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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마음작용 4-별경심소(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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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20 년 4 월 [통권 제84호]  /     /  작성일20-05-28 16:18  /   조회8,00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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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불교학자 ‧ 유식

 

고경 79호부터 마음작용[심소], 그 중에서도 별경심소[욕, 승해, 념, 정, 혜]의 ‘욕, 승해, 념’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도 계속해서 별경심소 중에서 정(定)과 혜(慧) 심소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정’이란 어떤 마음작용일까?

 

‘정(定)’이라고 하면 보통 범어 사마디(samādhi)의 음역인 ‘삼매(三昧)’를 기억하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들께서도 ‘정’보다는 ‘삼매’라는 용어에 친숙할 것입니다만, 저는 ‘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겠습니다. 정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대상에 집중하는 마음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관찰된 대상(所觀境)에 대해 마음 깊이 집중하는 마음작용’입니다. 제가 ‘정’심소를 이렇게 정의한 근거를 제시하겠습니다. 

 

먼저 유식의 완성자인 세친 보살이 저작한 <대승오온론>(한역)에서는 “관찰된 대상에 대해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작용이다.”주1)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세친 보살의 저작인 <유식삼십송>에 대해 안혜 보살이 주석한 <유식삼십송석>에서는 

 

“정이란 관찰된 사물들[대상]에 대하여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관찰된 사물[대상]’이란 <그것은 어떤> 덕성[공덕]이 있는가 혹은 <어떤 미혹의> 악성[과실]이 있는가라는 것이 관찰된 대상이다.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ekāgratā)’이란 단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지(智)의 의지처가 되는 작용을 갖는다.[지의 의지처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정[삼매]에 들어 있을 때만 있는 그대로 두루 알기 때문이다.”주2)

 

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즉 “관찰된 사물들[대상]에 대하여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식삼십송>에 대해 호법보살이 주석한 <성유식론>에서는 정(定)을 ‘전주불산심소(專注不散心所)’, 즉 ‘<관찰한 대상에> 오로지 기울여서 흩어지지 않게 하는 마음작용’이라고 하였습니다.주3) 또한 정(定)을 ‘심일경성’(心一境性, ekāgratā), 즉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머문[집중]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게다가 중국 명나라 시대에 활동했던 지욱스님도 

 

“이것[삼마지]은 정(定)이라고 번역[漢譯]한다. 관찰한 대상에 대해 마음이 오로지 기울여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고, 지(智)의 의지처이다.”주4)

 

라고 하여, 위의 두 주석서의 내용과 거의 동일합니다. 다시 말해 ‘정’심소는 “관찰된 대상에 대해 마음이 집중하는 마음이며, 지[지혜]를 생기게 하는 의지처”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심소를 ‘관찰된 대상에 집중하는 마음작용’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염, 정, 혜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추가하고자 합니다. 지난 호에서 념(念) 심소에 대해 설명했습니다만, 념은 ‘과거에 경험한 대상을 기억하는 마음작용’이기 때문에 원인이 됩니다. 반면 정(定)은 그 ‘기억한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하는 마음인 정(定)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지혜[慧]를 생기게 하고, 신심(身心)을 자유롭게 활동시키기도 하며, 마음을 정화하기도 하는 3가지의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定)도 선과 악에 대해 마음을 집중하기 때문에, 선악 양쪽에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선(善)한 대상에 집중하는 깊은 삼매[정]에 들 수도 있지만, 도둑이 주인이 깨지 않게 발소리을 내지 않으려고 집중하는 것도 정(定)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식에서 ‘정’ 심소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마음작용입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중)>(p.316)에서 ‘정’ 심소를 ‘전일한 것(專一)’라는 감산스님의 주석 구절을 인용하여 정의합니다. 

  

‘혜’란 어떤 마음작용일까요?

 

독자들께서는 ‘혜(慧, prajñā)’라고 하면 바로 ‘지혜’를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만, 유식에서는 반드시 지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그전에 우선 혜란 어떤 마음작용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혜란 ‘관찰된 대상(所觀境)을 선택하여 나누는 마음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를 살펴봅시다. 먼저 <대승오온론>(한역)에서는 “그것[사마디로써 관찰하고 있는 대상]이 어떤 법인가를 선별[간택]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주5)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유식삼십송석>에서는 ‘혜’심소에 대해 자세하게 주석합니다. 

 

“혜란 반야[지혜]이다. 이것(혜)도 <앞에서 언급한 정과 같이> 관찰된 사물[대상]에 대해 선별[간택]하는 것으로 바른 인식[량]에 의해 행해진 것, 그릇된 인식에 의해 행해진 것, 혹은 둘 다 아닌 다른 <인식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간택함[pravicaya, 명사]이란 간택하기[pravicinoti, 동사] 때문이다. 즉 <각각 존재에> 자상[독자적인 특성]과 공상[공통하는 특성]이 다양하게 혼재해 있는 것처럼 모든 법[존재]에 대해서 바르게 또는 그릇되게 변별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바른 인식이란 바른 도리이다. 그것[바른 인식]은 <신뢰할 수 있는> 스승의 가르침(성언량), 비량[추론], 현량[직접 지각]이다. 바른 인식에 의해 행해진 것이란 3종류의 바른 인식에 의해 생긴 것이다. 또한 그것은 <가르침에 대해서> 들은 것에 의해 성립하는 것[聞所成], <가르침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에 의해 성립한 것[思所成], 수습[수행]에 의해 성립한 것[修所成]이다. 이것들 중에서 ‘<가르침에 대해서> 들은 것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란 <신뢰할 수 있는> 스승의 가르침이라는 바른 인식에 근거한 것을 ‘들은 것에 의해 성립한 것’이다. 도리에 근거하여 생긴 것이 생각에 의해 성립한 것이다. 정[삼매]에 의해 생긴 것이 수행[수습[]에 의해 생긴 것이다. 

