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 삼국유사]
일연 스님이 사랑한 인물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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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연 / 2019 년 9 월 [통권 제7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488회 / 댓글0건본문
오세연 | 자유기고가
『삼국유사』에 나온 이야기의 총 편수 138편 가운데 편당 분량이 많은 세 편은 「기이편」의 태종춘추공, 후백제 견훤, 그리고 「의해편」의 원광서학圓光西學이다. 그런데 이 세 편에서 실질적으로 다루는 인물의 비중을 보면 원광서학 조를 제외하고 제목의 주인공보다는 그 시대의 여러 인물들이 고루 등장하고 있다. 태종춘추공 조는 특히 심해서, 눈에 띄는 인물은 김유신, 성총과 더불어 당나라 소정방 등이고, 후백제 견훤 조에서는 오히려 고려 태조 왕건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전체를 아울러 살펴보면 가장 많이 다루거나 언급되는 인물은 단연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따로 한 편을 차지함은 물론이고 태종춘추공의 시작 역시 차지하는데, 심지어 당 고종이 무열왕의 칭호를 태종으로 하는 것을 힐문할 때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나 성신聖臣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태종으로 봉한 것”이라 대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밖에도 미추왕과 죽엽군 조와 진덕왕 조에도 언급되고 있다. 나아가 김유신이란 타이틀로 전개되는 김유신 조의 수록 위치는 진평왕과 선덕・진덕왕의 뒤, 태종의 앞자리로 왕들의 이야기 사이에 놓여 있다. 이는 『삼국유사』와 쌍벽을 이루는 『삼국사기』에서도 열전 10편 가운데 3편을 차지하듯 삼국 시기 김유신의 역사적 비중이 크고 자료 또한 풍부한 까닭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분량과 빈도 면에서 김유신 만큼 일연 스님의 사랑을 받은 인물도 아마 없을 것 같다.
「기이편」 김유신 조에 보면, 18세 때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낭도 가운데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어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려고 밤낮으로 계획하고 있을 때 마치 토끼의 간을 취하기 위해 토끼를 유인하던 별주부처럼 먼저 그곳을 정탐한 뒤에 일을 도모하자는 제의를 한다. 김유신이 옳다 여기고 백석과 함께 길을 떠나는데, 도중에 세 여인과 함께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인들은 백석을 떼어놓고서는 문득 신神의 모습으로 나타나 김유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호국신으로 지금 적국 사람이 당신을 유인해 가고 있으니 당신을 가지 못하게 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오.”라고 하였다.
전생과 현생, 죽은 후의 사건까지 망라
이에 가던 길을 돌아와 백석을 고문하여 실정을 듣는 과정에 김유신의 전생이 드러난다. 즉 김유신은 전생에 추남楸南이라는 고구려의 점쟁이로서 국경의 하천물이 역류한 원인이 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거스른 까닭이라 말하였는데, 이 때문에 왕비의 노여움을 사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내가 죽은 후에 장군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 했는데, 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 서현공(김유신의 아버지) 부인의 품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말하자 신하들은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김유신의 현생은 『삼국유사』 안에서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먼저 태종춘추공 조의 서두에 등장하는데, 바로 유명한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언니의 꿈을 산 것을 계기로 춘추공과 인연을 맺고 후일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또 하나의 일은 진덕왕 조에 나온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김유신과 김춘추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는 설이 있다. 이의 방증처럼 진덕왕 조에는 알천, 임종, 술종, 호림(자장 스님의 아버지), 염장, 유신 등이 나랏일을 의논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큰 호랑이가 좌중에 뛰어들었는데 모두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만은 태연히 담소하며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던졌다고 하였다. 그런 알천이 상석에 앉았지만 세력은 김유신에게 미치지 못하여 모두들 유신에게 복종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진덕왕 대에 처음 조례朝禮를 행했고 시랑侍郞이란 호칭을 사용했다는 등 중국식 정치가 행해진 이면에는 김춘추의 그림자가 역력하다. 김유신의 위엄은 태종춘추공 조에서 다시 드러난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쳐 계백과 황산벌에서 대치할 때 새의 기미機微로 위축된 당나라 장군 소정방에게 김유신이 말한다.
“어찌 날아다니는 새의 괴이한 짓 때문에 하늘이 준 기회를 어길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에 응하고 백성의 뜻에 따라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는가?”
그리고 신검을 뽑아 새를 겨누니 찢어져 떨어지고, 진을 치고 싸워 백제군을 크게 멸했다고 하였다.
