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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논쟁 / 기무라 vs. 우이 · 와츠지의 제1차 연기논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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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19 년 9 월 [통권 제7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51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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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역자주 : 본 번역은 미야자키 데츠야宮崎哲弥의 『불교논쟁佛敎論爭―‘緣起’에서 본질을 묻는다』(ちくま新書[1326], 筑摩書房, 2018,5)의 내용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본서 및 본 번역의 의도 등에 대해서는 『고경』 제74호 서두 참조.

 

테라바다불교의 무명관

 

[p.160-1, 『불교논쟁』 페이지-행수, 이하 동일] 알루보물레 수마나사라Alubomulle Sumanasara는 팔리아비담마 개설서에서 무명無明을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진리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진리란 사성제 · 고집멸도이기 때문에 ‘존재가 고집멸도인 것을 아직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ブッダの實踐心理學 第6卷 緣起の分析』 サンガ)


무명을 무지無知라고 하는 경전은 상당히 많고, 대표적인 것을 하나 들기로 한다. 『상응부』 경전, <인연편>의 「분별」이라는 제목의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비구들이여, 무명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고에 대해 모르는 것, 고의 원인에 대해 모르는 것, 고의 소멸에 대해 모르는 것, 고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해 모르는 것, 비구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분석」 『原始佛典II 相應部經典[第2卷]』 春秋社)


이 경전에서 무명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고, 고의 생기, 고의 소멸,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란 4제, 즉 고제, 집제, 멸제, 도제를 말한다. 즉 무명이란 단적으로 4제에 대한 무지라고 말해진다.
좀 더 수마나사라의 설법을 보기로 한다.

 

“‘행’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가 있습니다. 무명이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서 행동합니다(위험한 행동이 됩니다). 무명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무명을 없애기 위해 행동을 합니다(해야 할 바른 행동). 그러나 어느 것이든 무명으로부터 생긴 행입니다. 세계는 무명이 있는 것을 모르고 행을 합니다. 불제자는 무명을 없애기 위한 행을 합니다.” “4성제를 완전하게 안다면 무명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행해야 할 것)도 소멸합니다. 이것이 해탈에 도달했다는 의미입니다.”(『ブッダの實踐心理學 第6卷 緣起の分析』 サンガ)

 

수마나사라의 표현은 실로 평이하지만, 내용을 세밀히 보면, 와츠지의 난해한 무명론과 놀랄 만큼 일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세계최초의 테라바다 불교의 종합사전 『상좌불교사전』의 무명의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내려져 있다. 이케다 렌타로池田鍊太郞의 집필에 의한 정의를 보기로 한다.

 

“불교가 설하는 근본적 번뇌 · 무지 · 명이 올바른 지혜 · 인식을 의미하는 것에 대하여, 무지는 그것을 결한 상태로, 진실과 사물의 도리에 대한 무지를 의미하며, 특히 연기와 4제 등 불교의 가르침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パーリ學佛敎文化學會 上座佛敎事典編集委員會編 『上座佛敎事典』 めこん)
이것도 또 우이, 와츠지의 무명=무지라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제1차연기논쟁의 최대의 쟁점이었던 무명의 성질에 관한 이해의 차이는, 각각의 행론의 일관성과 정합성, 상대방 논점의 치밀성을 살펴보아도, 팔리 아비담마나 중관철학의 전통적 교설에 비추어 보아도 명백하게 결론이 나왔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기무라설의 특이성

 

[p.162-5] 야마오리 테츠오山折哲雄는, 우이, 와츠지의 초기불교의 연기관, 무명관을 다음과 같이 재단하고 있다.
“기무라가 그것을 인간에 있어서 생명발동生命發動의 다이나믹한 지평에서 재구성하려고 한 것에 대하여, 세계와 현상을 논리의 그물로 잡으려는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 결과 무명이란, 근본불교의 입장에 대한 무지, 세계와 현상에 관한 상호규정성에 대한 무지라고 해석하기에 이르렀다.”(山折, 『近代日本人の宗敎意識』前揭)

이러한 이해는 논의를 기존의 도식에 갖다 맞춘 구도일 뿐으로, 그들 즉 기무라나 우이, 와츠지의 논의에 대한 섬세한 배려를 결하고 있다.

 

반복되는 것이지만, 우이와 달리 와츠지는, 초기불교의 연기를 “세계와 현상을 논리의 그물로 잡으려는 방식으로 해석한다”고 말하지 않고, 12지연기의 무명을 ‘세계와 현상에 관한 상호규정성에 대한 무지’라고 설정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기무라에 의한 상당히 일방적인 논점정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사람들에 의해 부당하게 정리된 환상의 ‘와츠지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불교의 연기를 “인간에 있어서 생명발동의 다이나믹한 지평에서 재구성하려고 했다”고 하는 기무라의 연구목적에, 나는 당시 일본의 지식계를 석권하고 있던 일대사조였던 ‘다이쇼생명주의大正生命主義’의 반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 쿠수모토 노부미치楠本信道에 의해 논의되듯이 “논리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기무라의 해석은, 언뜻 올바르게 보이지만, 무명을 윤회의 주체로까지 간주하여 해석하는 것은 기무라에게만 보이는 특이한 견해”인 것이다.(『俱舍論』における世親の緣起觀』 平樂寺書店)

