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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사람의 본성은 타고 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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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20 년 1 월 [통권 제8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71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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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성균관대 초빙교수

 

불교를 행위의 종교라고 한다. 탄생의 종교로 불리는 브라마니즘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브라만적 전통에서는 태어난 가문이 어떤 계급인가에 따라 개인의 신분과 계급이 결정된다. 이런 특징은 굳이 고대인도의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과거 신분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행위의 종교와 불성의 보편성

 

그러나 부처님은 사람은 태생이 아니라 행위에 따라 귀천이 결정된다고 하셨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사람의 태생이나 신분과 같은 조건을 근거로 한 차별을 부정한다. 사람을 구별 짓는 것은 타고난 신분과 계급이 아니라 업業이라는 행위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이런 가르침은 현재 처한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은 규기법사

 

부처님의 이런 평등사상은 대승불교로 오면서 불성론佛性論으로 계승된다. 대표적으로 ‘일체 중생들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열반경』을 들 수 있다. 이 경에서는 범부는 물론이거니와 네 가지 중죄[四重罪]나 오역죄를 범한 사람[作五逆罪], 나아가 선근이 없는 일천제一闡提까지도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첫째 번뇌에 가려서[煩惱覆故] 보지 못한다고 했다. 따라서 본성을 가로막는 왜곡된 인식과 같은 번뇌를 제거해야[斷壞煩惱] 한다고 강조한다. 둘째는 불성이란 마치 허공과 같은 성질[如虛空性]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생의 눈은 물질적 대상만 볼 수 있기 때문에 허공처럼 형상을 초월한 불성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불성의 의미[佛性義]에 대해 무상정등각이라고 했다. 불성을 가졌다는 것은 곧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따라서 불성을 가진 중생은 십력, 32상, 80종호 같은 부처님의 자질을 구비하고 있다. 불성을 지닌 중생은 곧 부처님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은 불성사상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보편 성불론의 교리적 근거가 되어 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연쇄살인범처럼 악행만 일삼는 사람들도 있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런 사람에게도 불성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바로 그런 생각을 교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법상종의 오성각별설五姓各別說이다. 법상교학의 특색을 담고 있는 이 교설의 핵심은 모든 유정은 태어날 때부터 다섯 가지 차별적인 종성種姓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타고난 종성은 후천적으로 고쳐지지 않는 고정불변의 자성이라고 보았다. 다섯 종성은 보살종성菩薩種姓, 독각종성獨覺種姓, 성문종성聲聞種姓, 부정종성不定種姓, 무성유정종성無性有情種姓을 말한다.

 

법상종의 오성각별설

 

