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산책]
이 숲속으로 더디 돌아온 것이 한탄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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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기 / 2019 년 9 월 [통권 제77호] / / 작성일20-06-27 17:26 / 조회6,980회 / 댓글0건본문
백원기 |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문학평론가
백곡처능(1619-1680)은 부휴선수(1543-1615)의 7백여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벽암각성(1575-1660)의 법을 전해 받았다. 시와 문사에 있어 유려하고 호방하며 탈속한 면모를 보여 주었던 선사는 누구보다 자연을 사랑했고, 승속의 거리를 두지 않았으며 친화력으로 세간의 사람들과 교유했다. 특히 선사는 척불의 시기에, 8,150 자에 이르는 상소문 ‘간폐석교소’를 올려 불교가 국가통치에 유해하지 않음을 조목조목 밝혀 척불의 부당함과 시정을 간청했다. 불교탄압에 굴하지 않고 홀로서라도 맞서 불법을 지켜내겠다는 선사의 비장함은 산문을 나서 만나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잘 묘사되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산문을 나오는데 보보출산문步步出山門
새가 울고 꽃은 시냇물에 떨어지네 조명화락계鳥鳴花落溪
골안개 자욱하여 가는 길 희미하고 연사거미로烟沙去路迷
천봉에 내리는 빗속을 홀로 서 있네 독립천봉우獨立千峯雨
산문을 나오니 꽃잎 지고 새가 울고 있다. 그런데 세상을 돌아보니 임금과 관리는 불교를 탄압하고 있다. 부처를 찾는 백성들의 소리는 외면할 수 없다. 하여 선사는 탄압에 굴하지 않고 외로이 법등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그것은 골짝의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고, 비 내리는 수많은 봉우리 속에 홀로 서 있는 모습에서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불교 교단을 지켜내려 했던 선사의 응결된 호법의지가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잘 드러나 있다.
불교탄압에 맞서 법등지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깊고 그윽한 산속이나 전망이 트인 높은 지대, 우뚝 솟은 바위와 하늘에 닿을 듯한 암자와 대臺 등은 속세를 떠난 공간이다. 이러한 고소지향성은 수도자의 상승적인 정신적 경지와 맞물려 있다.
임수대에서 물을 가까이 마주하고 앉아 임수대전임수좌臨水臺前臨水坐
서운산 위에 돌아가는 구름을 바라보네. 서운산상망운귀棲雲山上望雲歸
물은 절로 맑고 푸르며 구름은 절로 희니 수자징청운자백水自澄淸雲自白
나에겐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다네. 여오무시역무비與吾無是亦無非
선사에게 자연은 단지 대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연과 합일을 추구하는 이상이며 그 자신의 해탈의 경계이다. 선사의 이러한 수행과 깨달음의 과정은 임수대에서 물을 가까이 하고 서운산 위를 유유히 흘러가는 흰 구름을 보고 선심을 다지는 모습에서 잘 묘출되고 있다. 구름은 절로 맑고 푸르고 구름은 절로 희다. 이렇듯 자연의 이법은 변함없이 자재로울 뿐이다. 여기에는 집착하는 소견이 없으니 시비를 가릴 문도 없다. 하여 자연과 더불어 무소득의 청정심으로 살아가는 산승에겐 더 이상 번뇌 망상에 시달릴 필요가 없고 옳고 그름도 없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각성이 수행의 중요한 덕목이다. 억불 속에서도 많은 스님들이 계율을 지키거나 수행을 게을리 하고 편을 갈라 비방하며 권력다툼을 하였다. 선사는 이런 불교계의 상황을 통탄하고, 특히 수행자들에게 정분에 얽혀 어지러운 세상사에 휘둘리지 말고, 항상 ‘세치 혀’의 놀림을 조심하며 뜬 구름 같은 영욕을 멀리하여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정은 고불고불 겹겹이라 양의 창자와 같고 인정곡곡중중사양장人情曲曲重重似羊腸
세상일은 어지럽고 시끄러워 광풍과 같네 세사분분요요여광풍世事紛紛擾擾如狂風
비방, 칭찬, 시비는 세 치 혀를 놀리는 것 뿐 훼예시비지도삼촌설毁譽是非只棹三寸舌
슬픔, 기쁨, 영욕은 한바탕 꿈에 불과하네 비환영욕료부일몽장悲歡榮辱聊付一夢場
인간 세상은 마치 양의 창자처럼 숱하게 꼬인 정분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때문에 늘 어지럽고 시끄러우며 광풍이 불고 지나가는 것처럼 한바탕 소동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선사는 비방과 칭찬을 하고 시비를 따지는 것은 늘 ‘세치 혀’의 놀림에서 비롯됨을 역설한다. 세치 혀야 말로 인생을 좌우하는 보검인 동시에 흉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현실에 집착하여 생기는 모든 슬픔과 기쁨, 영욕은 한바탕 꿈에 불과한 것이기에 수행자들은 이를 경계해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
선사는 산문이라는 탈속적 공간을 중심으로 청정한 수행을 통해 출가자의 본분사를 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산사의 생활은 인위적인 소리보다는 자연의 소리가 주를 이룬다. 하여 자연의 소리 가운데서 평온함을 찾고, 이어 자기 내면에서 울려오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 선사는 산사에 사는 즐거움을 이렇게 읊고 있다.
