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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논쟁 / 사이구사 · 미야지 · 후나하시 등의 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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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19 년 10 월 [통권 제78호]  /     /  작성일20-05-29 10:23  /   조회7,09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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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역자주 : 본 번역은 미야자키 데츠야宮崎哲弥의 『불교논쟁佛敎論爭―‘연기緣起’에서 본질을 묻는다』(ちくま新書[1326], 筑摩書房, 2018,5)의 내용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본서 및 본 번역의 의도 등에 대해서는 고경 74호 「서두」 참조. 

 

 


 

 

 제2차연기논쟁의 심층(2)

 

 사이구사에 의한 후나하시 논박

 

 사이구사 미츠요시의 자세는 후나하시 잇사이에 대해서도 전혀 변함이 없다. 후나하시와 사이에 주요한 논점은 (A)“연기설은 무상의 근거일 수 있는가?”, (B)“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은 ‘유정수연기’와 ‘일체법인연생의 연기’의 두 방면이 인정되는가?”로 집약된다. 물론 (A)(B)는 후나하시에게 있어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후나하시는 <중외일보>에서의 논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 1952년 출간한 저서 『원시불교사상의 연구』(法藏館)에서 “연기인 까닭에 무상이다”라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사이구사는 논쟁 개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상재한 저서 『초기불교의 사상』(東洋哲學硏究所, 후에 第三文明社 レグルス[레구루스]文庫)에서 후나하시의 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중외일보>에서의 사이구사, 후나하시의 논쟁은 앞의 전단계를 거친 상태였다.   (A)와 관련된 논쟁을 개관함에 있어, 먼저 『원시불교사상의 연구』(법장관)에 나타난 후나하시의 논지를 개관해 보자.

 후나하시는 『니카야』 등의 원시경전, 초기경전을 세밀히 조사하여도 “무상의 논리적 근거는 끝내 추구되고 있지 않다”라고 먼저 서술한다. 그러나 왜 무상인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소홀히는 할 수 없다. 그래서 후나하시는 무상의 논리적 근거는 연기에 있다고 판단한다. 여기에서 소위 연기란 무엇인가.

 

“‘모든 것은 다양한 갖가지 조건에 한정되어(이것이 ‘緣’의 의미이다), 임시로 그와 같은 것으로서 성립하고 있다(이것이 ‘起’의 의미이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조건이 변하면, 그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변화하는 것으로, 그 변화하는 것을 무상이라고 한다. 곧 다시 한 번 더 말하면, 고정불변하지 않는 것이 무상이다.”(『원시불교사상의 연구』)

 

“그와 같이 일체법이 변화하는 것에 대하여,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연기설이 그 논리적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으로부터 연기설과의 관계에서도 이 무상이라는 것이 변화를 나타내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곧 사물은 조건에 의해 성립하는 (즉 연기하고 있는) 것인 까닭에, 조건에 따라 사물은 어떠한 것으로도 변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연이생법(緣已生法, pratītya-samutpanna, 즉 조건에 의해 성립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또 ‘무상’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舟橋, 前揭書)

 

사이구사는 후나하시의 이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앞서 인용의 핵심을 이루는 “사물은 조건에 의해 성립하고 있는 (즉 연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그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변한다”라는 명제를 달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것[가령 A]은 조건[가령 B 또는 BC]에 의해 성립하고 있기 때문에, 조건[B 또는 BC]에 따라, 그 사물[A]은 어떠한 것으로도 변한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면[편의상 사물=A, 조건=B로 한다], A는 B에 의해 성립하고 있기 때문에, B가 변화하면 A는 당연히 변화한다는 것이 된다. 또 이 문장에서 변화를 무상으로 바꾸면, A는 B에 의해 성립하고 있기 때문에 B가 무상이라면 A는 당연 무상이다는 것이 된다.” - (『初期佛敎の思想』下, レグルス文庫版)

 

  한번 읽으면 분명하지만, ‘변화’든 ‘무상’이든, 사물 A와 조건B(C…,이하 생략)와의 관계성을, 즉 연기를 원인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단순히 B에, 나아가 A에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 논리로 “연기인 까닭에 무상이다”라는 설명을 붙일 수 있는 것인가.

 사이구사는 이 점을 용서 없이 논파한다.

 

 “‘변화’ 또는 ‘무상’에 관하여 말하면, 여기에서 A가 B에 조건지워져 성립하고 있다고 하는 것, 즉 연기라는 것은 말하자면 밀려나온 것으로, 전혀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을 거꾸로 말하면, 더욱 분명하다. 즉 A가 완전히 B에 한정되어 의존해 성립하고 있는=연기하고 있는 경우에도, 만약 B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A는 변화할 수가 없고, 또 B가 무상하지 않다고 한다면, A도 또 결코 무상일 수 없다.”(三枝, 前揭書)

 

 요컨대 후나하시의 도식에서는, 무상은 “B에, 나아가서는 A에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끝나 버린다. 사이구사도 같은 책에서 “그 B의 변화―무상은 그렇다면 어디에선가 나타난 것인가. 이것은 정말로 당돌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前揭書)라고 논하고 있지만, 이 비판은 정당하다.

