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불교]
신라에 차를 소개한 구법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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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 2020 년 3 월 [통권 제8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032회 / 댓글0건본문
상고시대 차는 채소였고, 약으로 쓰이기도 했다. 『시경詩經』「국풍國風」,「패풍邶風」,「속풍谷風」에 “누가 차를 쓰다고 했는가, 달기가 냉이와 같구나[谁谓荼苦, 其甘如荠].”라는 구절을 보면 과거 차를 나물로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래 ‘도荼’는 ‘쓴 나물[苦菜]’이라는 뜻이다. ‘차茶’라는 글자가 나타나는 것은 당나라 이후이며, 육우(陸羽, 733~804)가 도荼 글자에서 한 획을 없애 ‘차’ 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973년경 여요余姚 하무도河姆渡 유적에서 차를 나물로 먹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부엌이라 추정되는 곳에서 나무뿌리가 발굴되었는데 바로 차나무 뿌리였다. 이 유적은 이미 7000년 전, 월越 지역에서 차를 채소로 섭취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편 신농씨神農氏의 신화에서는 차를 약초로 이용한다. 신농씨가 모든 약초를 맛보다가 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었는데, 찻잎을 먹고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차가 독성을 중화하는 효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진1. 농사신. 고구려오회분묘벽화 중 농사신으로 형상화된 신농씨.
차가 가진 효능을 양생에 가장 먼저 활용했던 사람들은 도가道家이다. <신이기>에 따르면, 단구자라는 사람이 불로장생을 위해 차를 마셨다고 한다. 일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요지방 사람 우홍이 산에 들어가서 차 잎을 따다가 한 도인을 만났더니 푸른 소 세 마리를 끌어와서 우홍을 데리고 폭포산에 이르러 ‘나는 단구자라네. 그대가 차를 잘 만들어 마신다고 하니 늘 (차를 얻어 마실 수 있는)은혜를 입을 수 있을까 생각했네. 산속에는 차나무가 많으니 내가 도와 줄 수 있노라. 그대가 다음에 제사를 지낼 때에 남은 차가 있으면 도와주기 바란다.’라고 했다.”
차의 효능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문헌은 초의선사(1786-1866)의「동다송」이다. 초의 선사는 신농씨(염제)를 인용하여 차의 효능을 “사람이 힘이 나고 마음이 즐거운 것[炎帝食經云, 茶茗久服, 人有力悅志].”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차를 마시면 적체를 풀어 몸의 원기를 회복해 줄 뿐 아니라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준다는 것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차가 숙취를 없애고, 잠을 적게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8 세기 이후로 차 마시는 풍습이 널리 퍼졌다. 차의 전파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좋은 차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의 향상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좋은 차가 생산되면서, 차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고 다구茶具도 발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차 문화의 융성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차의 유행과 그에 따른 차 문화의 발전은 좋은 차의 생산으로 인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2. 단원 김홍도 군선도 세부도(여신이 약초를 담고 있는 모습). 국보 제139호(호암미술관 소장).
명차 제조의 근간은 제다에 대한 깊은 이해에 있다. ‘제다’란 불을 이용하여 찻잎의 독성을 중화하는 과정이며, 또한 차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과정이다. 아울러 차의 향을 오래 보존하고 보다 오랫동안 차를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제다법의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당나라 시대의 육우(陸羽, 733-804)가 있다. 육우는 제다의 원리에 대해 높은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좋은 차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육우의 이러한 성공 뒤에는 선종의 역할이 있었다.
육우 이전(8세기)의 제다법은 매우 조악하였다. 찻잎을 찐 후에 뭉쳐 쌀죽에 담갔다가 말리는 것이 과정의 전부였다. 차를 마실 때 덩이차를 불에 구워서 가루로 만든 후, 찻그릇에 넣고 여기에 파, 생강, 귤피 등과 함께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렸다. 이런 차는 타물他物을 섞은 혼합차 형태인데 이런 방법을 획기적으로 개량한 것이 육우였다. 육우는 찻잎만으로 차를 만드는 한편, 차의 효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술을 고안했다. 이런 방법은 이 당시에 상상하기 어려운 제다법의 향상이었다. 한편 제다법이 달라지면서 차를 끓이는 방법도 함께 변화했다. 차를 끓일 때 소금을 넣어 차의 고삽(苦澁, 쓰고 떫은 맛)한 맛을 온윤溫潤하여 마시기 좋을 뿐 아니라 색향기미를 온전하게 드러낸 탕법이었다.
