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마음작용 2-별경심소(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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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20 년 2 월 [통권 제8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342회 / 댓글0건본문
허암 | 불교학자 ‧ 유식
지난 호부터 마음작용[심소], 그 중에서도 별경심소[욕, 승해, 념, 정, 혜]의 ‘욕’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누차 말씀드렸듯이 유식에서는 마음을 심왕[아뢰야식 등]과 심소[마음작용]로 나눈다고 했습니다. 심소는 심왕과 늘 함께 작용하는 것으로 51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별경심소는 ‘작용하는 대상이 각기 다른 마음작용’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번에도 별경심소 중에서 ‘승해勝解’는 어떤 마음작용인지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승해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선善심소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신(信, 믿음), 지난 호에서 이미 설명한 욕 (欲, 바람 · 희망 · 의욕) 그리고 승해와의 관계에 대해 간단하게 기술하겠습니다. 대상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하는 마음작용인 승해에서 믿음[信]이 생기며, 그 믿음에는 반드시 바람[서원誓願]이 동반합니다. 그러므로 승해와 욕은 믿음의 원인과 결과가 됩니다. 즉 승해가 믿음의 원인이 되고, 욕은 믿음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욕[바람]이 생겨, 확실하게 이해하여 단정하는 것[승해]에서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믿음은 반드시 욕[바람]을 동반합니다. 이 욕[바람]은 바로 서원誓願입니다. 이 서원[욕]이 생기면 인간은 노력[정진]하고자 하는 마음작용이 생깁니다. 즉 수행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욕과 승해는 신信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신信에 대해서는 선심소를 설명할 때 자세하게 다루겠습니다.
승해(勝解, adhimukti)는 어떤 마음작용인가
지난 호에서 ‘욕’은 좋아하는 대상[소요경所樂境]에 대해 희망하는 마음작용[심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반면 승해는 ‘결정된 대상(決定境)’에 대해 활동하는 마음작용입니다. 승해란 ‘움직이지 않는 대상[결정된 대상]에 대해 그것을 확신하고 단정하는 마음작용’입니다. 그렇다면 필자가 승해를 왜 이렇게 정의했는지 그 근거를 먼저 범본[산스크리트 본] 문헌을 중심으로 제시해보겠습니다.
먼저 세친 보살의 저작인 『대승오온론』(범본)(주1) 에서는 “확정된 것[존재]에 대하여niścite vastuni 있는 그대로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avadhāraṇa이다.”(주2)라고 하였습니다.(주3) 그리고 무착 보살의 저작인 『대승아비달마집론』(주4)에서도 “확정된 존재niścite vastuni에 대해 확정된 그대로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dhāraṇ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향하지 않는 것[생각을 바꾸지 않는 것]을 작용으로 삼는다asaṃhāryatā”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유식삼십송』에 대한 주석서인 안혜의 『유식삼십송석』에서는 앞의 두 논서보다 자세하게 승해를 설명합니다. 그 주석 내용을 살펴봅시다.
“승해란 확정된 것[존재]에 대해 있는 그대로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확신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확정된niścita’이라는 말은 ‘확정되지 않은 것’을 배제[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확정된 존재>란 이치[도리] 또는 신뢰할 수 있는 성인의 가르침에 의해 ‘의심이 없어진 확정된 것[존재]’이다. <제행>무상, <일체개>고苦 등의 모습[행상行相, ākāra]에 의해 확정된 것[존재]을 그 모습[행상]에 의해[그대로] 마음에서 확정하여, 실로 이와 같이 있는 것[A]이지 그 이외의 것[B]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확신]이 승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승해]은 확고함의 근거가 되는 작용을 가진 것이다. 왜냐하면 승해가 탁월한 사람은 반대론자에 의해 자신의 확고한 논리[주장]를 빼앗기지 않기[전향하지 않는 것, āsaṃhāryatā] 때문이다.”(주5)
이처럼 승해는 ‘확정된 것[존재]에 대해 있는 그대로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확신하는 것]’이라고 위에서 제시한 논서 모두 동일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확정된 것[존재]’이란 세상의 이치[도리] 또는 신뢰할 수 있는 성인[부처님]의 가르침[사성제, 무상, 고]에 의해 ‘의심이 없어진 확정된 것[존재]’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승해가 뛰어난 사람은 자신의 논리가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논리에 따라가지 않는다[전향하지 않음]고 합니다.