 단지 후에 가지야마 유이치(梶山雄一)나 무라카미 신칸(村上眞完)에 의해 지적되지만, ‘변화하지 않는 B’, ‘무상하지 않는 B’란 단적으로 ‘실체’라고 불려지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사이구사씨는 앞서 소개했듯이, 만약 B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A도 변화하지 않는다고 논하여 후나하시씨의 연기→무상을 부정했지만, 거기에서 사용한 ‘변화하지 않는 B’라는 것은 실체 이외에 어떠한 것도 아니다.”(梶山 『緣起說論爭 ―死にいたる病―』前揭)

 

 만약 실체라는 개념을 논증의 매개로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7세기 중엽 대승불교의 학장 다르마키르티에 의한 실체 부정논증을 준용하여, “만들어 진 것, 연기된 것은 순간적 존재 즉 무상한 것이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지야마는 말한다.(梶山, 前揭論文)

 

 또 무라카미 신칸도, B에 관하여 “무상이 아닌 조건(즉 영원불변한 조건)이라는 상정은, 단순한 상정, 상상으로서는 가능하더라도, 초기불교의 사고법 중에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사이구사의 전제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연기설과 무상설과 다원론적분석적 사고법(1)」『佛敎硏究』第29号)

 

 무한후퇴하는 후나하시의 설

 

 더욱더 후나하시는 “조건이 변화하면, 그것에 연하여 성립하는 것도 변화한다.”라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내가 ‘사물은 조건에 의해 성립하고(즉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그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변한다’라고 했을 때, 구체적으로는 어떠한 것을 가르키는가.”“어떠한 이유에서 인간의 심신은 변화하기 쉬운 것인가 라고 한다면, 이 심신을 성립시키는 다양한 갖가지 조건이 일정불변하지 않기 때문이다.”(舟橋<3>[하])

 

 부연하면, 연기를 ‘갖가지 조건에 의해 생기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예를 들면 A라는 사물은 B, C, D, E…의 ‘다양한 갖가지 조건’에 의해 성립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들 B, C, D, E…의 갖가지 조건의 존재방식은 무상이다. 각각 ‘일정불변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이것들 무상한 갖가지 조건에 의해 성립하는 A는 무상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이유라면 각각 무상한 조건B와 조건C, 조건D, 조건 E 등이 연기한 결과로서 A의 무상이 있는 것같이 보인다. ‘연기→무상’의 인과관계가 논증된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더욱 “그것들 조건B, C, D, E…가 무상인 원인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조건B…를 성립시키는 갖가지 조건이 무상인 까닭에”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즉 이 설명은 단적으로 무한후퇴에 빠지는 것이다. 

 

  반격하는 후나하시 잇사이 

 

  사이구사의 논난에 대하여 후나하시는 『니카야』의 내용을 인용하여 반론한다.

 

“‘무상’과 ‘유위’와 ‘연이생’이 동의어로서 설해지는 예를 들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초기불교에서는 극히 일반적인 것이다.”(舟橋<3>[상])

 

  이 인용문에서 후나하시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연이생’이다. 이것은 팔리어 파티차 삼판나를 원어로 하며, ‘연기소생’‘인연소생’‘연생’ 등으로도 번역된다. 의미는 ‘연에 의해 생긴 사상事象’으로, ‘연기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본서에서는 가장 일반적인 ‘연이생緣已生’의 역어를 채용한다. 덧붙여 말하면, 후나하시가 무상과 ‘연이생’의 동의어로 간주하는 ‘유위’의 본뜻은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후나하시는 대다수의 경전에서 무상과 ‘연이생’이 동의어로서 함께 나타나며, 동시에 ‘연이생’은 “‘연기의 도리에 따라 생겨난 것, 그와 같은 것으로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연이생인 것에 우선하여, 먼저 처음에 ‘연기의 도리’인 것이 생각된다”(舟橋<3>[상])라고 말한다. 즉 ‘연기→연이생’인 까닭에, ‘연이생’과 동의어로서 나타나는 유위와 무상에도 ‘연기→유위’‘연기→무상’이라는 인과관계가 당연히 내재되어 있다는 논리구성이 나타난다.

