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중국4-구양경무. 태허의 대승기신론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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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0 년 4 월 [통권 제84호] / / 작성일20-06-03 15:36 / 조회7,351회 / 댓글0건본문
김재란/철학박사. 고려대 강의교수
유학의 인(仁)과 도가의 자연무위(自然無爲)라는 소박한 사상이 바탕을 이루고 있던 중국의 소박한 사상적 풍토에 매우 이질적인 불교의 공(空) 사상이 들어왔던 것이 기원 전후의 일이다. 이 공이 무(無)가 아니라 연기(緣起)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거의 천 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지난번에 설명하였다.
연기이므로 공空
인도 불교는 그러나 중국의 사상적 바탕인 유학의 인과 도가의 자연무위 사상과의 상호 작용에 의해 중국화되었고, 화엄, 천태, 선 불교로 대표되는 중국 불교 단계에 도달하였다. 이 때 ‘중국화하였다’는 의미는 바로 인도 유식 불교의 ‘아라야식연기’가 중국 불교의 ‘진여연기’로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라야식 연기는 인도 유식 불교의 연기관을 가리킨다.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아라야식에서부터 전변한다는 것이 아라야식 연기설의 내용이다. 그 이전 초기 불교인 소승 불교에서는 사람이 ‘업(業)’을 원동력으로 하여 윤회한다는 ‘업감연기설’을 말하였다. 윤회란 사람이 죽는다고 끝이 아니라, 죽으면 다시 생명을 받아서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는 일을 반복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이 때 그 사람이 전생에서 착한 일을 행하면 다음 생에서 좋은 결과를 받고, 악한 일을 행하면 다음 생에서 나쁜 결과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자아가 없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인 과보를 받을 수 있을까? 소승 불교에 의하면, 이 과보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업이다. 업이라는 실체가 전해지고 또 인간은 죽으면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있기 때문에, 착한 행위를 하면 좋은 과보를 받고 악한 행위를 하면 나쁜 과보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 설명되는 것이다.
아라야식 연기설
인도 유식 불교에서도 이 구조는 변함이 없으나, 인간의 의식을 순간(찰나)마다 생성되었다가 바로 소멸되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새로운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 순간 소멸하는 의식이 어떻게 과거의 행위와 연결하여 미래의 업을 생성할 수 있을까? 유식 불교는 인간 마음속의 근본 의식인 아라야식을 설정함으로써 해결하였다. 우리 마음의 아주 깊고 깊은 속에 있으면서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넓은 영역의 의식, 심리학에서는 무의식, 심층의식이라고 부르는 근본 의식을 유식 불교는 아라야식이라고 부른다. 연기, 공(空)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이 수많은 원인과 결과의 고리로 이어진 관계망 속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초기 불교의 이러한 연기의 의미가 심층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저장된 종자(씨앗)가 현상계를 낳는다는 것으로 바뀐 것이 바로 유식 불교의 아라야식 연기설이다.
구양경무
유식 불교에 의하면, 우리 마음은 ‘8개의 의식(八識)’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우리 마음을 다섯 가지 감각 작용의 측면에서 포착하여, 눈으로 보고 아는 마음(안식眼識), 귀로 듣고 소리를 아는 마음(이식耳識), 코로 맡고 냄새를 아는 마음(비식鼻識), 혀로 핥고 맛을 아는 마음(설식舌識), 만져보고 아는 마음(신식身識)으로 나누고, 이것을 ‘앞의 다섯 가지 의식(전오식前五識)’이라고 부른다. 감각 작용에 의지하지 않고 지성, 감정, 의지, 상상력 등을 포괄하며 외적인 감각을 통괄하는 중추로서의 의식 작용인 제6식(의식意識), 제6식의 밑바닥에 있는 제7 마나식(자아 의식), 더 깊은 속에 인간의 모든 경험을 간직하고 모든 행위를 발생시키는 제8 아라야식(근원적인 마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유식 불교에서 과거의 경험들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힘의 형태로 머물러 있다가 현재와 미래의 경험에 작용하게 된다. 내가 내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경험은 그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모르는 사이에 내 속에 남아서, 미래의 경험에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한 번 방을 청소하고 나면 다음번에 내가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 이처럼 한 번의 경험은 마치 향을 태우면 옷에 그 향기가 스며들듯 모르는 사이에 자기 속에 흡수되는데, 이와 같은 경험 축적의 방식을 ‘훈습(薰習)’이라고 부른다. 스며들어간 향이 옷에 향기를 풍기는 작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축적된 경험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가능한 상태로 우리의 심층심리 속에 잠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잠재적인 힘은 마치 씨앗이 땅 속에 있는 동안 보이지 않지만 싹을 낼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같기 때문에 ‘씨앗(종자種子)’이라고 부르며, 아라야식 속에 저장된다. 훈습된 아라야식의 종자로부터 의식 활동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활동이 또다시 종자를 훈습시키는 끝없는 순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아라야식의 종자에서부터 이 세상의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난다고 보는 설명 방식이 아라야식 연기설이다.
