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론학 강설]
구마라집 문하의 삼론학자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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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 2019 년 4 월 [통권 제72호] / / 작성일20-06-20 14:07 / 조회6,600회 / 댓글0건본문
박상수 | 불교학자·번역저술가
4) 도융道融
① 도융은 12세에 출가하여 스승 없이 『논어論語』 같은 외학外學을 익히다가, 장안에서 활약하는 구마라집 소식을 듣고 찾아가 발탁되고, 요흥왕의 칙명으로 역장에 참석하였다. 저서로는 『법화경』 『대품경』 『십지경』 『유마경』의 의소義疏를 지었으며, 삼론 분야의 단독 저술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팽성彭城에서 74세로 입적하였다고 한다.
② 그러나 삼론학과 관련하여, “구마라집에게 청하여 『보살계본』을 역출하게 하였다. 나중에 『중론』을 한역하여 비로소 2권을 얻게 되었는데, 도융이 곧 강론에 임하여 문장의 어구에 대한 내용을 해결하고, 미리 자초지종까지 꿰뚫었다.”(주1)고 전한다. 계속하여 구마라집이 『법화경』을 역출하자 도융에게 강의하게 하였으며, 자신도 직접 청강하고, 도융은 불법佛法을 흥하게 할 사람이라 탄복하였다고 한다.
③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장안 불교 구원하다. 세상에 평판이 높았던 승조와 승예조차 일부 문헌에 따라 사성四聖에서 빠지는 일이 있는데, 늘 사성에 포함되는 도융에게 있었던 특별한 사연이 『고승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총명 박식한 서쪽 사자국師子國의 외도外道의 종사인 한 바라문婆羅門이 구마라집이 장안에서 불교만을 전파하는 것을 시기하여, 낙타를 타고 서책을 지고 중국에 찾아와, 중국 승려와 승부를 겨루어 이기는 쪽이 교화하자고 제안하였다. 후진의 요흥왕이 그의 비범한 용모에 미혹하여 대결을 허락하였으나, 장안의 승려들은 서로 쳐다보며 감히 나서지 못하였다. 이에 구마라집이 부탁하여 해결사로 나선 도융은 국왕과 신하, 장안의 승속이 운집한 궁궐에서 바라문과 대결하였는데, 도융의 예리하고 깊은 담론에 이론적으로 굽히는데다, 도융이 열거한 독서의 분량과 중국의 경전과 사서의 명목이 바라문보다 세배나 더 많았다. 결국 바라문은 역부족을 인정하고, 도융의 발 아래 예배하고 수일 내에 떠나고 말았다. 실은 대결하기 전에 도융 쪽에서 사람을 시켜, 바라문이 열람한 경서의 목록을 베껴오게 하여 보고 한 번에 암송한 도융이었다.(주2)
그러니 그 때 도융이 외도에게 패배하였다면, 구마라집의 장안에서의 역경과 교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나라 현장玄奘(602~664)이 7세기 전반 인도에 구법 수학하고 돌아와 남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여기저기에 인도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불교 학자와 외도 바라문의 대결이 기록되어 있다. 사상과 학설의 토론장에서 불교가 승리하면 외도 쪽이 떠나버리고, 외도가 승리하면 불교 측이 사라졌다고 전한다. 장안의 학설 대결에서 도융이 패배하였다면, 이후 중국에 불교와 다른 인도의 종교철학이 전파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도융이 사성에 거론되는 이유로 충분하다 뿐이겠는가.
5) 도생道生(355~434)
① 도생은 어려서 출가하여 15세에 강좌講座에 오르고, 20세에 강연으로 명성을 떨쳤다. 45세 전후 여산廬山에 들어가 7년간 지내며 혜원慧遠(334~416)을 조종으로 삼은 백련결사白蓮結社의 한 명이 되었다. 이후 혜예慧叡·혜관慧觀·혜엄慧嚴과 함께 장안에 가서 구마라집에게 사사師事하였고, 409년 남지의 건강建康으로 돌아와 청원사靑園寺에서 거주하였다.
구마라집 입멸 후, 동진의 의희義熙14년(418)에 6권 『니원경泥洹經』이 역출되자, 이 경전을 연구하여 『니원의소泥洹義疏』를 지었다. 또 유송의 원가元嘉7년(430) 북본北本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 남지로 전해지자 이 경전을 강론하였다. 이후 4년 뒤 여산의 정사精舍에서 입적하였다. 『이제론二諦論』 『법신무색론法身無色論』 『불성당유론佛性當有論』 『불무정토론佛無淨土論』 『응유연론應有緣論』 등을 지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법화경소法華經疏』는 남아 있다. 『이제론』과 『법신무색론』 등은 반야 삼론학설 영향이 엿보이는 저술이다.