 

와츠지설의 난점

 

[p.163-10] 물론 와츠지의 논고에도, 원시불교론 전반에 있어서 혹은 오온론, 연기론에 있어서나 또는 그 이외의 불교전반의 이해에 있어서도, 몇가지의 의문점, 문제점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그가 말하는 실천철학의 ‘실천’은, 야마오리 테츠오나 게타 마사코氣多雅子 등이 거론한 비판의 논점과는 다른, 아마도 그들의 비평의 문맥과는 반대의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와츠지는 현상학의 ‘본질직관’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며, ‘실천’이라는 말 안에 형이상학과 신비주의를 원시불교의 해석론 속에 도입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와츠지 데츠로

 

 

“즉 무아무상오온 등의 법이 초시간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여실지(如實知, pañña)’ 여기에서 진리란 존재자가 시간적으로 변화해 가는 것, 그 시간적인 존재자가 오온소생인 것 등의 여실지이다.”(「제1편 제1장」 『불교윤리사상사』 『和辻哲郞全集 第19卷』所收 岩波書店)

“여실지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본질이 타당한 것도 여실지에 의해 권리를 부여받는 것이다. 여실지는 곧 신비적인 직관이며, 타당영역은 이 직관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다.”(和辻, 前揭書)

 

“‘형이상학적인 것. 철학이외’ 그것은 초감각적인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인식불가능한 것으로서 철학의 영역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본질직관은 이렇게 무아의 입장이 방치된 형이상학적인 것을, 고래의 형이상학과는 다른 의미에서, 곧 존재자와 연이 없는 것으로서, 인식불가능한 것으로서 다시 세우는 것이다. 거기에 ‘인식불가능한 것’을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지향한다고 하는 신비주의Mystik가 성립하는 것이다.”(前揭書)

 

좀 더 말한다면, 앞에서 말한 ‘법’과 ‘법의 법’을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이 변멸變滅하지 않는 실체로 간주한 과오이다. 이 과오는 중대하며, 무명의 해석을 둘러싼 대립과 함께 제1차연기논쟁의 최대의 논점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제까지 보아왔듯이 비판자들의 논고에는,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독해가 빠져있고, 주지주의와 논리주의 이름으로 끝내버리는 것이 눈에 띈다.

 

실존고에 대한 기무라의 위기감

 

[p.165-4] 한편 기무라 타이켄의 종교적, 실존적인 문제의식에 대한 깊이성과 예리함, 거의 위기감이라해도 지나치지 않을 첨예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의 실제 인생에 있어, 특히 노사로부터 출발한 구체적이며 동시에 실존적인 고를 어떻게든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심함이 배어 있다. 예를 들면 그는 생의 지분에 대한 설명에서 “우리들에게 노사 등의 고뇌가 있는 것은 소위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고뇌苦惱도 우비憂悲도 없었다고 하는 것은, 곧 노사의 조건으로서 다음에 생이 오는 이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사실적세계관」 제5장 5절). 니힐리스틱이라고도 염세적이라고도 간주할 수 있는 이 한 구절에, 기무라의 실존고實存苦에 대한 심각한, 절박한 위기감이 느껴진다. 또 12지의 연쇄를 심리적인 과정이라고 하는 해석도 가능하게 느껴진다. 당시의 용어로 바꾼다면 ‘인식과정론’이 될 것이다.

 

 

기무라 타이켄

 

 

단지 문제의식의 절실성이 기무라의 원시불교를 약간은 성급한 쪽으로 몰고 갔다. 그런 까닭인지 주의주의主意主義에 과도하게 기울거나, 유아론有我論에 한없이 나아가, 기무라의 행에 대한 논의에는 일관성이 약하거나 위험성도 따르고 있다. ‘훈권暈圈’같은 애매한 영역을 설정하거나 혹은 최종적으로 절충으로 치닫는 모습은 이러한 논의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 해도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무아설을, 인격향상이라는 윤리적, 실천적인 목적을 위해 내세운 것에 지나지 않고, 교리의 근간에 관련된 것이 아닌 것 같이도 시사하고 있다.
“불타가 무아론을 강하게 주장한 다른 한 이유는, 무아론을 주장하는 것은 유아론을 주장하는 것보다도 우리들의 인격적 가치를 증진하는 위에서 오히려 유효하다고 하는 실천적 이유에서 이다. 아니 이것은 불타에 있어서 이론적 방면보다도 중대한 근거이었는지도 모른다.”(「사실적세계관」 제2장 4절)
그런데 와츠지에 있어서 무아는 주객과 물심의 구별을 초월하여, 오온, 연기 등의 제법을 관하는 고차高次의 법의 입장이다.