사진3. 마조도일 초상.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육우는 제다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선종의 도움을 받았다. 그 중 한 명이 묘희사 승려 교연皎然이다. 교연은 차에 밝은 수행승으로, 선시와 수행력, 차의 이론에 밝았다. 760년경 육우는 안사의 난을 피해 호주에 머물렀고, 763년경 저산의 묘희사에 주석하던 교연을 만나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다. 당시 교연은 고저顧渚 지역에 다원茶園을 조성하고 차를 만들었다.『고저산기』는 이 시기 교연이 남긴 고저에 대한 기록이다. 육우는 교연과의 만남을 통해 차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었다. 이후 육우는『다경茶經』을 저술하는 과정에서도 교연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교연 뿐 아니라 다수의 선종 승려들은 차를 수행에 활용해왔다. 특히 중국 선종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고, 불교문화에서도 차는 중요한 위치를 가졌다. 차를 중시하는 선종의 전통은 수행법과 관련이 깊다. 선종 초조初祖 달마 대사는 면벽 좌선 수행을 했는데, 이러한 수행법의 최대 장애는 바로 졸음이었다. 따라서 졸음을 수마睡魔라고 부르며 매우 경계했다. 그리고 차는 졸음을 쫓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특히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토는 신수(?-706)의 북종선보다 남종선에서 정착되다가 점차 북종선 승려로 확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남종선에서 차를 마시며 수행한 것은 남선의 시조 혜능(慧能, 638-713)이 소주 조계사의 보림사, 대범사에 머물며 제자와 신도들에게 제접하며 문하에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혜능이 주석했던 지역은 차의 주산지였다. 그러므로 수행에 필요한 차를 얻기에 용이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제자 남악(677-744)에게 법을 받은 마조(709-788)가 법을 설파했던 강서(江西)은 차 주산지였다. 그러므로 수행 중에 차를 마시는 풍토의 정착이 원활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남방의 선종에서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봉연의『봉씨견문록(封氏見聞錄)』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수행 풍습은 다음과 같다.
“남쪽 사람은 차를 마시길 좋아하지만, 북쪽 사람은 처음에 많이 마시지 않았다. 개원(開元, 713-741) 연간에 태산의 영암사에 강마 스님이 있었는데, 선교를 크게 일으켜 선을 닦으면서 잠을 자지 않으려 힘썼으며, 또 저녁을 먹지 않고 모두 차를 마시는 것에 의지하였다. 사람들이 품에 (차를) 끼고 도처에서 차를 마셨는데, 이로부터 점점 더 모방하여 마침내 풍속을 이뤘다[南人好飲之, 北人初不多飲. 開元中, 太山靈巖寺有降魔師, 大興禪教, 學禪務於不寐, 又不夕食皆恃其飲茶. 人自懷挾, 到處煮飲, 從此轉相倣傚, 遂成風俗起].”
봉연에 따르면 남방에서 먼저 차를 수행에 활용하기 시작했고, 8세기부터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토가 유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승단에서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이라는 규율이 있었지만, 수행 중에 차를 마시는 것만은 허용하였다. 그러므로 남선의 이런 수행 규율은 백장회해(720-814)의『청규』가 나온 후 더욱더 체계화하여 차를 마시는 풍습이 의례되었다. 특히 승려들이 출타할 때 차를 소지해야 하는 계율도 이로부터 제도화 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므로『봉씨견문록封氏見聞錄』은 8세기 북쪽 선원에서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토가 정착되어간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9세기에 차는 승단의 일상에 보편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조수선사(778-897)가 수좌를 제접할 때 ‘차나 마시게[喫茶去]’라고 한 것은 이런 수행의 풍토 속에 차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차를 들어온 계층으로는 도당구법승, 숙위 유학생, 사비 유학생, 사신, 상인 등을 거론할 수 있다. 특히 도당구법승 중에서 선종에 관심을 두었던 수행승이 차를 유입한 계층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주로 해로를 이용했다. 혹 육로를 이용할 경우에 적지인 고구려와 만주를 거쳐 당나라로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해로를 이용하여 산둥반도의 등주登州나 절강에 위치한 명주明州로 들어가 양쯔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는 노선을 선택하였는데, 상선을 이용하거나 혹은 당이나 신라 사신들이 타는 사절단 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는 9세기 무렵 도당구법승들이 이용한 해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는 그가 838년 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9년 반 동안 당의 대운하, 동해안 일대, 양쯔강을 통해 내륙 등지를 여행하면서 그의 구법 순례의 일상을 기록한 구법 일지日誌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신라 거주민이 장강, 양주, 대운하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상황, 이들을 통해 그가 타고 갈 배와 물자를 공급받았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여 신라 거류민의 활약상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그의 구법 해상 해로는 살펴보면 첫째 산둥반도~발해~ 압록강 입구, 혹은 대동강 입구에 이르는 항로를 이용했고, 둘째 산둥반도~ 황해 인천 근해 덕물도에 이르러 연안의 강구江口에 이르는 항로와 셋째 강남 명주 혹은 온주 등지에서 출발 흑산군도, 고군산열도의 근해를 거쳐 한반도의 하구로 들어가는 해상항로를 이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구법승들에 의해 신라에 소개된 차는 초기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로 쓰였다. 이런 정황은『삼국유사』 「오대산보질태자전기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태자 보질태자와 효명태자가 예배하고 매일 아침 우통수 물을 길어다가 일만 진신문수께 차를 끓여 봉양하였다[兩太子竝禮拜, 每日早朝汲于洞水, 煎茶供養一萬眞身文殊].”라고 한 점이나 흥덕왕 때 충담선사가 삼화령 부처님께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올렸다는 고사古事에서 드러난다. 당시 구법승들이 당에서 가져온 완품完品의 차는 귀중품이며 선진문물로 인식했다. 차 문화 도입 초기 선종 구법승들이 들여온 차가 널리 확산하지 못한 연유는 교학이 우세하여 새로운 수행법이 안착하기 어려웠던 시대 환경과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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