 

  “이들 세 개의 용어 사이에는 본래 사상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런 까닭에 이 세 개의 용어는 동의어로서 나타난 것이다. ‘유위’라는 말은 ‘함께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로, 인연이 화합하여 생긴 것, 즉 조건에 의존하여 성립하고 있는 현상적 존재를 의미하는 말이다. 아마도 이 말이 사용된 최초의 시점부터 이미 그 속에 ‘무상’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그리고 ‘유위’라는 말과 ‘연기소생’이라는 말은, 완전히 동일한 구조를 갖는 말이다.”“그런 까닭에 ‘유위’라는 말이 이미 ‘무상’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과 동일하게 ‘연기소생’이라는 말 속에도 이미 ‘무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舟橋<6>[2])

 

 여기까지 확인한 뒤에 후나하시는 바로 결론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연기→무상’이라는 것은 여기에서 나타낸 것처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연하여 함께 생기한 것’이 ‘연기소생’으로, 그것이 무상인 것에 대해, 그와 같이 ‘연하여 함께 생기하는 것’이 ‘연기’이기 때문이다.”(前同)

 

  사이구사의 퇴각전

 

  이 후나하시의 공세에 대하여, 사이구사의 반론은 곧 ‘무상’‘유위’‘연이생(연기소생)’의 세 가지 용어는 단순히 병렬되어 있는 것으로 밖엔 해석할 수 없고, 이 세 개념을 서로 연계시키는 것과 같은 ‘사상’ 등은 없다고 반복하는 것으로 시종하고 있다. 하물며 거기에 ‘연기→무상’이라는 인과의 증명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4부 4아함 만에 한정하더라도, 세 용어가 각각 독립・단독으로 설해지고 있는 자료는, 졸저에서도 분명하듯이, 다수 현존한다. 그것들이 모두 각각 경전으로, 불설佛說로서 믿어져 전해져 왔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누구든 불가능한 일”이라고 문헌학적 축적을 바탕으로 압도하고 있다.(三枝<10>[3])

 

  뿐만 아니라 후나하시는, 『쿠다카 니카야小部』에 있는 『테리가타』의 한 구절을 경증으로 들어, 사이구사를 추격한다. 『테리가타』는 한문의 명칭은 『장로니게長老尼偈』이지만, <중외일보>의 원문(주교<3>[하])에서는 『장로게長老偈』로 되어 있다. 『장로게』는 같은 『쿠다카 니카야』에 속한 다른 경 『테라가타』의 한문 명칭이다. 아마도 오식일 것이다. 

  그러면 해당하는 게를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역을 통해 확인해보기로 한다. 사쿠라 비구니의 고백이다. 

 

 “갖가지 원인으로부터 생기고 괴멸하는 것인 갖가지의 형성된 것(제행)을, (자신과는 다른) 타자의 것(나의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해, 나는 모든 번뇌를 버렸다. 나는 청량하며 평온한 자가 되었다.”(『尼僧の告白 テーリーガーター』 岩波文庫)

 

  후나하시는 ‘갖가지 원인으로부터 생기고’ 라는 구절에서 ‘연기의 도리’를 발견하고, ‘괴멸하는 것’이라는 구절에서는 무상을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갖가지 원인으로부터 생긴 것인 까닭에 괴멸한다.”, 즉 ‘연기인 까닭에 무상’이라는 이치라고 말하고 있다. 

 

 “즉 말하자면,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파괴되어야할 것인 제행을 다른 것(즉 무아)이라고 보고……’, ‘인연소생의 법인 까닭에 무상이며, 무아’라는 의미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나는 보지만, 그와 같이 보는 것은 그다지 무리한 견해는 아닐 것이다.”(舟橋<3>[하])

 

  사이구사는 이 지적에 대하여, ‘원인으로부터 생긴’ 것과 ‘파괴되어야 할’ 것의 두 개가 ‘제행’과 함께 단순히 병렬되어진 것일 뿐으로, “그 사이에 ‘인 까닭에’라는 논리관계를 넣어 읽어야 한다는 것은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반론한다. 단 여기에서 사이구사는, 후나하시설에 일보 양보한다.

 

 “그와 같은 병렬적인 독해,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을 남겨두고 싶은 것이 나의 생각이다.”(三枝<4>[4])라는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시종 평행선인 채로

 

  무상의 근거를 둘러싼 논의는 ‘원시불교의 논리적・철학적 해석’을 시도하는 후나하시와, ‘고집스러울 정도로 문헌학자의 입장을 지키며 자료의 범위에서 일보도 벗어나지 않는’ 사이구사의, 방법론, 연구에 대한 자세의 차이로부터, 논점이 어긋난 채로 진행되어, 그런 까닭에 양자 모두 최후까지 서로의 주장을 양보하지 않고,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난다(인용부분은 梶山 前揭論文). 후나하시가(舟橋<8>[3])에서 총괄하고 있듯이, 그와 사이구사의 상이점은 ‘평행선적인 것’인 채로 나아갔을 뿐이었다.

 

  단지 객관적으로 보면, 후나하시의 해석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고, 그가 증거로서 제시한 경전의 일절도 겨우 “연기하고 있는 것은 무상이며, 무상한 것은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데 그쳤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적지 않은 학자들이 최종적으로 사이구사의 쪽에 손을 들어준 것은 무리도 아닐 것이다.

