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 삼국유사]
지혜의 보고 『삼국유사』 새롭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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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연 / 2019 년 7 월 [통권 제75호] / / 작성일20-06-26 12:20 / 조회6,835회 / 댓글0건본문
오세연 | 자유기고가
『삼국유사三國遺事』라는 이름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하여 완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심지어 『삼국유사』 속 이야기를 한 편도 직접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마치 다 읽은 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삼국유사』 속 이야기의 많은 부분들이 여기저기 수다하게 인용되고 회자되어 온 이유가 클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아, 이것도 『삼국유사』에 나온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이 번번이 든다. 그런데 그렇게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 또한 함정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익숙한 것에 낯설게 다가가기의 방법으로 키워드로 『삼국유사』를 풀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였다. 이것은 이미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 1206~1289) 스님 이 전개한 서술 방식이기도 하다.
역설의 단어 - 괴력난신怪力亂神
『삼국유사』를 몇 장 들쳐보기만 해도 우리는 삼국유사가 표 형식의 「왕력王曆」을 제외하고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의 여덟 갈래로 주제별 편집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이 편명篇名 자체가 각각의 키워드로서 하위의 이야시들을 묶고 있다. 나아가 일연 스님은 역사적인 사건을 이야기 속에 풀어 넣는 탁월한 기술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몇 가지 양상으로 볼 수 있는데, 원효와 의상처럼 대비될 수 있는 인물을 짝지어 등장시킴으로써 흥미를 이끌어내는 경우, 김춘추처럼 주인공의 자리에 조연으로 등장시켜 매우 객관적인 태도로 그 사람을 조명하는 경우 등이 눈에 띈다.
더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한 왕대에 대해 대표적인 한 사건을 서술하여 그 성격을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미추왕과 죽엽군, 내물왕과 김제상 등의 방식이 그것이다. 이는 한 왕대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이 얽혀 있음에도 그것을 특징적인 사건 하나로 집약하여 통시적으로 흐름을 짚어보게 하는 뛰어난 편집능력이자 서술 방식이다. 때문에 책을 읽으며 계속 마음이 머문 곳은 바로 저자 일연 스님이었다. 『삼국유사』가 익숙해진 만 큼 우리의 귀에 익은 이름이 또한 일연 스님이다.
다행히 일연 스님이 만년에 머문 인각사麟角寺에 스님의 비문이 있어 일연 스님에 대한 연대기적인 정보는 밝혀졌다. 비문에 따르면 일연 스님은 선과禪科에 급제하여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의 품계를 밟아 올랐으며, 국존國尊의 책봉까지 받은 분으로 불교뿐만 아니라 제자백가를 비롯한 당시의 학문에 정통했던 학승이자 선승이었다. 그러나 스님이 살아간 시대와 함께 스님이 남긴 저작인 『삼국유사』와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의 행간을 통해서 우리는 훨씬 다면적이고 깊이 있는 스님의 사상과 인간적 면모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삼국유사 속 이야기의 편편에서 그 이야기를 수록한 일연 스님의 편집 의도와 그를 통한 바람을 짚어보는 것이 이번 독서의 목표라 하겠다.
『삼국유사』에서 첫 번째로 만날 수 있는 키워드가 바로 이 괴력난신이 아닐까 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편紀異編」의 첫머리에 이런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대체로 옛 성인들은 예禮와 악樂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인仁과 의義로써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帝王이 장차 일어날 때에는 부명符命과 도록圖籙을 받게 되므로 반드시 범인과는 다른 점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부명이란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로운 징조이고, 도록은 미래의 길흉을 예언하여 기록한 책을 일컫는다. 「기이편」이라는 특성상 이런 류의 단어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여기서 언급한 괴력난신은 사실상 『삼국유사』 전반을 흐르는 소재이자 핵심어 라고 할 수 있다. 이후로 꿈, 귀신, 신통, 이적 등 허황한 이야기들이 줄을 잇는다. 이것은 ‘군자불어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의 관점에서는 그야말로 코웃음치고 넘어갈 헛소리들이다. 더군다나 저자의 신분이 세속의 잡다함과 일체의 희론을 떠나 있어야 할 스님인 바에는 더욱 의아하기만 하다. 문학적 탁월함이나 문화사적 가치 등의 논평을 떠나서 불교적 관점으로 첫 대면을 해보면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 현대의 학계에서는 “일연의 『삼국유사』가 정연한 논리의 틀만을 내세우지 않고 문학과 역사의 일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문장으로 『삼국사기』와는 전혀 다른 역사 기술 유형을 보여준다.”고 평하였다. 하지만 후대의 평이 아닌 일연 스님의 음성으로 그 의도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뒤이어 스님은 중국의 신농씨, 복희씨, 요·순 등의 괴이하고 별스런 출생에 대해 줄줄이 언급하고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으나 이를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이로 보건대 우리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로운 데에서 탄생하였다고 하여 이상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책 첫머리에 「기이편」을 싣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혹자는 두 가지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나는 중국의 시원始原이 이러하니 우리의 신이함도 괴상함이 아니라는 관점, 또 하나는 중국의 시조가 그러하듯 우리의 시조도 못지않은 부명과 도록을 받았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유효한 것 같다. 