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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아뢰야식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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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19 년 9 월 [통권 제7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37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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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불교학자 ‧ 유식

 

『고경』 76호에서 제로0[=空]의 대 발견에 버금가는 것이 ‘아뢰야식의 발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뢰야식의 글자적인 의미인 ‘저장ālaya’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즉 아뢰야식은 우리가 행위한 결과인 모든 종자를 저장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장’에는 3가지 측면[삼장三藏]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뢰야식의 저장 기능에는 3가지[능장, 소장, 집장]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관련 구절을 살펴봅시다. 법상종의 소의 논서인 <성유식론>에서 삼장三藏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뢰야식은 저장하는 마음이다

 

“초능변식[아뢰야식]은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에서 아뢰야<식>[저장하는 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식은 능장, 소장, 집장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능장과 소장의 의미는> 잡염<법>[선, 악, 무기]과 더불어 서로 조건이 되기 때문이고, <집장의 의미는> 유정이 <아뢰야식을> 자기 내면의 자아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주1)

 

또한 감산덕청 스님은 삼장[능장, 소장, 집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뢰야식은> 3가지의 저장[삼장三藏]한다는 의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장식’이라고 한다. ‘삼장’이란 능장, 소장, 아애집장을 <말한다.> 앞의 7식(전오식, 의식, 말나식]이 무량의 시간동안 선업과 악업을 행한 종자습기를 오직 이 식[아뢰야식]만이 저장할 수 있다.(능장) <또한> 앞의 7식[전오식, 의식, 말나식]이 지은 이숙의 과보[업종자]는 오직 아뢰야식만이 저장되는[소장所藏] 장소[처處]가 된다.(소장) <또한> 말나식이 이것[아뢰야식]을 자아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아애집장이라고 한다.”(주2)

 

인용문을 바탕으로 삼장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능장입니다. 능장能藏이란 아뢰야식이 행위의 결과인 종자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능동적인 측면을 말합니다. 즉 아뢰야식이 능동적으로 종자를 훈습熏習하여, 그 종자를 계속 보존‧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아뢰야식이 종자를 품는 주체라고 한다면 종자는 아뢰야식에 품어지는 객체입니다. 이것을 능동과 수동으로 나눈다면 아뢰야식이 능동이고, 종자는 수동이 되는 것입니다. 감산 덕청스님의 주석대로 아뢰야식과 7가지 식과의 관계로 설명하자면, 능동적 측면은 아뢰야식이고 수동적 측면은 7가지 식입니다.

 

소장所藏이란 아뢰야식의 수동적인 측면을 말합니다. 여기서 능동적인 측면은 7가지 식(전오식, 의식, 말나식)이고, 수동적인 측면은 아뢰야식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 활동하는 7가지 식은 종자를 전부 인격의 심층[아뢰야식]으로 던져 넣습니다. 즉 7가지 식이 능동의 입장이고, 반대로 아뢰야식은 7가지 식으로부터 던져 오는 종자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입장[所]입니다. 이처럼 던져지는 것은 종자라고 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인격의 근저[아뢰야식]에 머물게 하는 것을 아뢰야식에 훈습된다고 표현합니다.

 

집장執藏이란 아뢰야식이 집착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아뢰야식이 말나식에 의해 자아라는 집착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산 스님은 아애집장我愛執藏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집착하는 능동[능能]의 입장은 말나식이고, 반대로 집착되는 측면인 수동[소所]의 입장에 있는 것은 아뢰야식입니다.


이처럼 아뢰야식은 능장‧소장‧집장의 3가지 측면, 즉 ‘저장’(藏)의 의미가 가장 강한 마음입니다. 인간의 행위에 한정해서 설명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소질‧능력‧경험을 인격의 근저[아뢰야식]에 새겨 계속해서 보존하고, 그 보존‧유지되고 있는 종자를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인생이 전개됩니다. 이 측면을 능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능동과 수동으로 구분하면 아뢰야식은 ‘수동[所]’의 성질이 강한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뢰야식은 원인과 결과가 다른 마음[이숙식]이다

 

아뢰야식의 또 다른 명칭으로 이숙식이 있습니다. 이숙이란 범어 ‘비파카vipāka’의 한역으로, ‘이전의 원인과 나중의 결과가 다르게 익는다[성숙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의 원인이란 과거의 행위이고, 성숙한 결과는 아뢰야식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과거의 행위는 선이나 악이지만, 결과로 생긴 아뢰야식은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인시선악因是善惡 과시무기果是無記’라고 합니다. 즉 선악에 대한 인간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사람의 인격은 형성되지만, 그 결과로 결실한 자기, 즉 현재의 자기는 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기’라는 것은 선인지 악인지 나타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비선비악非善非惡이기 때문에 현재의 자기는 선악 어느 쪽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마음이 선하다고만 한다면, 선한 마음에서 어떻게 악이 나오는가? 반대로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한다면, 선한 행위의 근거는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쁜 인간이 갑자기 선한 사람으로 변하거나 또는 착한 사람이 갑자기 나쁜 사람으로 변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인간의 이해에 대한 논리적인 정합성을 가진 무기가 답변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무기이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만약 인간이 본래적으로 선악의 성질을 가졌다고 한다면, 선악 또는 회심‧타락 등의 서로 모순되는 행위에 대한 근거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 아뢰야식을 파악할 때, 이것을 ‘이숙식’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과거를 끊어버리고 살아갈 수 없으며, 어떤 의미로든 과거를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뢰야식은 종자를 받아들여 성장‧변화시키는 마음[일체종자식]이다.