    

  동시에 ‘무상―고―무아’와 연기설의 사이에는, 적어도 초기불교에 있어서는 어떠한 관련도 연결도 없고, 동시에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를 가지고, 무상이나 고나 무아나 또 4제를 설명 해석하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三枝<04>[2])고 하는, 사이구사의 엄격한 자료해석도 너무 시야가 좁지 않은가 하는 위화감을 감출 수 없다. 

  잠시 논쟁을 떠나 시점을 바꿔, 이 문제를 고찰해보기로 한다. 

 

  “왜 무상인가”를 묻는 것의 무의미

 

  본래 ‘무상의 근거’를 묻는 것에, 의의가 특히 불교적인 의의가 인정되는 것일까. 예를 들면 “이 세상의 일체가 무상이다.”라고 하는 것에, 그 세계 안에서 “왜 무상인가?”하는 물음을 일으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 답이 되어야할 무상의 원인이 되는 사항도 또 무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후나하시는 이 점에 대해 둔감하지 않다. 예를 들면 『원시불교사상의 연구』에서 “석존의 설법은 논리의 해설이 아니었다.”라고 명언하고 나아가 “‘연기인 까닭에 무상이다’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前揭書)라고도 말한다.

 

 “종교는 무상과 직접 대결하는 곳에서 생겨난다. 적나라하게 ‘무상’이라는 현실 속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무상을 앞에 두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상을 해석하는 입장이다.”

 

 “무상을 체득하는 입장은 두려워하거나 걱정하는 바 없이 무상을 무상인 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행무상이라는 것은 논리적 추구에 의해 도달된 결론이 아니라 말하자면 종교적 예지의 직관에 의해 도달된 것이다.”(舟橋 前揭書)

 

  이것은 말 그대로이다. 무상이란 언어와 논리의 대상이 아니라, 직관되어야할 것으로 절대적인 사실로서 있는 것이다.

 

  단지 사람이 번뇌로 인해 집착하여, 자기를 포함한 무상한 일체의 사물을 마치 무상하지 않은 것처럼 착각한다. 근본번뇌인 근원적 생존욕은 본능에 뿌리를 두지만, 사물을 무상하지 않은 실체라고 세뇌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주로 후천적으로 획득된 언어에 의한 분별이다.

 

  그러나 본능과 언어가 아무리 강고하게 사물을 상주하는 실체라고 세뇌시켜도 마침내 사물은 소멸하고 자신은 나이가 들어 늙고 병들고 죽는다. “무상하지 않다”라는 믿음에 사로잡힌 자가 “무상하다”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고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란 언어의 허구성에 대한 폭로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고를 가져오는 우리들 인식의 관습, 실각實覺의 체제를, 심신과 지知의 수련에 의해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목적인 것이다.

 

  후나하시는 『니카야』 전체를 통하여 “무상의 논리적 근거는 여전히 추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붓다는 “왜 무상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것도 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舟橋 前揭書). 경전에서 무상은 언제나 무전제로, 때로는 당돌하게 등장하여, 자명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 원인과 기원에 대해 말하는 일은 없다. 후나하시는 이것을 의문시하여, 초기 경전을 ‘비평적으로 연구하여’ 무상의 근거를 찾아내려고 한다. 스스로 무상이 논리에 의해 도달된 결론이 아닌 것을 인정하면서 논리적으로 그 탐색을 시작한다.

 

  하지만 무상에 근거 등은 없다. 앞에서도 말했고, 앞으로도 반복해 서술하지만, 무상의 일단은 일상적인 실감實感에서도 알 수 있다. 단지 대다수를 신해信解하고, 전체에 육박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습을 필요로 한다. 무상은 그러한 전제적인 사실이며, 불교에서는 절대적이다. 이 ‘절대적’이라는 의미는, 예를 들면 ‘불변적인 것’‘상주인 것’‘동일적인 것’이 어딘가에 있어, 그것과의 대비에서 성립하는 것과 같은 상대적인 ‘개념’등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철학자 나가이 히토시永井均는 불교의 무상의 개념을 비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상이라는 것이 자주 설해져,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생멸, 변화하여 동일하게 머무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생멸과 변화는 무엇인가가 동일하게 머무는 것을 전제로 하여 성립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운동(공간적 위치의 변화)이라고 하면 공간의 동일성, 불변성이 전제가 되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이라는 등의 교설은 본래 그 의미를 갖지 않는다.”(永井, 藤田一照, 山下良道 『<佛敎3・0>を哲學する』春秋社) 

 

