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대사를 밝히지 못함이 가장 커다란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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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4 년 5 월 [통권 제133호] / / 작성일24-05-04 21:46 / 조회2,362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40 | 조동종의 선사상 ⑥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법을 계승하여 조산본적曹山本寂은 조동종의 종지宗旨, 종풍宗風을 더욱 활발하게 펼쳤다. 그의 사상은 후대에 편집된 어록을 통하여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데, 현재 대정신수대장경 47책에는 일본 현계玄契가 편차編次한 『무주조산본적선사어록撫州曹山本寂禪師語錄』 상·하 2권과 일본 혜인慧印이 교정한 『무주조산원증선사어록撫州曹山元證禪師語錄』 1권 등 두 판본이 실려 있다. 이 어록에는 조동종의 핵심적인 ‘삼종타三種墮’를 비롯하여 ‘오위五位’ 등을 설명하는 내용이 상당히 많이 보이고, 또한 다양한 기연어구들이 실려 있다.
자기를 던져 버려야 주재主宰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우선 관심을 끄는 구절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승가僧家에서 이러한 솔기[衣線: 法服을 의미] 아래에 있으면서, 이치[理]는 모름지기 향상사向上事를 회통會通 해야 하니, 등한하지 말라. 만약 승당처承當處가 분명하다면 바로 다른 제성諸聖들을 자기의 등 뒤로 던져 버려야 비로소 자유로울 것이다. 만약 던져 버리지 못한다면 설사 배워서 십성十成을 얻었다고 해도 도리어 그들 등뒤에서 차수叉手해야 할 것이니 무슨 큰소리를 치겠는가! 만약 자기自己를 던져 버릴 수 있다면 모든 거칠고 무거운 경계가 온다고 해도 주재主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진흙 속에 넘어진다고 해도 역시 ‘주재’할 수 있을 것이다.(주1)
이로부터 본적의 기본적인 입장을 여실하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구절은 명대明代 주시은朱時恩이 찬술한 『불조강목佛祖綱目』 권33에 실린 ‘본적 선사가 조산에서 법을 엶[本寂禪師開法曹山]’의 항목 첫 구절에 전재하고 있는데,(주2) 주시은 역시 이 구절을 본적이 제창한 선사상의 출발로 보고 있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로부터 본적은 철저하게 ‘이사원융理事圓融’을 중심으로 선리禪理를 제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본적의 스승인 양개가 『현중명玄中銘』을 찬술하여 “쓰고도 공功이 없고 고요하면서도 비워 비추면, 일[事]과 이치[理]가 둘 다 밝아져 체體와 용用이 막힘이 없다.”(주3)라고 하여 ‘이사원융’을 제창했음을 언급했는데 본적 역시 출가자는 ‘이치’와 ‘향상사’를 ‘회통會通’하여야 함을 제창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분명하게 깨달아 도달하는 곳[承當處]이 있다면 그를 과감하게 던져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을 “설사 배워서 십성을 얻었다고 해도 도리어 그들 등뒤에서 차수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양개의 입적게入寂偈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 “남의 혀끝에서 길을 찾는 데 허물이 있음[過在尋他舌頭路]”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다고 하겠다. 그에 따라 본적은 철저하게 ‘주재’함을 강조하는데 이는 또한 ‘돈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엄밀하게 논하여 이사理事를 원융하는 것은 이극理極[所]에 도달하여 반야의 지智[能]로 극조極照할 수 있는 경지에서야 가능할 수 있고, 이는 바로 ‘돈오’의 경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사大事를 밝히지 못함이 가장 커다란 괴로움
『무주조산원증선사어록』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선사가 어떤 승려에게 묻기를, “세간에서 어떤 것이 가장 커다란 괴로움인가?”라고 하자 승려는 “지옥이 가장 커다란 괴로움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그렇지 않다.”라고 하자 승려는 “선사의 뜻에는 어떠합니까?”라고 물었다. 선사는 “이 법복[衣線] 아래 대사大事를 밝히지 못함이 가장 커다란 괴로움이라고 칭한다.”라고 하였다.(주4)
여기에서 ‘대사’는 바로 석존釋尊이 불지견佛知見을 중생들에게 열어[開] 보이고[示] 깨달아[悟] 증입하게[入] 하려고 세간에 출세하였다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사선의 입장에서는 ‘돈오’를 이룸을 뜻한다고 하겠다. 이로부터 본적의 철저한 구도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는 역시 양개의 「규계規誡」에서 사문들은 “삭발하여 물든 옷을 입고, 가사를 지니고 발우를 받들며, 세속을 벗어나는 빠른 길을 밟으며, 성인聖人의 계위階位에 올라가 들어야 한다.”(주5)라는 규정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토끼 뿔은 없지 않고, 소의 뿔은 있지 않다
또한 『무주조산원증선사어록』에는 상당히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는 문구가 보인다. 먼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어떤 승려가 묻기를, “즉심즉불卽心卽佛은 묻지 않겠지만 어떤 것이 비심비불非心非佛입니까?”라고 하자 선사가 말하기를, “토끼의 뿔은 없다고 할 필요가 없고, 소의 뿔은 있다고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주6)
여기에서 언급하는 ‘즉심즉불’과 ‘비심비불’은 명확하게 마조馬祖의 언구를 겨냥한 것이다. 『마조어록馬祖語錄』에는 어째서 ‘즉심즉불’을 설했는가를 묻자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고, 울음을 그치고 나면 ‘비심비불’이라고 설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주7) 여기에서 본적은 ‘비심비불’을 비유비무非有非無의 논법으로 화답하고 있다.
