무도 부정된다.
이처럼 차정은 ‘연기법이 있는 것인가’, ‘연기법이 없는 것인가’, ‘연기법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인가’, ‘연기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인가’라는 네 가지 질문에 대해 모두 부정한다. 차정의 답변은 유, 무, 역유역무, 비유비무라는 사구四句 논리의 부정을 통해 고착화된 개념을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다. 차정은 사구에 담긴 개념들을 하나씩 부정함으로써 질문자로 하여금 자기인식의 한계를 돌파하게 한다. 보통 사람들은 있다거나 없다는 단정적 입장에 빠져 확정편향을 갖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 결과 자신의 인식에 갇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된 인식을 진리라고 고집한다. 차정은 사구부정을 통해 개념에 갇힌 인식을 해방시키는 대화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표덕表德 - 덕을 드러내다
차정이 끊임없이 부정을 통해 인식의 고착화를 깨고 새로운 영역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라면 표덕은 이와 반대로 긍정을 통해 화자의 진술이 담고 있는 의미를 심화시켜가는 방식이다. 표덕은 상대의 진술을 부정하는 대신 그의 진술이 가진 덕성德性, 화자의 진술이 담고 있는 언어적 기표 너머의 기의를 드러나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도 질문은 유, 무, 역유역무, 비유비무라는 사구의 형태로 진행된다.
첫째, ‘연기는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긍정한다. 물론 연기가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씨앗이 돋아나는 이 모든 현상은 연기적 관계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나무와 꽃과 같은 개체들은 비록 실체는 아니지만 거짓 존재 즉 ‘환유로 존재함으로 없는 것이 아님[환유불무幻有不無]’으로 연기는 있다.
둘째, ‘연기는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역시 그렇다고 긍정한다. 모든 존재들은 개별적 실체가 없으며 자신만의 ‘자성이 없는 텅 빈 공[무성즉공無性卽空]’이다. 따라서 연기란 없는가라는 물에 대해 실체로서 연기란 없으므로 그렇다고 답한다. 여기서 화자는 개체의 공성을 깨닫게 된다.
셋째, ‘연기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라는 물음에 대해 역시 그렇다고 긍정한다. 개체의 본성은 텅 비어 있지만 환유로써 있음으로 유이고, 개별적 존재의 자성을 찾아보면 텅 비어 있음으로 무이다. 그래서 연기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역유역무는 긍정된다. 이처럼 연기는 ‘유와 공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불애양존不碍兩存]’.
넷째, ‘연기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라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긍정한다. 있음의 본질을 보면 공함으로 비유이고, 공의 현상을 보면 환유로서 존재함으로 비공이다. 따라서 색과 공이 쌍으로 ‘서로의 모습을 빼앗아 둘 다 없어짐[호탈쌍민互奪雙泯]’으로 연기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차표원융遮表圓融 -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타나듯
표덕에서는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이므로 유有라 해도 맞고, 무無라 해도 맞으며, 역유역무亦有亦無라 해도 맞고, 비유비무非有非無라 해도 맞다. 상대의 인식을 긍정하면서 그의 진술이 담고 있는 의미를 확장시키고, 넓혀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차정과 표덕은 부정과 긍정이라는 상반된 입장 이지만 그것이 의도하는 목표는 모두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연기라는 관계적 맥락을 통해 환유로서 존재함으로 유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틀 속에 갇혀 있는 확정적 유라면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없고 연기하지 못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틀을 고집하지 않는 공성空性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존재와 상호작용하면서 연기할 수 있다. 이처럼 연기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유이고, 또 한편으로는 실체적 개체가 없기 때문에 공이다. 연기하기 때문에 개별적 유도 존재할 수 없고,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무도 아닌 비유비무의 관계가 성립된다. 결국 부정인 차遮와 긍정인 표表가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정이 곧 긍정이 되고, 긍정이 곧 부정이 된다.
두순은 긍정과 부정의 관계를 먹구름과 햇살의 관계로 비유한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드러나고, 해가 완전히 드러나면 구름은 저절로 사라진다. 따라서 구름이 걷혔다는 말이 곧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고, 해가 드러났다는 말은 구름이 걷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차정이 그대로 표덕이고, 표덕이 그대로가 차정이 되는 것을 차표원융이라고 한다. 차정과 표덕을 적절히 활용할 때 대화는 깊이를 더하고, 문답은 진리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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