  그렇다. 무상은 무엇인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상은 여기에서 나가이가 상정하고 있는 듯한 ‘개념’이 아니다. 의미의 바깥에 있는 절대적인 사실이 무상인 것이다. 진정한 죽음은 의미의 바깥에 있는 사실일 수밖에 없듯이(따라서 언어는 진정한 죽음을 표현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진정한 죽음은 언어의 지시대상으로서의 자격을 단적으로 박탈하고 있다.). 진정한 무상도, 모든 개념들의 상대성 속에서, 그 전체의 의미를 생성시키는 일은 없다. 즉 무상은 사유의 영역에는 없고, 언어를 뛰어넘어, 개념적 존재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제1장에서 보았듯이, 붓다는 범천梵天의 권청勸請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감득한 이 진리는 실로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적정하며, 뛰어나며, 사고의 영역이 아니며, 미묘하여, 현자에 의해 알려져야 할 것이다.”(방선 인용자, 「성스러운 것의 탐구―성구경聖求經」『原始佛典 第4卷 中部經典 I』 春秋社)

 

  나가르주나는 『공칠십론』13절 “무상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이 논점에 대해 답론하고 있다.

 

 “반론자는 말한다. ― ‘일체는 무상이다’라고 말하며, ‘일체는 무상이다’라고 보임으로써, 불공不空인 것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답하여 말한다. 일체는 무상(이라고 말하지만,) 무상한 것도 항상한 것도 어느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항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 어느 것이지만, 어디에 그와 같이 있을 수 있겠는가.[58] ‘일체는 무상이다’라고 말하지만, 이 경우 설하고자 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무상한 것도 항상한 것도 어느 것이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항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 어느 것일 것이지만, 그것들 존재는 어디에 있겠는가, 어디에도 없다고 설한 것이다.”(瓜生津隆眞譯 「空七十論(七十詩頌の空性論)」『大乘佛典14 龍樹論集』 中公文庫)

 

  그런데 현자가 아닌 범부에게 있어 무상은 고이며, 죽음도 또 단적인 공포이다. 왜 공포이며, 고인 것인가. 무상도 죽음도 의미의 영역, 명사의 영역으로 묶어둘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런 까닭에 절대적인 사실로서 직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마구치 즈이호山口瑞鳳는 불교에 있어 무상의 구조를 ‘세 개의 시간’론으로 정리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말하여 ‘세 개의 시간’이란 다음과 같다. 먼저 제1의 시간에서는, 지각원인이 되는 외계의 선험적 <변화>가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되는 <지금>으로서, 미래로 경과하면서 정체됨이 없이 소실한다. 이 지각원인의 <변화>에 대응하고 있는 생체生體가, 본래 부여받은 감수기능에 의해 외계의 시간적 경과를 지각으로 받아들여, 지속하는 순간의 공간적 궤적으로 바꾸어 정지, 이동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이 매순간의 허구적인 현재에 표상이 성립하고, 그 직후에 소실한다. 이것이 제2의 시간이다. 표상은 전후의 순간이 구별됨이 없이 정지적으로 파악되고, 거기에서 추상된 몰시간적 형태관념이 그것을 가리키는 명칭과 함께 ‘명색’으로 구성되고, 기억된 그 ‘명색’에서 언어표현이 형성된다. 새롭게 경험되고 외계를 잘못 파악한다고 하는 표상은 모두 상기된 ‘명색’으로 간주되고, 언어표현 대로 ‘생・멸’하는 실체로서 인식된다. 이 실체를 지탱하는 ‘명색’의 몰시간적 영원성[항상]이 마지막 제3의 시간이다.”(인용자주: 이 책에서는 < >로 표기된 말은 선험적인 사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評說 インド佛敎哲學史』 岩波書店)      

 

 “현실적으로는, 선험적인 외계에 <지금> <변동>하는 경과가 있고, 거기에서 거론된 원인이 경험주체에 의해 매순간 현재의 표상지각이 되는 결과의 세계만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 둘의 어느 것과도 관계없는, 시간의 개념[역시성歷時性]을 반영하지 않는 실체적인 ‘명색’으로 구성된 기억이며, 그것에 기초한 정지적인 ‘언어표현’의 세계가 일상의 필요에 따라 형성된다. 결과의 경험표상이 외부로 투영되어 외계로 간주되고, 그것이 ‘명색’과 조합하여 실체로 인식된다. ‘언어표현’은 실체로 구성되는 그 세계가 ‘생・멸’하고 ‘변화’한다고 거짓을 말하지만, ‘언어표현’에 매몰되는 인간은 그것을 납득한다. 그와 같은 일상적인, 뿌리 깊은 구속이 우리들을 실체로의 집착으로 끊임없이 결부시켜 간다.”(前揭書)

 

  야마구치는 계속하여, 그 집착의 ‘가장 궁극적인 것이 ‘죽음’의 공포‘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중관파의 대학장大學匠 샨타라크쉬타의 교설을 참조하면서 세운 시간론이지만, 본래 언어표현으로는 익숙치 않은 무상의 구조를 추론으로서 끝까지 추구해간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고 한 까닭에 대단히 난삽한 표현이 되어버렸다.