 

“오온에 있어서 아가 있다고 헤아리는 범부만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노여워하고 괴로워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기쁨이나 괴로움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나의 기쁨이나 괴로움’으로서 이다. 무아의 입장을 지키는 한 물리적인 물과 심리적인 물과의 구별은 있을 수 없고, 존재의 방식과 체험은 하나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일체의 대상계를 의식에 내재시키는 시도가, 의식을 대상계의 범주라고 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본다”(「실천철학」「제1장근본적입장 제5절」)
이 무아에 관한 기무라와 와츠지의 평가에 대한 차이는 너무 크고 깊어 그 틈을 메우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양자의 혹은 기무라와 우이, 와츠지의 쟁론의 본질은 무명, 무아의 성질을 최대의 논점으로 한 것은 아닐까.

 

와츠지는, 기무라의 “원시불교를 관통하는 솔직함과 실증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비판에 대하여 이렇게 답하고 있다.
“만약 이 비평이 나의 해석에 있어 추상적, 논리적인 것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무라씨의 철학에 관한 이해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원시불교의 철학 속에 ‘내용이 없는 단순한 논리형식’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가장 구체적인 살아있는 현실에 대한 파악만을 제시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반복하여 상세히 서술하고자 했을 뿐이다.”(「부록 기무라 타이켄씨의 비평에 답함」 前揭)

 

‘구체적인 살아있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일정한 틀이나 괄호에 넣고, 그래서 얻어진 일정한 틀의, 상호 관련이나 양태를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성찰할 필요가 있다. 와츠지가 경도한 현상학의 술어를 일부러 쓴다면, ‘에포케(판단정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만약 추상적, 논리적인 형식화라고 비난한다고 한다면, 더 이상 12지연기로 대표되는 각각의 유지연기도, 오온도, 6처도, 18계도 동일한 논란을 면하기는 어렵다. 불교는 가령 최초기의 단계라고 해도 그 정도로 ‘지적’이었고,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무지와 근본번뇌


[p.168-1] 단 우이, 와츠지가 등한시한 반면 기무라가 그 허를 찌른 한 가지가 있다. 앞에서도 논한 ‘범부를 분명히 멀리하는 근본동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나는 기무라설을 부연하는 형태로 그것을 본능과 언어에 의해 움직이는 맹목적 생존욕망, 근본번뇌라고 추정했다. 즉 근본번뇌에 덥혀있기 때문에 무지인 것이며, 무지한 까닭에 근본번뇌에 덥혀있다. 맹목적인 까닭에 무지가 되며, 무지한 까닭에 맹목적이 된다. 이 둘은 상의의 관계에 있다. 

 

나가르주나는 “만약 무명의 인연을, 더욱이 그 근본을 구한다면 곧 무한정이 되어, 변견邊見에 떨어져 열반의 길을 잃게 된다. 그런 까닭에 구해서는 안된다. 만약 더욱 구한다면, 희론에 떨어지며,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大智度論』第90卷)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러 기무라, 우이, 와츠지를 본받아 무명의 근본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무지와 근본번뇌의 상호의존에 부딪친다. 상의관계는 무한정 순환하기 때문에 그 이상 소급할 수 없다. 곧 무명이 근본이며, 연기의 기원이며, 종극이다. 이것이 나의 무명해석이며, 연기론의 근저이다. 이것에 대한 해설은 원고를 달리해 논술할 예정이다.

 

제1차연기논쟁은 표층적으로는 원시불교교리의 성격을 둘러싸고 벌어졌지만, 실제로는 후대의 부파불교나 아비달마, 나아가 중관 유식 등 대승불교의 논의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논쟁에서 물러난 전통계승논자

 

[p.169-3] 그런데 이 논쟁의 참가자 가운데 거의 언급하지 않은 사람이 아카누마 치젠赤沼智善이다. 아카누마는 기무라에 의해 12지연기의 윤회론적 해석을 한결같이 하는 자로 간주되고 있다(「연기관의 전개」상, 3절). 우이, 와츠지의 설을 일괄하여 논리주의라고 결정한 것과 같이, 아카누마의 설을 윤회론으로 결정지웠다. 더군다나 ‘오래된 연기경’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인생의 현실, 노병사의 고관에 이르는 심리활동을 응시할 수 없다고 까지 혹평하고 있다.

 

“나는 오래된 경전이라고 해도 이미 그 가운데 윤회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감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평하고 정직하게 경전을 읽는 한, 역시 현실활동(주로 심리적 경과)의 양식에 중점을 둔 관찰이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연기관의 전개」상, 3절)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아카누마는 사실상 논쟁으로부터 물러나 버린다.