② 도생은 일천제불성설一闡提佛性說과 돈오성불설頓悟成佛說을 주장하여 불교역사상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일천제불성설은 『고승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열반경』 가운데 먼저 원시근본불교에 속하는 6권『니원경』이 건강에 전해지자.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 도저히 성불할 수 없다는 최하층 소질의 인간을 말함)도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경전에서 아직 그렇게 설하지 않은 것이라, 도생의 주장을 삿된 설이라고 배척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전해진 대승의 북본 40권 『대반열반경』에 일천제도 마침내 성불한다는 내용이 설해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도생은 이 『대열반경』을 획득하여 강설하며, 법좌法座에서 입적하였다.(주3)
③ 또한 돈오성불설을 주장하여, 중국불교 최초의 돈오설頓悟說의 주창자가 되었다.(주4) 도생이 돈오를 주장하자, 도생과 동문인 혜관慧觀은 『점오론漸悟論』을 저술하고, 담무성曇無成은 『명점론明漸論』을 지어 점오설漸悟說을 주장하였다. 반면 도생의 제자인 도유道猷·법보法寶·보림寶林과 송의 사령운謝靈運(385~433)과 문제文帝(재위 424~452재위), 혜관의 제자 법원法瑗 등은 돈오살을 계승하였다. 도생의 돈오설은 후대의 선종과 화엄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화엄종 징관의 사상에도 돈오설이 반영되어 있다.(주5) 도생의 사상 성립 배경에는 『열반경』을 포함하여 『반야경』과 삼론학이 뒷받침되어 있다는 지적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이와 연관 지어 보면, 한국의 경우 근래 해인사의 성철 스님(1912~1993)이 돈오돈수를 제창해,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역설한 돈오점수를 유지한 송광사 쪽과 대비되어 한 동안 돈점논의가 있었다. 논의의 내용이 온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중국의 초기 삼론학자들에 의하여 돈점설頓漸說이 주장되고 나서, 거의 1600년이 지나 정말 오랜만에 돈점설이 재연된 것이다.(주6)
6) 혜관慧觀(5세기 전반)
① 혜관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뒤늦은 중장년에 여산의 혜원을 따르다가, 다시 구머라집을 찾아가 사사하였다. 구마라집이 『묘법연화경』을 역출하자, 『법화종요서法華宗要序』를 지어 바쳐 칭찬을 들으며, 마땅히 남쪽으로 돌아가 법을 전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구마라집 입몰후 문종文宗 재위시에 건강建康의 도량사道場寺에 거주하였다. 『변종론辨宗論』 『논돈오점오의論頓悟漸悟義』 『승만경서勝鬘經序』 등을 지었다.
② 도생이 돈오설을 주장하자, 이에 대항하여 『점오론漸悟論』을 저술하여 점오설을 주장하였다.
③ 오시교판五時敎判 주장. 그는 중국불교에 사실상 처음으로 불교의 경론을 설한 시기와 내용을 기준으로 구별하는 교판설을 제시하였다. 혜관의 오시교판설은 『고승전』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길장이 저술한 『삼론현의』에 기술되어 있어,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있다.
먼저 불교 전체를 크게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로 구분하였다. 돈교는 오직 대승 보살들을 위해 완전한 교설을 설한 『화엄경』 부류이고, 점교는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처음 설법한 초전법륜부터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실 때까지, 중생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순차적으로 설한 일대一代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 점교를 열어서 다섯 시기로 나누어, 삼승별교三乘別敎(아함경, 육바라밀설)·삼승통교三乘通敎(반야경)·억양교抑揚敎(유마경, 사익경思益經)·동귀교同歸敎(법화경)·상주교常住敎(열반경)의 오교五敎로 구분하는 오시교판五時敎判을 주장하였다. 중국불교에서 자주 거론되는 오시교판의 근원으로서, 천태종天台宗의 오시교판보다 먼저 설해진 것이 바로 혜관의 오시교판이다.
그러나 이 돈점이교頓漸二敎와 오시교판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비판되었다. 먼저 수대隋代에 활약한 삼론학의 길장은 『삼론현의』에서 소개 비판 하였고, 또한 『법화현론法華玄論』에서도 혜관의 교판설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혜관이 제시한 교판설의 조직 체계는 불교 교판설의 기반이 되어, 이후 중국불교의 여러 종파에서 제창한 다양한 교판설의 토대가 되었고, 신라 원효도 교판설을 제안하였다.