또한 『고기古記』의 기록을 인용하여, 고구려 정벌 당시 당나라 구원병이 평양 교외에 와 주둔하면서 군수물자를 보내라는 서신에 문무왕이 고민하고 있을 때 김유신은 왕을 안심시키고는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 등과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가 식량을 수송하고 돌아온 일화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회군을 암시하는 소정방의 소식에 패강(지금의 청천강)을 아직 다 건너지 못했는데 고구려 군이 쳐들어와 미처 건너지 못한 군사들이 죽게 되자 이튿날 김유신은 고구려 군을 뒤쫓아 반격하여 수만 명을 붙잡아 죽였다고 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후 남은 적을 소탕할 적에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에게 포위를 당해 신라군이 매우 위태로웠다. 이때 김유신이 왕께 달려와 말하기를 “형세가 위급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하고 오직 신술神術로써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고는 산에 단을 쌓고 신술을 닦으니 갑자기 큰 독만 한 빛이 단 위에서 나타나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 성 안의 고립된 병사들은 구원병이 이르지 않아 원망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적들이 곧 공격하려고 하자 갑자기 남쪽 하늘에서 빛이 비치더니 30여 군데의 적군의 포차를 깨뜨렸다. 또한 적군의 활과 화살이 부서지더니 군사들이 모두 땅에 쓰러졌다가 깨어나 달아났다.
죽은 후에도 김유신의 위엄은 성성하였다. 신문왕 때에 당나라 고종이 사신을 보내 작은 나라 신라에서 태종이란 칭호를 쓰는 것에 대해 힐문하였다. 이에 대해 “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나 성신聖臣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태종으로 봉한 것”이라 하니 당 황제는 자신이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노래하기를 “33천天 가운데 한 사람이 신라에 내려왔으니 바로 김유신이다.” 한 말을 기록해 두었던 것을 꺼내보고는 매우 놀라고 두려워 그대로 쓰도록 허락했다고 하였다.
또한 기이편 미추왕과 죽엽군 조에는, 37대 혜공왕 14년에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고 무덤에서 어떤 사람이 준마를 타고 나타났는데 갑옷 차림에 무기를 든 마흔 명가량의 군사가 뒤를 따라 미추왕의 능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안이 진동하고 소리 내어 우는 듯한 소리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신은 평생을 환란을 구하고 통일을 이룩한 공이 있고 이제 혼백이 되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고 재앙을 물리치는데 지난 경술년(혜공왕 6년)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이제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 다시는 힘쓰지 않으려 하니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미추왕이 이를 막고 김유신의 세 차례 부탁에도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곧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말을 듣고는 두려워 대신을 보내 김유신의 능에 사과하고 김유신이 평양을 토벌한 후에 복을 심기 위해 세운 취선사鷲仙寺에 공덕보전 30결結을 하사하여 명복을 빌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유신은 54대 경명왕(흥덕왕) 대에 이르러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기까지 한다. 그의 능은 원형으로 된 봉분 아래에 호석을 세우고 외곽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호석은 십이지신상을 하나씩 조각한 것과 조각을 하지 않은 것이 번갈아가며 배치되어 마치 왕의 능에 버금간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같이 김유신의 전생과 현생의 숱한 업적, 정치적 영향력, 사후의 위엄까지를 망라하여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김유신은 탄생부터 남다르다. 김유신 조에는 “유신공은 진평왕 417년 을묘(595) 생으로 북두칠성의 정기를 타고 났기 때문에 등에 북두칠성 무늬가 있었고, 또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렇듯 화려하게 역사의 전면에 새겨진 그 이면에는 김유신의 비애도 엿볼 수가 있다. 그것은 김유신의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다. 몰락한 가야계 후손으로서 골품제가 분명한 신라 사회에서 세력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웬만한 노력과 기회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태종춘추공 조의 처음을 장식한 누이의 스캔들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김춘추 역시 진흥왕의 아들 진지왕의 손자로서 별탈이 없었다면 정통 성골로서 무난히 왕위를 이었을 것이지만 진지왕이 4년 만에 폐위됨으로써 진골로 강등되고 왕위 계승 서열에서도 진평왕 쪽에 밀리게 된 처지, 하지만 여전히 가능권 안에 든 인물이었기에 잠룡潛龍인 춘추와의 연은 김유신에게 기회였던 것이다.
신하로서 왕이 된 사나이
진덕왕 조에서 드러나듯 김유신의 영향력은 선덕여왕 사후 차기 대권 계승 순위에 오른 상대등 알천을 낙마시키고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을 추대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는 비담의 난 등으로 정국이 혼란한 시기였으며, 이를 진압함으로써 김유신과 김춘추는 각각 군사, 외교 등 분야의 권력을 장악한 사실상의 실세가 되었다. 이후 이 두 사람의 유착관계는 김유신의 두 누이가 김춘추의 부인이 되고, 또한 김춘추의 딸이 김유신의 부인이 되는 중첩된 혼인관계로 더욱 공고하게 된다.
가문을 일으키고 지키고자 했던 김유신의 열망은 미추왕과 죽엽군 조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연 스님은 그를 통해 사후에까지 떨친 위엄을 나타내려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미 젊은 시절 천관녀와의 사랑을 끊어낸 사건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후손의 억울함을 간과하기 어려운 그의 가문에 대한 열망과 자존심도 느낄 수 있다. 어쨌든 전생부터 사후까지 『삼국유사』에 열거된 내용만을 종합해 보면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김유신에 대해 분명 그가 용장勇將이나 맹장猛將보다는 지장智將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다분히 승자의 입장에서 윤색되었을 여지를 감안한다면 어쩌면 김유신은 강직한 무관이라기보다는 시대를 읽어내고 흐름을 탈 줄 아는 정치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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