실바람은 때맞춰 그 소리를 보내와 미풍시송음微風時送音
봄꿈 속에 빠진 내 넋을 위무하도다 위아춘몽혼慰我春夢魂
괄괄한 소리에 대숲은 시끄럽고 괄괄훤죽간聒聒喧竹幹
냉랭한 샘물 흘러 그 소리 차가워라 냉냉동천원冷冷動泉源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기뻐하노니 자가이자열自歌而自悅
내 노래 알아 줄 이 어찌 찾겠는가 지음하필론知音何必論
솔바람 소리는 그대로 자연이 주는 화음和音이다. 그 화음이 덧없는 꿈속에 빠진 화자의 영혼을 일깨워 주고 달래어 준다. 거기에 대나무 가지가 부딪혀 나는 소리와 샘물이 솟구쳐 흐르는 소리는 화자를 성성적적의 경지로 이르게 한다. 무엇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 없고, 자연의 화음에 흥이 절로 나서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기뻐한다. 그러니 굳이 사람을 불러 함께 듣자고 부탁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자연과 내가 마음으로 교감하고 있는데 지음知音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일 뿐인 것이다.
이처럼 선사는 세속의 모든 일을 초월하여 산중에 홀로 자연과 벗 삼아 살아가고 있다. 인적 드문 산사에서 수행하는 것은 세상의 번다한 일, 번뇌 망상을 여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탈속한 삶은 종일토록 뜬구름이 떠다니다가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만고에 뛰어났던 사람들이 얻고 잃음에 따라 시비가 많았는데, 그 모두가 뜬 구름 쫓은 것임을 말하는 시에서도 명징하게 드러나고 있다.
모두가 날아가는 뜬구름을 쫓았지 진축부운비盡逐浮雲飛
뜬구름은 본래 자취가 없는 것 부운본무적浮雲本無跡
나는 구름과 더불어 서로 의지하네. 아여운상의我與雲相依
손에는 대나무 지팡이가 있고 수중도죽지手中桃竹枝
몸에는 칡덩굴로 지은 옷을 걸칠 뿐. 신상벽라의身上薜蘿衣
모두가 날아가는 구름을 쫓고 있지만 뜬 구름 자체는 본래 실체가 없다. 하지만 산중에서 무심하게 살아가는 선사는 구름과 서로 의지하여 지내고 있다. 이러한 무욕의 삶은 손에 들고 소요하는 대나무 지팡이와 몸에 걸친 ‘벽라의’로 한결 잘 표상되고 있다. ‘벽라의’는 덩굴식물인 여라의 잎과 줄기로 만든 옷이라는 뜻으로, 흔히 은자隱者의 행색을 의미한다. 진여의 맑음은 어디에나 있다. 이 맑음을 한껏 누려보는 산사의 경계, 대상과 나를 완전히 잊게 한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잊고 난 뒤의 기쁨이다. 이것이 법열이다.
뜬구름은 본래 자취 없는 것
무욕의 청정무구한 그 마음자리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룬 무심의 세계가 펼쳐진다. 시비 많은 세속을 결별하고 임천林泉에 은거하며 청빈하게 살면서 승려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하였던 선사는 ‘숲속으로 더디 돌아온 것이 한탄스럽다’고 노래한다.
세상 밖이라 영욕은 적은데 물외소영욕物外少榮辱
인간 세상에는 어이 그리 시비가 많은가? 인간다시비人間多是非
늙은 몸이라 적막함도 달갑게 여기지만 백두감족막白頭甘寂寞
이 숲속으로 더디 돌아온 것은 한탄스럽구나. 임하한지귀林下恨遲歸
그윽한 산중에 사는 흥[유거견흥幽居遣興]이 이렇게 그려지고 있다. 덧없는 영욕을 쫓느라 인간세상은 시비가 그토록 많지만, 산중은 세상 밖이라 영욕이 적다. 비록 산도 깊고 물도 깊은 산사에 찾아오는 사람 없어 적막함도 달게 여기지만, 선사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라 오는 이 유현한 기쁨을 즐긴다. 그래서 좀 더 일찍 세간을 떠나 숲속으로 들어오지 못했음을 한스러워 하고 있다. 어쩌면 숲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자 안식처이기 때문일 것이다. 속진을 멀리하고 산으로 들어오니 온갖 염려가 해맑게 씻겨 지고, 마음이 평온하여 걸림이 없는 선사의 성성적적한 삶은 우리를 또한 그런 경지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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