혜관의 제자에 승복僧馥이 있어, 『대품경』과 『소품경』 『잡심雜心』을 잘 하였다고 한다. 또 혜관의 『열반경』 연구를 계승한 제자에 영근사靈根寺 법원法瑗(409~489)이 있었는데, 도생의 돈오설을 지지하였다고 한다.
7) 혜엄慧嚴(363~443)
16세에 출가하여 구마라집의 제자가 되어 중용되었다. 나중에 건강으로 돌아가 동안사東安寺에서 거주하였으며, 『무생멸론無生滅論』과 『노자약주老子略注』를 저술하였다. 『무생멸론』은 그 제목에서 표출되듯이 반야 삼론사상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담무참曇無讖이 한역한 북본의 40권 『대반열반경』이 전해지자 혜관·혜엄·사령운이 함께 수정하여 남본南本의 36권 『대반열반경』을 편집하였다. 제자에 법지法智가 있어, 『성실론』과 『대품경』 『소품경』을 잘 하였다고 전한다.(주7)
8) 담무성曇無成(5세기 전반)
문헌에 따라 팔준 가운데 도항道恒이나 혜엄慧嚴 등이 누락되고 담무성이 거론되기도 하였다.(주8) 집안이 난을 피하여 황룡黃龍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13세에 출가하여 구마라집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장안이 위태로워지자 남지로 돌아가 회남중사淮南中寺에 거주하였으며, 항상 『열반경』과 『대품경』을 상호 강설하였다. 『실상론實相論』과 『명점론明漸論』을 지었으며, 송의 원가元嘉 중(424~453) 64세로 입몰하였다.(주9) 특히 『명점론』을 지어 혜관과 함께 점오설漸悟說을 주장하였다.
이들 도생·혜관·혜엄·담무성과 다음에 설명할 승도僧導 등은 『열반경』을 연구하여 남지의 열반학파로 분류되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 삼론학파에 속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삼론학과 열반학을 병행하여 학습하였다는 뜻이다.
주)
(주1) 『高僧傳』 제6권 釋道融, “因請什出菩薩戒本. 後譯中論 始得兩卷 融便就講 剖折文言 預貫終始” (T50-p363bc)
(주2) 앞의 책, “俄而師子國 有一婆羅門 聰辯多學…爲彼國外道之宗…聞什在關大行佛法…遂乘駝負書來入長安. 姚興見其口眼便辟 頗亦惑之…婆羅門心愧悔伏 頂禮融足 數日之中無何而去. 像運再興融之力也” (T50-p363c)
(주3) 『고승전』 제7권, 竺道生, “又六卷泥洹先至京都…以宋元嘉十一年冬十一月庚子 於廬山精舍昇于法座” (T50-pp366c~367a)
(주4) 『고승전』에는 돈오성불을 주장하였다고 할 뿐,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矢吹慶輝, 「頓悟義の首唱者, 竺道生とその敎義」, 『佛敎學の諸問題』, 岩波書店 1935 참조.
(주5) 胡適, 『神會和尙遺集』, 亞東圖書館, 1930, p.39; 鎌田茂雄, 『中國華嚴思想史の硏究』, 東京大學出版會, 1965, p.403 등 참조.
(주6) 필자는 그 무렵 한 편의 논문에서 돈점설의 유래를 찾아보며, 돈오돈수 뿐만 아니라 돈오점수도 멀리 당나라의 화엄종 징관澄觀(738~839)의 저술에 모두 기술되어 있었음을 지적하였다.(박상수, 「돈오돈수의 기원과 주장자 및 불교역사상의 평가」, 『백련불교논집』 4, 장경각 1994, pp.167~204) 지금 삼론학파의 학자들의 생애를 정리하며 살펴보니, 돈점설의 최초의 근원은 화엄종의 징관을 지나 선종을 너머, 초기 삼론학자이자 열반학자인 도생과 혜관 등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보게 된다.
(주7) 『고승전』 제7권, 釋慧嚴, (T50-p368b)
(주8) 『大乘大義章』, “法集之盛 雲萃草堂 其甘雨所洽者 融倫影肇淵生成叡 八子也” (T45-p122b)
(주9) 『고승전』 제7권, 釋曇無成, (T50-p370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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