첫째, 보살종성은 오성중에서 가장 뛰어난 종성으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고 태어난 유정을 말한다. 이 종성을 갖고 태어난 이는 생법이공生法二空을 비추어보고, 사지四智를 얻어 마침내 불과를 증득하는 무루지無漏智의 자질을 지녔다. 즉 나는 텅 비어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아공我空과 객관의 모든 존재도 실체가 없다는 법공法空을 비추어 보고,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라는 네 가지 지혜를 증득하는 자질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런 종성을 가진 유정은 보살의 서원과 실천을 통해 마침내 부처의 지위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둘째, 독각종성은 생공生空의 무루지를 갖춘 유정을 말한다. 이 종성을 타고난 이는 생법이공 중에서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아공을 깨달을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다. 독각獨覺이란 ‘홀로 깨닫는다’는 뜻도 있으나 연기만을 깨닫는다는 것이므로 달리 연각정성緣覺定性이라고 한다. 비록 연기를 깨닫지만 자신의 깨달음에만 안주하고 보살행이라는 이타적 실천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자리에 만족하는 소승적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성문종성은 아라한이 될 무루의 종자를 갖춘 사람을 말한다. 성문종성 역시 생법이공 중에 아공의 이치를 터득할 능력을 구비하고 있다. 그래서 육신의 욕망을 모두 소멸한 회신멸지灰身滅智를 통해 무여열반에 들 수 있는 종성이다. 독각종성과 같이 아공에 국집하는 소승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동일하다. 다만 독각종성이 스스로 연기를 깨닫는다면 성문종성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있으면서도 이타적 실천으로 나가지 못하고 소승적 경지에 안주해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넷째, 부정종성은 보살・독각・성문이라는 세 가지 자질 중에 두 가지 또는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유정을 말한다. 3가지 성품 중에 어느 하나로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경우의 수가 등장한다. 즉 보살과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종자를 갖춘 사람, 보살과 연각이 될 종자를 갖춘 사람, 성문과 연각이 될 자질을 갖춘 사람, 세 종자를 모두 갖춘 이로 나눠진다. 세 가지 자질 중에 하나로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승부정성三乘不定性이라고 한다. 부정종성을 가진 사람은 성문・독각을 지향하지만 보살승으로 전향해 불과를 증득하기도 한다. 소승법을 지향하다가 이후 대승법으로 전향해 불과로 나가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무성유정無性有情은 성문・연각이나 불과를 증득할 수 있는 무루지의 종자를 전혀 갖지 못한 유정을 말한다. 따라서 무성유정은 영원히 불과는 물론 성문이나 연각이라는 과보를 증득하지 못하고 생사유전을 거듭하는 유정을 말한다. 다만 오계五戒와 십선十善의 실천이라는 좋은 씨앗[善因]을 심어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는 인승人乘이 되거나, 하늘에 태어나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천승天乘을 목표로 삼을 뿐이다. 이들은 무루지를 갖지 못하고 생사유전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유루有漏의 업보와 자질만을 갖춘 유정들이다.

 

의미와 평가

 

오성각별설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타고난 성품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우열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런 차별성은 성문 연각의 지위만 얻도록 예정된 결정종성과 어떤 지위도 확정되지 않는 부정종성으로 대별된다. 둘째는 결코 성불할 수 없는 무성유정을 설정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은사 규기窺基는 선근이 없는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는 영원히 성불할 수 없다는 ‘일천제불성불론一闡提不成佛論’을 주장했다.

 

규기에 따르면 성불할 수 없는 무성유정은 다시 세 가지로 세분된다. 즉, 생사 자체를 즐기는 단선근천제斷善根闡提,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 대비천제大悲闡提, 열반의 성품이 완전히 결여된 무성천제無性闡提가 그것이다. 단선근천제나 대비천재는 자신의 의지로 성불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성천제는 자질이 결여되어 성불할 수 없는 자를 말한다.

 

그러나 신라 출신의 원측圓測은 규기의 이런 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원측은 ‘무성종성인 일천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주장은 방편적 교설이라고 보았다. 근본에 있어서는 일체 중생이 여래장如來藏을 가지고 있음으로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현상적으로 보면 중생의 성품이 우열이 있고, 차별적으로 보이지만 근본에서 보면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승의 관점에서 보면 성문・연각・보살로 구분되고, 일천제는 성불할 수 없다. 하지만 일승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고, 그들은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 원측의 ‘일체개성설一切皆成說’이다.

 

성철스님도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녔다는 것은 모든 종파의 보편적 관점이자 불교사상의 기본이라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오성각별설은 비록 교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파격적인 주장이고, 현상적 차별상을 절대시한 것은 문제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를 근거로 오성각별설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할 수 있다. 첫째, 만인은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 『열반경』에서는 선근이 하나도 없는 일천제一闡提, 불법을 비방한 사람, 오역죄를 범한 사람, 네 가지 중죄를 범한 사람도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도 반드시 보리도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반면 오성각별설은 현상적 차별상을 인간존재에 대한 근본적 한계로 인식한 것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제행이 무상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태어나면서부터 고정불변의 성품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태생의 종교라는 브라만의 관점과 다르지 않다. 사람의 성품은 태생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연기적이며, 가변적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32상 80종호로 부처를 볼 수 없듯이 중생의 현상적 모습만을 놓고 근본을 규정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진리라면 살인마 앙굴리말라는 결코 교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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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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