진여연기설
이에 반해 진여연기설은 동아시아 불교의 전형적인 특징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참된 마음인 진심(眞心), 또는 진여(眞如)에 의거하여 생겨난다는 관점이다. 진심이나 진여는 대승 불교의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우주에 항상 변화하지 않고 존재하는 실체로서 우리의 생각이나 언어로 미칠 수 없는 근본을 가리킨다. 불생불멸한 실체에서 생멸 변화하는 현상들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진여연기설인데, 이는 사실 상호모순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표적인 진여연기설의 논서인 <대승기신론>에서는 이 모순을 “실체인 한 마음(一心)에 진여문과 생멸문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라는 설명으로 해결하고 있다. 이 한 마음에는 진여라는 문과 생멸이라는 문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즉 불생불멸한 측면과 생멸하는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 실체인 이 한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진여연기설다.
중국 근대 시기에 유식 불교와 <대승기신론>에 관한 논의가 다시 뜨거운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그 계기는 바로 서양 문화에 대한 대응방식이었다. 유식 불교는 교리가 논리적, 합리적이어서 칸트나 헤겔같은 서양 관념론을 대치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라고 여겨졌다. 반면에 <대승기신론>은 인간이 본래 불성을 가지고 있고 종교적 실천을 통하여 그 불성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를 엄격한 논리 체계를 가진 철학적 측면보다 수양과 관련된 종교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를 서양철학과 대응할 수 있는 철학적 논리 체계에 비중을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중국 전통의 깨달음에 기반을 둔 종교성을 강조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다. 아라야식 연기설인 유식 불교와 진여연기설인 <대승기신론> 중에서 어느 것을 진정한 불교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태허스님
중국 근대불교의 두 시각
1920년대 이래 중국 불교학계에서는 <대승기신론>의 성격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전개하였다. <대승기신론>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구양경무(歐陽竟無, 1871-1943)와 그를 중심으로 한 남경내학원(南京內學院) 학자들을 들 수 있고, 옹호하고 추종하는 인물로는 태허(太虛, 1889-1947)와 그를 중심으로 한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 학자들을 들 수 있다. 1922년 태허, 은태여(殷太如), 장죽장(蔣竹庄) 등은 남경에서, 구희명(邱晞明), 여징(呂澂), 웅십력(熊十力), 진명추(陳銘樞) 등은 내학원에서 논쟁을 벌였다. 구양경무는 <유식결택론(唯識抉擇論)>을 지어 <대승기신론>의 진여와 무명의 관계를 반박하였고, 태허는 <불법총결택담(佛法悤抉擇談)>을 지어 구양경무의 학설을 반박하고 <대승기신론>을 옹호하였다. 내학원 학자들은 인도 유식불교의 입장에서 <대승기신론>이 인도 불교, 특히 유식 불교의 정신과 다르므로, <대승기신론>이 대승불교의 참된 계승이 아니라 소승 불교, 또는 외도(外道)의 학설이라고 판정하였다. 반면에 불학원 학자들은 본체와 현상이 둘이 아니라는 체용불이(體用不二) 사상과 종교적인 신앙에 의거하여, <대승기신론>이 불교의 최고의 발전이라고 주장하였다.
1920년대 <대승기신론> 논쟁의 의미
구양경무를 중심으로 한 내학원 학자들이 중국 불교와 인도 불교의 차이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대승기신론>을 비판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인도 불교의 본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식 불교의 이성적이고 사변적인 논리 정신으로 당시 서양 철학의 유입에 대응하려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반면 태허를 중심으로 한 불학원 학자들은 <대승기신론>을 부정하는 것은 중국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때문에 <대승기신론>의 합법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그리고 여러 방법으로 <대승기신론>과 유식 불교가 서로 회통한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사실 <대승기신론>은 주로 본체와 현상의 종합이라는 교리, 그리고 진여를 우주의 마음(宇宙心)으로 파악하는 관념론에서 그 사상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대승기신론>이라는 책의 제목 자체가 ‘대승(大乘)’, 즉 진여에 대한 신앙의 깨달음이라는 의미이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사실은 모두 진여의 자기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깨달음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라는 의미이다. 기본적인 가정이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하는 진여에 대한 믿음이다. 실재하는 것은 진여뿐이고, 그 밖의 것은 비실재하고 단지 현상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진여라는 근원에서 바라보면 현상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참되고(眞) 동일하다(如). 따라서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기신론은 일원론이며, 필연적으로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불성을 가지고 있고 모든 사람이 결국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인 구원의 철학의 목표는 신앙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이 <대승기신론>의 결론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대승기신론>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날 수 있는 소지가 있게 된다. 그것은 바로 유식 불교가 본체와 현상, 진여와 현상, 법성과 법상을 구분하는 것이 해탈의 목표를 분명히 하게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봄과 동시에, 분석적,과학적 방법을 택함으로써 신앙에 의한 구원을 저평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한다. 즉 유식 불교의 입장은 <대승기신론>에서 본체와 현상, 진여와 현상, 법성과 법상을 일치시켜 봄으로써 모든 중생의 불성을 확신하는 보편적인 구원을 주장하는 것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구양경무가 법상과 법성을 구분하고 진여를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태허는 법상과 법성을 구분하지 않고 진여를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 근대라는 당시의 지적 분위기와도 연관된다. 서양 문화의 충격으로 동양의 전통 철학을 반성하게 되는 지성적인 분위기에서 지식인들은 지적인 이해가 없는 신앙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신앙을 강조하는 <대승기신론>은 거부되었다. 그리고 완전히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유식 불교가 관심을 끌게 되었던 것이다. <대승기신론>이 일원론, 또는 전체성의 철학인 데 반하여, 유식 불교는 엄밀하게 말하면 사적이고 개인적인 철학이다.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근대 시기에 전체성과 단일성의 철학보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철학이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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