 

“12연기설에 대해서는, 최근 중요한 연구논문이 발표되어 불교학계를 활기차게 하고, 특히 우이, 와츠지 두 사람에 의한 훌륭한 연구 성과는 경복敬服을 금할 수 없다. 나는 우이박사의 「12인연의 해석」이 잡지 『사상』에 발표된 같은 달에, 「12연기설의 전통적 해석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잡지 『종교연구』에 발표하여, 몇몇 전통적 해석을 설명하는 것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전통적 해석의 지지자인 듯 생각되어졌지만, 실제 나의 연기에 관한 생각은 몇 번인가 바뀌었다. 어떤 때는 연기설의 전통해석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전통해석은 경전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조사한 결과, 정리된 것을 발표한 것으로, 지금까지 12연기설에 대하여 나타난 논문으로서는 기무라박사의 『원시불교사상론』 중의 그것이 가장 주요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응해 글을 진행시켜, 별 생각 없이 전통적 해석을 지지하는 듯한 의미가 눈에 띄게 나타난 것으로, 같은 달 발표된 우이박사의 논문을 읽고, 계발된 점이 많아, 나의 논의의 부족함 특히 전통적 해석이 경전적 근거로서 삼고 있는 것, 그것을 향한 비판이 부족했던 점을 느낀 것으로, 결코 언제까지나 전통적 해석의 지지자인 것은 아니다.”(「아함경강화」 제5장 5절 『原始佛敎之硏究』所收 法藏館)

 

자신은 기무라 타이켄의 논고에 자극을 받고 그것을 보완할 의도로 전통적 해석을 계승하고자 한 것으로, 단지 우이 하쿠주의 논고를 읽고 반성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카누마의 ‘2종연기설’

 

[p.170-15] 이렇게 논쟁의 전선에서 일찍 물러나 버렸지만, 아카누마의 초기불교연구에는 볼만한 점이 있다.
아카누마 치젠은 1884년 니이가타현新潟縣 나가오카시長岡市의 진종대곡파의 절에서 태어났다. 성장하며, 동본원사의 학료를 전신으로 하는 진종대학을 졸업. 나아가 스리랑카, 영국에 유학했다. 귀국후 진종대학에서 팔리어, 원시불교를 가르치고, 연구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1937년 불의의 화를 당해 서거. 향년53세. 업적은 다양하지만, 초기경전의 연기설의 분류, 분석은 잘 알려져 있다. 니카야와 한역 『아함경』을 상세히 조사하여, 연기지의 수에 따라 35종으로 분류하고, 그 유형을 발견해 일람표를 작성했다. 더욱이 그것들을 12지연기를 중심으로 ‘정계正系’와 ‘별계別系’로 구분하고, 나아가 상세한 분석을 시도하였다.(「12인연의 전통적 해석에 대하여」 『原始佛敎之硏究』所收 法藏館)

 

단 별계의 연기설도 정계의 유지연기에 대한 보완설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카누마의 입장은, 갖가지 연기계열에는 각각 독자의 사유동기가 있고 개별적으로 추구되어 발달했다고 하는 와츠지 테츠로의 설과는 대립한다.

 

또 붓다의 교단을 구성한 4중衆, 즉 출가수행자인 비구, 비구니, 재가신자인 우바새, 우바이의 출신계층에 대한 조사 등은 실로 흥미 깊다. 아카누마는 니카야와 그 주석, 각종의 율, 대승경전, 율장 등을 조사하여 이름이 전해지는 자의 출신 바르나(종성, 카스트에 기반하는 신분)를 확정하고 있다(「석존의 4중에 대하여」 『原始佛敎之硏究』所收 前揭)

 

우리들은 이미 사이구사 미츠요시, 모리 소시森章司에 의한, 보다 세밀한 자료정리와 실증연구의 성과를 갖고 있지만(三枝 『初期佛敎의 思想』 東洋哲學硏究所, 森 「원시불교의 연기설에 대하여 ―그 자료정리―」 『中央學術硏究所紀要』第18號 등), 당시 아카누마에 의한 연기계열의 분류, 경전의 기술에 대한 실증적 분석 등은 획기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조사에 기초한 지견에 의거하여 그는 연기설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가설을 이끌어낸다. 제1장에서 후나하시 잇사이의 논고를 소개하는 형태로 거론한 초기불교에 있어 연기는 ‘유정수연기有情數緣起’와 ‘일체법인연생一切法因緣生의 연기’의 둘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2종연기설’을 처음으로 제창한 것도 아카누마이다.

 

이 두 개의 연기론은 태평양전쟁을 거쳐 전후 제2차연기논쟁에도 이어지며, 더욱이 현대의 연기설연구에도 연향을 미친다. 아카누마 치젠의 선구적 업적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2종연기설에 관해서는 다음의 제2차연기논쟁의 고찰에 있어, 후나하시 잇사이에 의한 전개를 보는 속에서 보다 세밀하게 다루기로 한다.

 

사이구사 vs 미야지 vs 후나하시 등 불교학자들의 논전


제2차 연기논쟁의 심층(1)

 

논쟁을 주도한 사이구사 미츠요시


[p.174-1] 제1차연기논쟁에서 리더의 역할을 한 사람은 기무라 타이켄이었다. 제2차연기논쟁에서 기무라와 같은 역할을 맡아 논쟁을 주도한 사람은 사이구사 미츠요시三枝充悳이다. 