‘토끼의 뿔’은 명확하게 ‘비유’이고, ‘소의 뿔’은 명확하게 ‘비무’이다. 이 문답에는 상당히 복잡한 중국불교의 사상적 흐름이 내포되어 있다. 이 ‘비유비무’의 연원은 십이연기 十二緣起를 설하면서 “세간의 집기集起를 여실하게 정관正觀한다면 바로 세간이 없다는 견해를 일으킬 수 없고, 세간의 멸滅을 여실하게 정관한다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를 일으킬 수 없다. 가전연이여! 여래는 이 (유와 무의) 이변二邊을 떠나서 중도中道에서 설한다.”(주8)라고 하는 유명한 ‘중도’ 선언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간이 ‘비유비무’라는 관점은 이후 반야般若에서 집중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그를 모두 논함은 지면이 허락하지 않지만, 승조僧肇의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에서는 “열반은 비유非有이고 또한 비무非無로서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의 갈 곳이 사라졌다[心行處滅].”(주9)라고 ‘열반’을 ‘비유비무’로 논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어도단 심행처멸’은 조사선에서 상당히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고, 또한 승조의 『조론』은 조동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본적이 설파한 “토끼의 뿔은 없다고 할 필요가 없고, 소의 뿔은 있다고 할 필요가 없다.”라는 답변은 바로 ‘비유비무’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하겠다.
‘즉상즉진卽相卽眞’과 ‘즉환즉현卽幻卽顯’
『무주조산원증선사어록』에 주의할 문구는 또한 다음과 같다.
어떤 승려가 묻기를, “상相에서 무엇이 진眞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상에 ‘즉’하면 ‘진’에 즉함[卽相卽眞]이다.”라고 하였다. “마땅히 어떻게 드러내 보이겠습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탁자를 끌어왔다. 승려가 묻기를 “환幻의 근본이 어찌 ‘진’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환의 본원本原은 진眞이다.”라고 하였다. “마땅히 환을 어떻게 드러내겠습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환에 ‘즉’ 하면 바로 드러난다.[卽幻卽顯]”라고 하였다. 승려가 “어떻게 해야 바로 시종 ‘환’에서 떠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환상幻相을 찾으면 얻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주10)
이 구절 역시 상당히 복잡한 조사선의 사상적 흐름이 내재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즉심즉불’과 여기에서 말하는 ‘즉상즉진’은 표면적인 논리로 볼 때, 서로 배치되는 내용이다. ‘심’에 ‘즉’ 하면 ‘불’에 ‘즉’할 수 있다는 ‘즉심즉불’은 ‘상’에 ‘즉’ 하면 ‘진’에 ‘즉’한다는 말과 완전히 다른 입장이다. 사실 ‘즉’의 의미는 우리말로 번역했을 때, 적합한 말을 찾을 수 없는 까닭에 그냥 ‘즉’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즉’의 함의로부터 확장하면 그대로 ‘돈오’가 도출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개념이다. 어쨌거나 반야에서는 ‘소상파집掃相破執’을 철저하게 견지堅持하는 입장에서 ‘즉상즉진’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말이다.
특히 조사선이 시작된 『육조단경』에서는 불성佛性을 자심自心으로 규정하여 성불成佛에 대한 신앙을 ‘마음’에 대한 추구로 전환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육조단경』에서 ‘즉심즉불’의 용어는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지만 그 사상적 핵심을 모두 ‘즉심즉불’로 평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송대宋代 설숭契嵩은 『육조단경』을 다시 편찬하면서 찬술한 『단경찬壇經贊』에서 “이 『단경』의 종지宗旨는 싫어함이 없는 까닭에 천하에 두루 횡행橫行하였는데, 그를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칭한다.”(주11)라고 평가하는 바와 같다.