 

아뢰야식은 ‘일체종자식’이라는 또 다른 명칭이 있습니다. 즉 ‘일체 종자를 가진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뢰야식은 현행하고 있는 마음인 의식이나 말나식으로부터 던져지는 종자를 받아 보존하고 유지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훈습熏習’한다고 말합니다.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라고 합니다. 이 의미를 현장스님은 <팔식규구>에서 ‘수훈(受熏, 훈습되다)’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아뢰야식은 수동적으로 종자를 받아들이는 훈습, 즉 수훈의 역할과 아뢰야식 안에서 훈습된 종자가 조건이 맞아 말나식이나 의식으로 나타나게 하는 능동적인 역할, 즉 가훈(可熏, 훈습하다)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능동적인 역할을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아뢰야식에 훈습된 종자는 조건이 맞으면 구체화되어 7가지 식으로 현행現行합니다. 즉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나식이나 의식이 행위한 결과물인 종자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여 변화합니다. 이것을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라고 표현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행위는 아뢰야식에 보존되어 있는 종자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자식은 미래와 관계하는 마음의 측면을 설명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제 8식은 현재와 관계하면서 행위한 결과인 종자를 저장하는 아뢰야식, 과거와 관계하면서 무기인 이숙식, 미래와 관계하면서 모든 것을 생기시키는 종자식의 기능을 가진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아뢰야식을 불변하는 자아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아뢰야식은 드러나지 않는 상태로 찰나멸하면서 상속하는 잠재의식[심층의식]입니다.

 

아뢰야식은 생명을 보존하는 식[아타나식]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뢰야식의 또 다른 명칭인 아타나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타나阿陀那란 ‘유지하다‧보존하다’는 의미로, 범어 ‘아다나ādāna’의 음사입니다. 그래서 아타나식을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식’ 또는 ‘집지식執持識’이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근본식인 아뢰야식은 일체 존재를 생기게 하는 종자와 감각기관을 유지하며 동시에 또 다시 재생할 때 상속하여 이어가는 식이기 때문에 아타나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유식론>에서는 아타나식을 “능히 제법의 종자를 ‘집지’하고, 능히 색근[승의근]과 의처[부진근]를 ‘집수’하며, 능히 결생과 상속을 ‘집취’하기 때문에 이 식을 아타나식이라고 한다.”(주3)고 정의합니다. 이처럼 아타나阿陀那는 ‘집지執持’, ‘집수執受’, ‘집취執取’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아타나식은 종자를 집지하고 모든 색근을 파괴시키지 않고 <유지한다.>”(주4)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친보살의 저작인 <대승오온론>에서도 “능히 몸을 집지(執持, 잡아 간직하여 유지하다)하기 때문이다.(即此亦名阿陀那識, 能執持身故)”고 하였으며, 범본에서는 “또한 그것은 신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다나식[아타나식]이라고도 한다.(ādānavijñānam api tatkāyopādānam upādāya)”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파다나upādāna’를 ‘받아 들인다’라고 해석했지만, ‘확실하게 붙잡다, 독점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타나식은 ‘신체를 확실하게 붙잡아 일정하게 유지하게 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아뢰야식의 또 다른 명칭에 무몰식無沒識이 있습니다. 이 명칭은 진제스님의 번역입니다. 진제스님은 아뢰야의 원어 ‘ālaya’를 ‘a無-laya沒’로 파악하여, ‘빠뜨림이 없는 식, 없어지지 않는 식, 모든 것을 기억하는 식’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심어진 종자는 결코 소멸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에 행한 행위의 결과는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과거의 행위는 어딘가에 침잠하여 있는 것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반드시 유지하고 보존하는 심층의 마음을 진제스님은 무몰식이라고 했습니다.(주5) 이상으로 제 8식[아뢰야식]의 다양한 명칭을 소개하여, 그 속성이나 작용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어려운 용어가 등장해 읽기 힘든 부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namaste!

 

주)
(주1) <성유식론>, T31, 7c20, “初能變識大小乘教名阿賴耶. 此識具有能藏所藏執藏義故. 謂與雜染互為緣故. 有情執為自內我故.” 

(주2) <팔식규구통설>, X48, “以具三藏義故. 名為藏識. 三藏者. 能藏. 所藏. 我愛執藏. 以前七識. 無量劫來善惡業行種子習氣. 唯此識能藏. 前七識所作異熟果報. 唯八識是所藏之處. 由第七識執此為我. 故云我愛執藏.”
(주3) <성유식론> 3권, T31, 14c07, “以能‘執持’諸法種子. 及能‘執受’色根依處. 亦能‘執取’結生相續. 故說此識名阿陀那.”

(주4) <성유식론> 3권, T31, 13c, “或名阿陀那. 執持種子及諸色根令不壞故.”

(주5) T43, 729b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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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불교학자. 유식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마음공부 첫걸음』·『왕초보 반야심경 박사되다』·『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마음의 비밀』·『유식불교, 유식이십론을 읽다』·『유식으로 읽는 반야심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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