이 ‘전후의 논쟁’이 제1차논쟁과 다른 점은, 본서 제2장의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등장인물이 모두 인도불교학, 초기불교를 전공으로 하는 연구자 즉 불교학자로서, 와츠지 테츠로와 같은 불교연구의 비전문가인 지식인의 참가가 없었다는 점이다. 『원시불교의 실천철학』은 와츠지의 박사논문으로, 그를 원시불교, 초기불교의 사상을 객관적인 시점에서 기술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사상사가로 본다면, 그 논쟁을 할 만한 충분한 전문성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비유해서 말하면, 헌법학자 사이에 오고간 헌법해석상의 논쟁에 법리학자가 법철학적 관점에서 개입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타분야의 학자에 의한 참견은 없었던 대신, 제2차논쟁은 쟁점이 명확하고, 논의주제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단 그러한 까닭에 불교학 내부의 논리정합성과 문헌학적 실증성을 둘러싼 논의에 지면이 할애되어 철학적인 깊이나 사상적인 폭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논쟁의 무대가 한정되어 있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중외일보中外日報>라는 종교전문의 신문을 그 무대로 하고 있다.

 

<중외일보>는 교토에 본사를 둔 중외일보사가 내는 신문. 일간이었던 때도 있었지만, 현재는 기본적으로 주2, 3회로 발행된다. 종교사상사가 마타니 루이코츠眞溪淚骨에 의해 1897년에 창간된 <교학보지敎學報知>를 전신으로, 1902년 지명을 현재의 <중외일보>로 바꾸었다. 당초는 종파에 관계없이 ‘불교의 각성과 종교계의 혁신’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불교전문지이었지만, 지명을 바꾸어 종교를 불문하고 ‘종교를 중심으로, 정치, 문학, 예술, 산업 그 밖의 내외 각 방면에 걸친 폭넓은 보도, 논평과 화제를 제공’하는 것을 의도한 종합종교문화지로 탈바꿈하였다.

 

총49차례의 논쟁

 

[p.175-9] <중외일보>에서의 논쟁은 사이구사 미츠요시, 후나하시 잇사이舟橋一哉, 미야지 카쿠에宮地廓慧 이 세 사람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한 사람 당 1회씩 2-9차례 논고를 게재하고, 이것을 세 사람이 돌아가며 반복했다. 그리고 최후로 사이구사가 반론과 통괄을 행한 뒤 마무리하였다. 먼저 그 내역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연기논쟁] 시리즈
(1) 三枝充悳 [상] 1978년 4월27일자 [중] 동년 5월2일자 [하] 동년 5월4일자
(2) 宮地廓慧 [1] 동년 9월14일자 [2] 동년 9월30일자 [3] 동년 10월5일자 [4] 동년 10월7일자 [5] 동년 10월10일자 [6] 동년 10월14일자
(3) 舟橋一哉 [상] 동년 11월30일자 [하] 동년 12월2일자
(4) 三枝充悳 [1] 1979년 3월24일자 [2] 동년 3월27일자 [3] 동년 3월29일자 [4] 동 년 4월3일자 [5] 동년 4월10일자 [6] 동년 4월 12 · 14일 합병호

 

[지상대론연기논쟁] 시리즈
(5) 宮地廓慧 [1] 동년 6월14일자 [2] 동년 6월16일자 [3] 동년 6월19일자 [4] 동 년 6월21 · 23일자 합병호 [5] 동년 6월26일자 [6] 동년 6월28일자
(6) 舟橋一哉 [1] 동년 6월30일자 [2] 동년 7월3일자 [3] 동년 7월5일자 [4] 동년 7월7일자

 

[긴급지상대론 연기논쟁] 시리즈
(7) 三枝充悳 [1] 동년 8월11일자 [2] 동년 8월14일자 [3] 동년 8월 16 · 18일 합 병호 [4] 동년 8월21일자 [5] 동년 8월23일자
(8) 舟橋一哉 [1] 동년 9월13일자 [2] 동년 9월15일자 [3] 동년 9월18 · 20일 합병 호

 

[긴급지상대론 속 · 연기논쟁] 시리즈
(9) 宮地廓慧 [1] 1980년 2월7일자 [2] 동년 2월9일자 [3] 동년 2월12일자 [4] 동 년 2월14일자 [5] 동년 2월16일자 [6] 동년 2월19일자 [7] 동년 2월 21일자 [8] 동년 2월23일자 [9] 동년 2월26일자
(10) 三枝充悳 [1] 동년 2월28일자 [2] 동년 3월1일자 [3] 동년 3월4일자 [4] 동년 3월6일자 [5] 동년 3월8일자

 

기간은 1978년 4월부터 1980년 3월까지 거의 만 2년에 걸쳐 전체 49개의 논쟁문이 게재되었다. 숫자만 보면 논의가 열정적으로 이어진 듯하지만, 신문의 게재로 1회분의 지폭이 엄격히 제한되어 총량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하 <중외일보> 지상의 논고를 가리키는 경우, 예를들어 사이구사의 1978년 4월27일자 최초의 기사라고 하면, (三枝<1>[상])이라 약기한다. 이 일련의 기사 즉 [상][중][하] 모두를 나타내는 경우에는 (三枝<1>)로 약기한다. 동일하게 후나하시의 1979년 7월3일 게재문이라면 (舟橋<6>[2]), 미야지의 1980년 2월7일자-동년 2월26일자까지의 일련의 9편의 논고 전체라면 (宮地<9>)이다. 표제 등은 적절히 필요에 따라 붙인다.