 

  좀더 부언하면 다니 타다시谷貞志는 이 야마구치의 무상론에 대하여, “칸트철학과 같이 현상의 선험적 조건을 구성하는 듯한 초월론적인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지각과 추론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야말로, ‘역시적歷時的 인과’의 형이상학이 아닐까?”라고 당연한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刹那滅の硏究』春秋社)

 

  단 야마구치에 있어서 ‘제1의 시간’과 ‘역시적 인과’가 “지각과 추론에 있어서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평가일 것이다. 그것은 ‘선험적’이라고는 해도 선험적 사상事象은 아니다. 확실히 범부에게 있어서는 ‘제1의 시간’을 정확히 지각하는 것은 곤란할 것이지만, 그러나 전혀 지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고苦인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죽음’의 공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심하는 계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수마나사라Sumanasara도 “무상은 어떠하든 간에 경험, 체험할 수 있다. 따라서 현상의 관찰은 무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般若心經は間違い?』寶島SUGOI문고).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장의 무상을 둘러싼 논의 속에서 다시 살피도록 한다.

 

  추론의 경우와 동일하게 언표의 영역, 의미의 영역의 밖에 있는 것, 붓다가 말하는 ‘사고의 영역을 초월한’ 것에 관하여,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근접할 수 있고, 암시할 수 있다. 현재 야마구치 즈이호는 타자가 이해 가능한 범위에서 추구하고 있다. 

  더욱이 심신의 수습을 쌓는 것으로, 통상의, 자연적인 ‘지각과 추리’로서는 통달할 수 없는, 즉 ‘사고의 영역’에는 없는 사상의 실상을 상당히 알 수 있게 된다.

 

  후나하시의 ‘2종연기설’

 

  그러나 후나하시는 어찌하여 무리하면서까지 무상의 근거를 연기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까. 

  첫 번째로는 불교의 종교성을 어떻게 담보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후나하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상’을 논리의 도마 위에 올려 어떻게 요리를 하더라도, 거기에서 종교는 생겨나지 않는다.” “‘무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석해 보아도, 무상을 초월하는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무상에 철저해지는 것으로부터 무상을 초월하는 길은 열려지는 것이다.”“그런 까닭에 석존은 무상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초기불교의 교의상에서 그것을 추구해 가면, 그것은 연기의 사상이다.”(舟橋<3>[상])

 

  따라서 ‘연기인 까닭에 무상’이 요청된다고 한다. 전반의 “어떻게 하여 무상으로부터 종교가 생겨나는가”, 환언하면 “무상에 있어서 불교의 종교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앞서 본 『원시불교의 사상』의 일절과 서로 통하며,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연기→무상’이라는 인과관계의 인정이 그 답일 수 있는가. 이 비약은 채워지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일체법이 연기하고 있다”라는 일반적 보편적인 연기설을 교리상에서 기초를 세우기 위해 무상의 근거로서 연기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가능성이다.

 

  반대의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인 해석의 12지연기설에 의해서는 그것이 오로지 시간적인 인과관계라 해도, 무상의 기제機制를 실시간에 따른 형태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12지연기의 전통설인 환관―순관은, 곧 무명으로부터 노사에 이르는 흐름이며, 동시에 번뇌와 행위와 고의 생기의 과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제1장에서 본 ‘찰나연기’와 ‘연박연기連縛緣起’의 설을 채용하지 않는 한, 번뇌와 행위와 고의 계기는 ‘지금 여기’에서 무상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 사태는 아니다. 12지의 연접은 실시간의 무상의 양상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왕관과 역관의 도정에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무상을 하나의 교설로서 취급하더라도 실제로는 12지연기설과의 관련성은 적다. 여기에 12지연기를 반성적으로 파악한 논리적 인과관계로 간주하는 근거가 있다.

 

  후나하시에게 있어 ‘일체법’이란, 먼저 6근(안・이・비・설・신・의), 6경(색・성・향・미・촉・법) 등 유정의 생존을 구성하고 있는 내외의 전요소를 가리킨다. 이것들 전 생존요소가 연기에 의해 존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나하시는 이것을 ‘일체법인연생의 연기’라고 부른다. 

 이미 제1장과 제3장 말미에서 안내했듯이 ‘유정수연기’와 ‘일체법인연생의 연기’라는 말을 사용해 초기불교에는 2종의 연기설이 있다고 최초로 주장한 것은 제1차연기논쟁의 참가자 아카누마 치젠赤沼智善이었다. 