이러한 입장은 마조馬祖나 그를 계승한 백장百丈, 황벽黃檗 등의 남악계南岳系에서는 명확하게 ‘심心’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즉심시불卽心是佛’로 설해지거나 일심一心, 혹은 ‘일심’의 상태는 또한 ‘무심無心’이므로 ‘무심시도無心是道’로 전개된다. 한편 청원계靑原系에서도 역시 ‘즉심즉불’을 계승하고 있지만 조금 다른 사상을 개진하고 있다. 특히 석두희천石頭希遷은 승조의 『조론』을 읽고 “성인은 자기가 없고 자기가 아닌 바가 없으며, 법신法身은 상象이 없는데 누가 자타自他를 말하겠는가?”라고 하며 「참동계」를 찬술했다고 한다.(주12)
이러한 석두희천의 사상은 청원계에 전승되고, 본적에 이르러 남악계와는 다르게 드디어 ‘즉상즉진’을 제창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즉상즉진’은 명확하게 『조론』에서 논증하는 ‘입처즉진立處卽眞’, ‘촉사이진觸事而眞’(주13)을 염두에 두고 제창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즉상즉진’이 성립한다면 우리가 부디치는 현상은 모두 ‘환幻’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또한 ‘즉환즉현卽幻卽顯’이 성립할 수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역시 ‘환상幻相’을 추구한다면 ‘토끼 뿔’처럼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즉심즉불’이 되었든 ‘즉상즉진’이든 절대로 서로 대립하는 선리는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무정불성無情佛性으로부터 끊임없는 초월을 의미하는 향상일로向上一路라는 조사선의 기제가 작동하여 언어적 표현이 달라지고 있을 뿐, 결코 그 참다운 도리가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각주>
(주1) [日本]慧印校, 『撫州曹山元證禪師語錄』(大正藏T47, 530a), “僧家在此等衣線下, 理須會通向上事, 莫作等閑. 若也承當處分明, 卽轉他諸聖, 向自己背後, 方得自由. 若也轉不得, 直饒學得十成, 却須向他背後叉手, 說甚麽大話! 若轉得自己, 則一切麤重境來, 皆作得主宰. 假如泥裏倒地, 亦作得主宰.”
(주2) [明]朱時恩, 『佛祖綱目』 卷33(卍續藏85, 659c).
(주3) [日本]慧印校,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15b), “用而無功, 寂而虛照, 事理雙明, 體用無滯.”
(주4) [日本]慧印校,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11c), “師問僧: 世間何物最苦? 僧云: 地獄最苦. 師曰: 不然. 云: 師意如何? 師曰: 在此衣線下不明大事, 是名最苦.”
(주5) [日本]慧印校訂,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16a), “剃髮染衣, 持巾捧鉢, 履出塵之徑路, 登入聖之階梯.”
(주6) (T47, 528c), 僧問: 即心即佛即不問, 如何是非心非佛? 師曰: 兔角不用無, 牛角不用有.
(주7) 『江西馬祖道一禪師語錄』(卍續藏69, 4c), “僧問: 和尙爲甚麽說卽心卽佛? 祖曰: 爲止小兒啼. 曰: 啼止時如何? 師曰: 非心非佛.”
(주8) [宋]求那跋陀羅譯, 『雜阿含經』卷10(大正藏2, 67a), “如實正觀世間集者, 則不生世間無見; 如實正觀世間滅, 則不生世間有見. 迦旃延! 如來離於二邊, 說於中道.”
(주9) [後秦]僧肇撰, 『肇論』, 『涅槃無名論』(大正藏45, 157c), “涅槃非有, 亦復非無, 言語道斷, 心行處滅.”
(주10) [日本]慧印校,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28c), “僧問: 於相何眞? 師曰: 卽相卽眞. 曰: 當何顯示? 師提起托子. 僧問: 幻本何眞? 師曰: 幻本原眞. 僧云: 當幻何顯? 師曰: 卽幻卽顯. 僧云: 恁麽卽始終不離于幻也? 師曰: 覓幻相不可得也.”
(주11) [宋]契嵩撰, 『鐔津文集』卷3(大正藏52, 663a), “此壇經之宗, 所以旁行天下而不厭, 彼謂卽心卽佛.”
(주12) [宋]普濟集, 『五燈會元』 卷5(卍續藏83, 454c), “師因看肇論, 至會萬物爲己者其唯聖人乎. 乃拊几曰: 聖人無己, 靡所不己. 法身無象, 誰云自他? …… 遂著參同契.”
(주13) [後秦]僧肇撰, 『肇論』, 『不眞空論』(大正藏45, 153a), “非離眞而立處, 立處卽眞也. 然則道遠乎哉? 觸事而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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