 

이 논쟁에 앞서 몇가지 책이나 논문을 ‘전사前史’로서 참조할 필요가 있다. 또 <중외일보>에서의 논쟁이 끝난 뒤, 당사자에 의해 쓰여진 문헌도 적당히 참조한다. 이것들은 논의를 전개하는 중에 소개하기로 한다.

 

사이구사가 쏜 첫 번째 화살

 

[p.177-12] 먼저 본 논쟁의 효시嚆矢가 된 사이구사가 쏜 첫 화살을 보기로 한다(三枝<1>). 바로 눈에 띄는 것이 「12인연설의 독단」이라는 큰 표제어이다. 더욱이 그 [상]의 지면에는, “석존의 깨달음을 ‘연기’라고 설하는 것에 강하게 반론한다”라는 중간의 표제어가 나타난다. 간단히 말해 도전적인 지면구성이다.

 

이미 본서 제1장에서 보았듯이 사이구사는 “석존=고타마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12지연기(12인연)의 이법理法을 깨달았다”라는 설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사이구사에 의하면, 『니카야』 등 초기불교의 자료를 정밀히 조사하면, “소위 연기설, 더욱이 그 원형이 되는 것, 혹은 적용 ・ 응용된 것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잡연雜然한지가 곧바로 판명될”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그것은 “연기설이 일정한 틀을 가진 연기설로서 확정되지 않았고, 극히 잡다했다고 하는 것이 명백해진다.” 하물며 12지연기 등은 연기설 전체의 거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것을 붓다의 성도내용으로서 나타내는 자료는 『쿠다카 니카야(소부)』에 실린 『우다나』, 『율장』의 <대품> 등 약간의 자료에 불과하다. 12지연기 등은 ‘희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까지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三枝<1>[상]).

 

사이구사가 유지연기有支緣起의 내용으로서 중시하는 것은, 성도기사가 아니라 ‘사색추구’의 과정부분이다. 제2장에서 인용한 『디그하 니카야』의 『대연방편경大緣方便經』이나 『상응부』12・20과 같이 “노사는 왜 있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그 원인을 추구하여 점점 거슬러 올라가 최종적으로 무명(근본번뇌↔근원적무지)에 이르는 과정 쪽이 현실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프로세스를 우이 하쿠주는 ‘자연적 순서’라고, 기무라 타이켄은 ‘왕관往觀’이라 부른 것, 더욱이 왕관의 쪽이 ‘박력이 있다’라고 한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평가도 소개하고 있다. 12지연기의 왕관(자연적순서)와 환관(역적순서)의 문제는 제2장에서 상세히 고찰했다.

 

차연성은 연기일반을 나타내지 않는다

 

[p.179-4] 더욱이 사이구사는 <1>[중]에서, 차연성의 내용을, 유지연기와는 독립한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연기라는 사상’의 표현으로 파악하는 사조를 딱 잘라 부정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면, 차연성의 내용은 다음의 2구로 나타난다.
“이것이 있을 때, 그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는 까닭에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을 때, 그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하는 까닭에 그것이 소멸한다.”
이 2구를 ‘연기라는 사상’으로서 ‘보편화’하는 설에 대한 사이구사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있을 때...’의 문구는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유지연기설(12인연설이 대부분)과 함께 나타나고, 앞의 문구만이 독립적으로 설해지는 일은 없다”(三枝<1>[중])

 

제1장에서 정리했듯이, 차연성의 내용은 12의 각 지분의 관계를 나타내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며, ‘이것’과 ‘그것’에 인접하는 두 개의 지분을 대입시키면, 12지연기의 일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을 나타내는데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것’에 무명을 대입시키고, ‘그것’에 행을 대입시키면, “무명이 있을 때, 행이 있다” 혹은 “무명이 없을 때, 행은 없다” 등의 4가지 구가 얻어진다. 이런 방식으로 12지연기의 무명과 행의 2항에 관한 순관과 역관이 얻어진다.

 

따라서 예를 들면, “괴로움이 있으면 즐거움이 있다”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혹은 “씨를 뿌리면 싹이 튼다”“꽃봉오리가 터지면, 꽃이 핀다”“한 몸 독립하여, 한 나라 독립한다” 등의 관계설을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다”의 구체적인 예로서 간주해서는 안된다. 요컨대 “이것이 있을 때”의 구는 연기일반을 정식화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유지연기의 관계를 정식화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곧 유지연기 없이 차연성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있을 때...”의 차연성의 내용을 가지고,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게 잘못’이다 라고 사이구사는 단정한다.(三枝<1>[중])
이 점에 대하여 사이구사의 논증은 흠 잡을 데가 없고 이견도 그다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에 이어지는 다음의 구절이 논쟁의 표적이 되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말하자면 공허한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를 가지고 무상이나 고, 무아 또 4제를 설명 해석하는 것 등은 완전히 어불성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三枝<1>[중])
그러면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는 원시불교, 초기불교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사이구사는 서둘러 “그렇지 않다”라고 덧붙인다.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는 연기라는 말로 명시되지 않더라도 개념으로서 서술되고 있다고 말한다.