  후나하시는 아카누마의 설을 인용하고 표현을 달리하는 정의定義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논쟁의 종결로부터 대략 3년이 지난 1983년, 그는 제2차논쟁에서 큰 쟁점이 된 이 논제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정리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논문 「‘일체법인연생의 연기’를 둘러싸고(「一切法因緣生の緣起」をめぐって)」(『佛敎學セミナー』第37号)에서 후나하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체법인연생’이란, ‘미혹의 생에 있어서는, 일체는 다양한 갖가지 조건에 의해 조건지워져 존재하는 것, 즉 조건에 의존하는 것으로, 조건을 떠나 조건과 무관계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것으로, 그러한 것을 설하는 연기설을 ‘일체법인연생의 연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유정수연기’란 무엇인가. 같은 논문에 의하면, “유정이 미혹의 세계에 유전하는, 그 유전의 모습을 설하는 연기설”이라는 것이 되지만, 요컨대 3지~12지의 유지연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단지 후나하시의 ‘2종연기설’은 아카누마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다. 아카누마 자신도 인정하듯이 2종의 연기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면, ‘일체법인연생의 연기’를 나타내는 ‘이 방면의 가르침은 극히 적다’(「불교개론」제2장 연기 『佛敎敎理之硏究』所收 法藏館)

 

  후나하시는 “이와 같은 아카누마 교수의 설에서는, ‘일체법인연생의 연기’는 극히 그 영향이 약한 것으로, 도저히 그대로는 용인할 수 없다”고 단언한 위에, 다음과 같은 방법론을 제시한다. 

 

 “그래서 나는 ‘일체법인연생’과 ‘유정수연기’는, ‘연기설’이 갖는 두 개의 면이며, 두 개의 의미로, 초기불교에 있어서 ‘연기설’이라고 하면, 소위 12연기설 및 그것에 준하는 연기설만이지만, 이 연기설이 나타내는 의미는 일단 이와 같이 두 개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일체법인연생의 연기’를 둘러싸고」 前揭)

 

  이 양면성은 우이 하쿠주에 의해서도 설시되는 것으로, 후나하시는 우이의 『인도철학연구제2』로부터 “12지에 대하여 모두가 상의상관相依相關이라고 하면, 세계 자체는 모두 상의상관의 관계에 있어서 성립하고 있다는 것과 동일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의 일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제2장에서 인용한 마츠모토 시로松本史朗 등에 의해 초기불교의 연기설일 수 없는, 중국 화엄철학의 연기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된 곳이다. 

 

  후나하시 논의의 흔들림

 

  그러면 후나하시는 ‘일체법인연생의 연기’를 ‘상의상관’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우이의 설을 비판하여 말한다.

 

 “우이 박사는 근본불교의 연기설을 해석하는데 상의상관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와, 이것이야말로 근본불교 연기설의 특색인 것을 강조하지만, 오늘날 보면 그것은 지나친 것으로, 말하자면 박사의 지나침에 의한 실수인 것이다. 그와 같이 해석되는 것은 실제로는 대승불교 이후부터이며, 그것도 중관파에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 보인다.”(舟橋 前揭論文) 

 

  후나하시는 ‘오늘날 보면’이라고 단정하고 있지만, 제2장, 3장에서 보았듯, 와츠지 테츠로는 당시부터 우이의 상의상관설을 너무 앞서 간 설로서 배척하고 있다(「실천철학」 『和辻哲郞全集第5卷』所收 岩波書店). 후나하시의 평가는 이것에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는 ‘일체법인연생의 연기’가 상의상관의 관계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견해가 미묘하게 바뀌고 있다. 

 

 “(우이) 박사의 문장 가운데, ‘상의상관’이라는 말을 ‘무엇인가에 의지해 존재한다는 관계적 존재’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한다면, 그대로 근본불교의 연기설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舟橋 前揭論文)

 

  이 ‘무엇인가에 의지해 존재한다는 관계적 존재’는 사이구사 미츠요시도 인정한 초기불교에 있어서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 

 

 “그와 같은,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의존해 있다’‘의존해 … 한다’라고 하는, 소위 의존관계에 있는 것을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라고 상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三枝<1>[하])

 

  그리고 사이구사도 또 이 의존을 상의로 확대해석 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고 있다. 

  서술된 글만을 비교해보면, 후나하시의 ‘일체법인연생의 연기’와 사이구사의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는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밖에 볼 수가 없다. 양자의 대립점은, 이것이 12지연기의 해석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에 모아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미야지 카구에宮地廓慧도 또 후나하시가 말하는 ‘일체법인연생의 연기’와 자신이 말하는 ‘연성緣性’은 동일한 개념일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宮地<5>[6]). 하지만 미야지의 ‘연성’은 한마디로 말하면 ‘차연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체법인연생의 연기’나 사이구사가 말하는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와도 차이가 있어 도저히 같은 뜻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논의 대상의 차이에 의한 대화의 혼선은 논쟁에 당연히 따르는 부수적 요건이라 하더라도 제2차연기논쟁에서는 너무 많이 나타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후나하시 잇사이는 논쟁 후에 쓴 논문(「일체법인연생의 연기」를 둘러싸고)의 전반에서, ‘일체법인연생의 연기’는 상의상관의 관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논의가 진행되는 속에 이러한 입장은 흔들려, 후반이 되면 “‘연기’가 ‘무상’과 ‘무아’의 논리적 근거로서 생각될 때, 그와 같은 의미를 갖는 ‘연기’는 ‘상의상대相依相待’적인 해석을 갖는 것에 어울리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라고 서술하기에 이른다. 같은 논문 안에서 입장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논지의 변화는 논쟁 속에서도 보인다. 그렇다면 미야지가 “‘일체법인연생’이 ‘유정수연기’와는 별도로 독립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견해, ― 그리고 그것이 ‘무상’의 논리적 근거라는 견해 ― 등은, 역시 우이박사 일파의 ‘상의상자相依相資’를 중시하는 주장에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宮地<5>[6])라는 의구심을 드러내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무중도와 연기