이제 한역문헌의 주석 내용을 살펴봅시다. 호법보살의 『성유식론』에서는 승해(주6)를 “<확실하게> 결정된 대상[경계]를 분명히 지니는 것[印持(주7)]을 본성으로 하고, 이끌어[引] 전전[轉](주8)할 수 없음[不可], <즉 다른 것에 이끌려 생각을 바꾸거나 전향 또는 변화하지 않는 것>을 작용으로 한다.”(주9)라고 주석합니다. 또한 명나라 지욱 스님(『대승백법명문론직해』)도 “승해란 결정된 대상을 유예하지 않고 인가[인정]하고 임지[마음속에 지녀서]하는 것을 본질로 하고, 다른 조건[他緣]에 이끌리고 유혹되어[引誘] 바꿀 수 없는 것[不可改轉](주10)을 작용으로 삼는다.”(주11)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대승백법명문론직해』와 『성유식론』의 주석을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입니다. 승해란 ‘어떤 대상이나 상태를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여 자신의 마음 속에 그것을 각인하고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마음작용, 그리고 다른 조건他緣에 이끌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 신념 · 사고방식[가치관]을 바꾸거나 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승백법명문론직해』와 『성유식론』(주12)에서는 결정된 대상에 대해 ‘유예하는 것’은 승해가 아니라고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유예한다’는 것은 확신하지 못하고 ‘주저한다’는 뜻으로, A를 A라고 B를 B라고 확실하게 단정하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심信心이 없는 의심하는 대상에는 결코 승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승해는 신심信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승해勝解를 ‘신해信解’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믿음[信]을 무조건 믿고 따르는 것[신에게 절대 의존하는 감정]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믿음은 이해[解]를 바탕으로 한 것[信解]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웃종교에서 말하는 ‘무조건 믿으면 병도 낫고 천당간다’는 것은 진정한 믿음도 아닙니다. 게다가 진정한 의미의 승해도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성유식론』 등에서 승해의 본질적 성질[性]을 ‘인지印持’, 부차적 성질[業]을 ‘불가인전不可引轉’이라고 주석하였듯이, 승해는 선악 모두에게 작용하는 심소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해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은 신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관행처럼 지켜오던 것을 바꾸거나 전향하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 · 보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집념執念이나 고집이고, ‘꼰대 짓’입니다. 이처럼 승해는 선악 모두에게 작용하는 심소입니다.
승해는 가르침, 진리, 선정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성유식론』의 주석서인 규기의 『성유식론술기』에서는 승해의 심소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교敎 · 리理 · 증證의 3개가 작용해야 한다고 합니다.(주13) 그 중에 교(敎, 가르침)란 교시敎示와 언설言說을 말합니다. 교시라는 것은 몸과 마음으로 설하는 것이고, 언설이란 언어에 의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리고 리理란 이치나 도리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이치나 도리란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 등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일체의 현상과 그 진리’를 말합니다. 게다가 증證이란 선정을 닦는 것, 즉 수행정진을 말합니다. 그래서 승해는 대단히 중요한 심소입니다.
이처럼 승해의 심소는 자기 자신이 가르침이나 도리[진리]를 명백하게 이해하고 직접 자신이 수행을 닦아 체험하고 체득할 때만이 생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세상살이에 영합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상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정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승해, 즉 확실하게 결정하여 의심이 생기지 않는 마음작용이 생기고 그런 마음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스승은 승해를 잘 실천한 분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수많은 성현들은 승해의 마음을 잘 간직한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은 진리나 정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쉽게 포기하거나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온갖 고뇌를 이겨내고 오롯이 승해를 지킨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분들을 ‘인류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불교도로서 우리의 삶을 한번 되돌아봅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생각[가치관]을 버리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시류에 편승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비판하면 ‘현실이 중요하지 이상이 밥 먹여주나’ 또는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킵니다. 게다가 진리에 대한 신념을 지키고 사는 사람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오자’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식에게도 ‘현실에 순응하고 사는 것이 세상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살기 위해 현실에 순응하는 적당한 타협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논리에 순응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승해의 심소를 잘 지킨 사람이 있었기에 불교뿐만 아니라 인류가 발전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namaste
주)
(주1) 한역본에서도 “확정[決定]된 것[존재]에 대하여 이해한 대로 인정[印可]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謂於決定事卽如所了印可爲性. 『대정신수대장경』 31, p.848c15-16)”고 하였다. 이하 『대장경』으로 약칭.