 

“‘에 의해’를 포함하는 어・구・문, 그리고 나아가서 명사의 격어미변화로 ‘에 의해’를 나타내는 어・구・문등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그와 같은,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의존해 있다’‘의해 … 한다’라는 말하자면 의존관계에 있는 것을,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三枝<1>[하])
이와 같이 사이구사는 12지연기와 차연성의 세트를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와 구별하고, 쌍방을 긍정한다.

 

그런 바탕 위에 양자 모두 일방적인 의존관계이며, ‘상의로 확대해서는 안된다’라고 유보를 붙인다. 또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를 인정하더라도 ‘무상, 고, 무아, 4제 등의 설명에 그것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고 있다. 유지연기와 차연성이든, 연기사상 일반이든, 다른 불교의 중핵적인 교의인 고나 4제, 무상론과 무아설은 연기에 의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三枝<1>[하])

 

사이구사의 다섯 가지 테제

 

[p.182-2] 이 일련의 기사에 사이구사가 제기한 모든 것이 나타나고 있는 까닭에 그것들을 정리해 둔다.

(A) 12지연기는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이 아니다.
(B) 12지연기로 대표되는 유지연기에 붙어있는 차연성의 내용은 연기설 일반을 형식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유지연기에 있어 서로 인접한 2지 사이의 생기와 소멸의 인과관계를 정식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C) 일반적 연기설(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은 12지연기나 차연성과는 별개로 제시된다.
(D) 유지연기・차연성도, 일반적 연기설도, 일방향의 의존관계를 나타낼 뿐 상호의존의 관계는 나타내지 않는다.
(E) 유지연기・차연성도, 일반적 연기설도, 무상, 고, 무아, 4제 등의 불교 기본교리의 기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이구사의 설을, 제2의 논자로서 <중외일보>의 무대에 등장한 미야지 카쿠에는 거의 인정한다.

 

미야지 카쿠에의 모티브론

 

[p.183-1] 단 미야지가 강하게 고집한 것이 ‘석존 깨달음의 독자성’이다. 확실히 12지연기는 붓다 깨달음의 내용을 설한 것은 아니지만, 그 깨달음의 성격, 의의 또는 덕용德用을 설하고 있다고 말한다(宮地<2>).
깨달음의 성격, 의의, 덕용이란 무엇인가.
“원시불교의 연기설은 ‘무명’ 즉 불교적 예지叡智의 결여에 의해 ‘노사우비고뇌민老死憂悲苦惱悶’이 결과로 따르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하는 것으로, 그것이 유지연기설 전체에 공통적인 근본 모티브이다.”(宮地<2>[2])

 

무명과 고의 필연적인 관계를 설하는 것이야말로 연기설의 근본의도로서, 미야지에 의하면 “‘무명’이야말로 ‘고뇌’의 근원 ― 따라서 ‘명’이야말로 ‘정락淨樂’의 근본 ― 이라는 기본원칙”에 투철해 있다고 하는 것에 안목이 있다.
미야지의 방법은 자료에 기초한 엄밀한 문헌학적 추정보다도 연기사상의 동기나 진의, 실로 ‘모티브’를 중시하여 그것을 개발하고, 어느 정도 그 깊이를 얻은 지견에 기초하여 다시 경과 논의 해석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기의 이시異時, 동시同時에 관한 문제를 고찰하는 가운데, 동시적 관계因果俱時를 승인하고, 그것을 승인한 이상, “소위 ‘논리적’ 해석의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된다”라고 말한다(宮地<2>[3]).

 

그리고 나아가 동시적 해석을 더욱 깊이 고찰하여 연기설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넓혀간다.
“특히 동시연기에 있어서 역관의 의미는 중시해야 할 것이다. ‘무명’이 소멸하여, 그것에 동시연기하고 있던 일체의 지 ― 행・식 내지 고뇌 ―의 ‘의미’가 동시에 소멸한다는 것은, ‘고뇌’의 세계를 지탱하는 모든 것이 일시에 그 의미를 잃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명’의 경지와 ‘명’의 경지가 상호배제하는 관계가 인정된다.”(宮地<2>[4])

 

매정한 ‘반론의 반론’

 