 

  한편 후나하시는 니카야에 ‘일체법인연생의 연기’가 포함된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유타 니카야』의 일절을 인용하고 있다. 「인연상응因緣相應」에 있는 『카차야나』의 일절이다.

  

  어느 때 붓다는 제자 카차야나로부터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붓다가 가르침을 전한다.

 

 “카차야나여, 통상 세계는 존재(유)와 비존재(무)의 두 가지 [사고방식]에 의거하고 있다. 카차야나여, 세계의 생기를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고 있는 자에게는, 세계에는 비존재라는 성질은 없다. 카차야나여, 세계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고 있는 자에게는 세계에는 존재라는 성질은 없다.”

 

 “카차야나여, ‘일체의 것은 존재한다’라는 이것은 하나의 극단의 논이다. ‘일체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것은 하나의 극단의 논이다. 카차야나여, 여래는 이것들 양극단의 논을 가까이 하지 않고 중용中庸으로서 가르침을 설한다.”(「카차야나 종성의 사람」 『原始佛典II 相應部經典 第2卷』 春秋社)

 

  이것을 말한 뒤, 붓다는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 행을 연하여 식이 있다. ……”라고 12지연기의 순관을 설하고, 또 “무명을 남김없이 소멸함에 의해 행의 소멸이 있다. 행의 소멸에 의해 식의 소멸이 있다. ……”라고 12지연기의 역관을 설한다.

 

  후나하시는 이 경의 앞에서, 세계의 존재, 비존재에 대하여,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여 사로잡히지 않는 중도가 제창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것에 이어지는 뒷부분의 12지연기설은 ‘인생의 방식’만을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법의 존재방식’도 문제로 하고 있다고 추단推斷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일체법인연생의 연기’가 설해지고 있는 것으로, ‘유정수연기’가 아니다. 그리고 ‘일체는 존재한다’라는 ‘유의 견해’와 ‘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의 견해’, 이것들 양방의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떠난 이 중도적인 사고방식은 그대로 ‘일체는 변화하면서 상속한다’는 사고방식이 될 것이다.”(「‘일체법인연생의 연기’를 둘러싸고」 前揭) 

 

  이 해석에서는 일체법의 유무에 관하여 중도가 설해지는 까닭에 연기가 설해지는 것이 되며, 또 세계의 생멸이 설해지고 있는 까닭에 무상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 된다. 초기불교에 있어 중도는 연기설로서 설명되었다고 하는 해석은, 근년 나카소네 미츠노부仲宗根充修가 제창하고 있다.(「중도사상과 연기설 ―『가전연경』의 성립을 중심으로―」 『印度學佛敎學硏究』 第53号 第1号)

 

  이와 같이 후나하시는 이 경의 일절이 ‘일체법인연생의 연기→무상’의 증거가 된다고 하고 있다. 

 『카차야나』라는 경은 『카티야야나에의 가르침』으로서 나가르주나의 『중론』에서도 중시되고 있다. 제15장의 제7게, 제8게를 보자. 

 

 “(제7게) 존재하는 것(유)과 존재하지 않는 것(무)을 잘 아는 세존은, 『카티야야나에의 가르침』 속에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과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 그 어느 것도 부정하셨다.”(桂紹隆譯 『龍樹 <根本中頌>を讀む』 春秋社)

 

 “(제8게) 만약 무엇인가가 본성으로서 존재한다(유)고 한다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무)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에 본래 갖춰져 있는] 본성은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桂譯 前揭書)

 

  이 게송은 나가르주나가 초기경전에 보이는 유무중도설을 계승하여 더욱 심화시킨 것으로 알려지지만, 여기에서도 연기설이 근거가 되고 있다. 제8게에 보이는 ‘무엇인가’, 즉 만상은 본성으로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하지 않는다. 곧 실체로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연기하고 있는 것으로서 임의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보이고 있을 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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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전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편집이사, <실담자기초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글익는들, 2004)), <을유불교산책>(정우서적, 2006),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앙>(불교시대사, 201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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