(주2) /niścite vastuni tathaiva avadhāraṇam/(Pañcaskandhaka , p.3, 12)
(주3) 여기서 ‘확정된 것’이라는 것을 안혜소에서는 바른 추론으로 얻어진 지식[비량]이나 성전[성언량]에 쓰여 진 것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주4) 『대승아비달마집론』(한역본)에서 승해란 “결정한 것에 대해 결정된 것에 따라 인지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고, <다른 것에> 이끌려 전향하지 않는 것[생각을 바꾸지 않는 것]을 작용으로 삼는다.”(謂於決定事隨所決定印持體性. 不可引轉爲業. 『대정장』 31, p.664a29)라고 하였다. 이 정의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성유식론』의 주석과 완전히 일치한다.
(주5) /adhimokṣo niścite vastuni tathaivāvadhāraṇam/ niścitagrahaṇam aniścitapratiṣedhārtham/yuktita āptopadeśato vā yad vastu asaṃdigdham tanniścitam/ yenaivākāreṇa tanniścitam anityaduḥkhādyākāreṇa tenaivākāreṇa tasya vastunaścetasyabhiniveśanam evam etannānyathā ityavadhāraṇam adhimokṣa ḥ/ sa c āsaṃhāryatādānakarmakaḥ/ adhimuktipradhāno hi svasiddhāntāt parapravādibhirapahartuṃ na śakyate/(Trimśika , p.25, 25-30)
(주6)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중)』(p.316)에서 ‘해[승해]’를 감산 스님의 주석인 ‘수승한 지해勝解’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정의한다. 아마도 뛰어날 승勝, 풀 해解 즉 ‘뛰어난 이해’라는 글자적인 의미에 따른 이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철 스님은 승해를 ‘무엇을 안다’는 의미라고 해설한다. 왜냐하면 ‘무엇을 알고서’ 그 앎을 바탕으로 확신하고 단정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주7) 인印이란 ‘확실하게’, 지持란 ‘파악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확실하게 파악하다’, 즉 ‘A를 A라고 확실하게 마음속에 새겨서[인각印刻] 결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승해, 즉 뛰어난 이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인지’를 마음속에 분명히 도장(새겨)을 찍어 그것을 보존 · 유지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인지를 ‘인가印可’, 인해印解, 인순印順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성유식론술기』가 “인순은 즉 승해이다. 저것을 새기고[印] 순응하기[順] 때문이다”(『대정장』 43, p.435a)라고 주석하기 때문이다.
(주8) 인전引轉이란 ‘생각을 바꾸거나 뒤집는다’는 의미이다. 즉 어제는 A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B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이 반론을 제기하면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을 버리거나 바꾸는 것을 말한다.
(주9) 於決定境印持爲性. 不可引轉爲業.(『대정장』 31, p.28b10-11)
(주10) 지욱 스님은 『성유식론』의 주석 내용을 이어받아 ‘인印’을 ‘인가印可’, ‘지持’를 ‘임지(任持, 마음에 지니는 것)’라고 주석한다. 즉 인지印持를 ‘의심하지 않고[유예] 인정하고서 마음속에 지녀[새겨] 잊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불가인전不可改轉’을 다른 조건[他緣]에 이끌리고[引] 유혹되어[誘] <생각을> 바꾸거나[改] 변화하지[轉] 않는 것[不可]이라고 주석한다.
(주11) 於決定非猶豫境. 印可任持. 而爲體性. 不可以他緣引誘改轉. 而爲業用.(『속장경』 48, p.342c16)
(주12) 故猶豫境勝解全無. 非審決心亦無勝解.(『대정장』 31, p.28b12-13)
(주13) 『성유식론술기』 (『대정장』 43, p.42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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