[p.184-8] 이러한 미야지의 비문헌학적인, 원시불교, 초기불교의 문전에 머무르지 않고, 아비달마나 대승불교의 연기교설도 시야에 둔 철학적인 추론은, 문헌학적인 실증을 중요한 원칙으로 하는 사이구사에게 있어서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의 실증과 언급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초기불교의 연기설’이며, 미야지와 같이 자료를 정독하여 그 넓이나 깊이를 확인하고, 사상의 핵심이나 발전성을 취하고자 하는 시도는 적어도 학술적인 지의 방식으로서는 정도正道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이구사의 ‘반론의 반론’은 실로 매정하다. 예를 들어 미야지가 강조하는 ‘무명과 고뇌의 필연적인 관계’에 대하여, 12지연기의 무명의 지분이 3지-10지의 유지연기에는 없는 것을 들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고의 추구’를 근본 모티브로 한다는 의견은, 나도 졸저에서 반복해 기술했듯이 적극 찬성한다”“그러나 ‘무명과 고뇌의 관계’라는 것은, 아무리 주장하고 싶어도, 무명이 존재하지 않는 장에서는 불가능하며, 결국은 역시 12인연설 그 자체와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된다.”(三枝<4>[3])
미야지 논설의 의도를 깊이 읽은 후의 반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료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일견 그 기술과 모순된 논술을 신경질적으로 배척하는 모습이다. 이 논쟁에 있어 사이구사는 이러한 자세를 일관해 유지한다. 보는데 따라서는 매우 무뚝뚝한 모습의 대응이라고 할 수있다.

 

사이구사의 완고한 자세

 

[p.185-12] 미야지 카쿠에도 사이구사의 너무나 완고한 비평태도에 쩔쩔매는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자신이 말하는 ‘무명’은 특히 12지연기의 지분으로서의 무명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맥락에서는 일반개념으로서 ‘무명’을 사용하거나, 더구나 “대부분의 경우, ‘불교적 예지의 결여’라는 설명어를 병기해둔 이유”라고 반박하고 있다. ‘부지성법不知聖法’이나 ‘불여실지不如實知’의 의미라고 한다(宮地<5>[3]). 이것은 전장에서 본 와츠지 테츠로의 무명론과 동일하다.

 

“요컨대 ‘불교적 예지의 결여’가 ‘고뇌’의 근원이라는 주장이, 각종의 유지연기계열을 일관하는 근본 모티브라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 뒤, 무명의 지분이 “3지-10지의 유지연기에는 없는 것”이라는 사이구사의 비판을 역이용해, “그렇다면 박사가 ‘적극 찬성’이라고 하는 ‘고의 추구’라는 근본모티브도, 적어도 12연기설에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하면 좋을까요?”라고 되받아 치고 있다(宮地<5>[4]).

 

사이구사의 ‘객관적인’ 논의에도 독특한 편향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는 이다파차야타에 대하여 집요하게 ‘유지연기’라는 역어를 붙이려고 한다. 후에 가지야마 유이치梶山雄一는 이 사이구사의 태도를 “이것이 있을 때...”라는 구절의 비독립성, 비추상성을 강조하기 위해 “너무 힘이 들어간 나머지 이것을 ‘유지연기’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라고 평했지만(「연기설 논쟁 ― 죽음에 이르는 병 ―」 『東洋學術硏究』 製20卷第1號), 미야지도 이 점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다.

 

“박사는 idam〔此〕 = 지(支, anga) 로 보고, idapaccyatā = bhāva-anga =지연기 =유지연기로 보고 계신 듯하지만, 이것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언어학적 근거가 있는 것인가”(宮地<5>[4]).
후나하시도 동일하게 비판하고 있다.
“‘유지有支’라는 말은 불교의 술어로서 어느 정도 정착한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 범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곧 bhāvānga를 연상합니다.”“당신은 idam이 ‘유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유지연기’라고 번역한 것이지만, 이것은 당신의 해석으로, 가령 그 해석이 옳다해도 역어로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舟橋<6>[4])

 

이미 서술했지만, 이다파차야타의 직역은 ‘이것을 연으로 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유지연기’라는 역어는 나올 수 없다. 미야지, 후나하시가 표명한 위화감은 당연하다. 이 ‘차此’가 한결같이 지분을 가리킨다는 전제를 인정하고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상당히 어려운 의역인 것이다.


더욱이 실용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만약 이 말이 채용되면, 12지연기 10지연기, 5지연기, 3지연기 등 지분을 요소로 하는 각 연기를 총칭하는 경우의 ‘유지연기’와 구별을 할 수 없게 된다. 분명히 적절성을 결한 역어일 것이다. 다행히 세월의 흐름 속에 자연히 사이구사의 안은 사라지고, 차연성이라는 역어가 정착했다. 본서도 이 용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하나의 일에 머물지 않고, 논전 전반에 걸쳐서, 사이구사의 ‘너무 힘이 들어간’ ‘…에 이른’ 류의 표현이 눈에 띄고, 조금씩 정상괘도를 벗어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일반의 지상紙上이라 해도 학자간의 학술적 논쟁의 장에서, 왜 그는 이렇게 초조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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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전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편집이사, <실담자기초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글익는들, 2004)), <을유불교산책>(정우서적, 2006),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앙>(불교시대사, 201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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