다만 앞의 관점은 전제로서 깔아두고 방점은 뒤의 것에 찍는 것이 왠지 일연 스님의 의도에 부합할 것 같다. 책명에서 보듯이 삼국유사는 삼국·후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정사류의 삼국사기에서 다루지 않거나 빠진 내용들을 저자인 일연 一然 스님이 사서史書의 체계에 접안하여 ‘전하는 형식’으로 수록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정사의 범위를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우리 정서와 친밀한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그 첫 번째인 「기이편」의 제1에는 고조선을 개창하여 우리 민족의 뿌리를 내린 단군왕검으로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가 정립鼎立하여 각축을 벌이는 시기까지 한반도의 많은 고대 국가의 흥망 및 신화·전설·신앙 등에 관한 유사遺事가 기록되어 있고, 제2에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文武王 이후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까지의 신라 왕조 기사와 백제 · 후백제 및 가락국에 관한 약간의 유사 등을 다루고 있다. 이 부분은 기전체 역사 서술 체계로는 본기本紀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독자의 입장으로 읽을 때는 역사서라기보다는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신단수 아래 신시를 건설하고 사람이 된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고조선 신화나, 하늘나라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하여 주몽을 낳았다는 고구려 신화, 우물 옆에 이상한 기운이 있어 살펴보니 푸른빛이 도는 큰 알이 한 개 있는데, 알을 깨보니 사내아이가 있어 그 아이를 동천에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나고 해와 달이 청명해져 이름을 혁거세라고 하였다는 신라의 시조 신화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왕帝王이 장차 일어날 때에는 부명符命과 도록圖籙을 받게 되므로 반드시 범인과는 다른 점이 있기 마련’이라는 전제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개조의 신비로움은 또한 그 나라의 정체성이나 위상과 맞물리고 그 나라 사람들의 자긍심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인간 욕망의 발현 혹은 분출”
앞서도 밝힌 바와 같이 비록 이 편의 이름이 기이紀異이긴 하나 기이는 이 한 편에 국한하지 않고 내용적으로 삼국유사의 전반을 관통한다. 이는 “역사에 반영된 신이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일연 스님의 역사인식과 많은 사료를 수집, 전거를 밝혀 인용하고 고대 사료의 원형 전달을 도모한 역사서술 방법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나아가 몽골 세력 아래서 핍박당하는 당시 민중들에게 괴력난신을 통해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려는 스님의 무한한 비민심悲愍心을 엿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괴력난신을 글자 그대로 살펴보면, 괴怪는 괴이怪異·괴기怪奇·요괴妖怪이고, 력力은 믿을 수 없는 힘이나 폭력을 말하며, 난亂은 사회 질서의 파괴와 문란함과 배덕背德을, 신神은 괴이한 신神이나 신비함, 귀신 등을 말한다. 즉 괴이하고 강력하며 때로 사회에 반反하기도 하고 신비스러운 존재나 그 이야기라 하겠다. 요즘 개념으로 유언비어나 괴담류, 공상과학, SF, 근거 없는 가짜뉴스 등도 이에 해당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괴력난신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상황이나 사건, 존재 등을 말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괴력난신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당연히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이나 정서의 범위 안이 될 것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나 힘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될 때, 혹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기대고 싶어지는 것, 아마도 그것이 괴력난신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분명 욕망의 발현이지만 그것 자체를 선악의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도 섣부른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우리에게 출구로서 작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을 채집하면서 의도했던 바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일지 모르겠다.
일연 스님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에 태어나,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모진 세월을 살았다. 이 시대는 일제 36년을 버금가는 고통의 시대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당대 지식인으로서 일연 스님은 동시대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스스로도 견딜 수 있는 출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삼국유사』를 다시 본다면 그 속의 이야기 하나하나는 고통에 허덕이는 민중을 향해 내미는 일연 스님의 가슴 저미는 손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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