 

 

구미 금오산 마애 보살입상, 보물 제490. 경북 구미시 남통동 산24-1번지. 박호창 불자 제공.

 

그릇된 인식이란 신뢰할 수 없는 스승의 가르침, 그릇된 비량(非量), 잘못된 방식으로 수행한 정[삼매]이다. 그릇된 인식에 의해 행해진 것은 그릇된 인식에 의해 생긴 것이다. 생득적인 것과 세간적인 언어습관을 이해하는 것은 바른 인식에 의해 성립 것도 아니고 그릇된 인식에 의해 성립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것[혜]은 의혹을 제거하는 작용을 갖는다. 의혹을 제거한다는 것은 지혜에 의해 법[존재]들을 선별[간택]해서 확정을 얻기 때문이다.”주6]

 

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유식삼십송석>에서 주목할 주석 내용은 “관찰된 사물[대상]에 대해 선별[간택]하는 것”, “모든 법[존재]에 대해서 바르게 또는 그릇되게 변별하여 이해하는 것”, “혜는 의혹을 제거하는 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혜란 ‘관찰된 대상에 대해 선별하여 이해하는 것이며, 의혹[의심]을 제거하는 작용’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혜’는 3가지의 바른 인식수단[量]에서 생긴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즉 감각을 통한 직접적인 앎[인식]인 현량(現量), 추리에 의한 앎인 비량(比量), 신뢰할 수 있는 스승의 가르침으로 얻은 앎인 성언량(聖言量)입니다.

 

<성유식론>에서도 “관찰된 대상에 대해 간택(簡擇)을 본질(性)로 하고, 단의(斷疑, 의심을 끊는 것]를 작용으로 한다.”주7)고 주석합니다. 또한 지욱스님도 “관찰된 대상에 대해 ‘간별결택’하는 것을 본성으로 삼고, 의심을 끊는 것을 작용으로 삼는다.”주8)라고 주석합니다. 이처럼 지욱스님은 <성유식론>에서 주석한 ‘간택(簡擇)’을 ‘간별결택(簡別決擇)’이라고 주석하는데, 간택[간별결택]이란 ‘이것과 저것을 확실하게 판단하여 나누어, 확정적으로 선택하는 마음작용’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혜의 본성은 간택하는 마음작용입니다. 

 

그리고 혜의 심소도 선과 악의 양쪽에 작용합니다. 그렇지만 ‘의심[의혹]을 끊는 것’이 혜의 작용이기 때문에 역시 의혹[疑]의 번뇌를 단절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혜’를 문혜, 사혜, 수혜의 3종류로 나눕니다. 먼저 문혜(聞慧)란 신뢰할 수 있는 스승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 얻어지는 지혜입니다. 사혜(思慧)란 신뢰할 수 있는 스승으로부터 들은 것을 올바르게 생각하여 얻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수혜(修慧)란 문혜와 사혜를 바탕으로 올바른 정[삼매]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처럼 문혜에서 출발해 사혜를 거쳐 수혜로, 즉 혜[지혜]를 완성합니다.

 

그런데 세친보살은 혜의 심소를 말나식과 함께 작용하는 18개의 심소 중의 하나로 분류합니다. 혜가 어떻게 모든 것을 자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인 말나식과 함께 작용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혜의 심소가 선택하여 구별할 때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선택하여 구분하기 때문에’ 말나식과 함께 작용하는 심소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유식에서는 ‘혜’를 단순히 ‘지혜’로만 해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중)>(p.316)에서 ‘혜(慧)’을 ‘교묘한 지혜’(黠주9)慧)’라고 정의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별경심소 5가지에 대해 설명을 마쳤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5개의 별경 심소는 대상이 각각 다릅니다. 욕의 심소는 좋아하는 대상, 승해의 심소는 결정된 대상, 념의 심소는 일찍이 경험한 대상, 정과 혜의 심소는 관찰된 대상과 같이 각각 그 대상이 다릅니다. 그래서 ‘별경심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독자들께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식에서 이렇게 심소를 세세하게 나누어 분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중생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인 제법무아, 제행무상 등을 체험하여 미혹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깨달음에로 나아가는 방법 즉 지름길은 바로 파도와 같이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켜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최초의 심소가 바로 좋은 념입니다. 그래서 념에 의해 집중하는 마음인 정이 반드시 생깁니다. 그리고 안정되고 집중하는 마음인 정에 의해 혜가 반드시 생기는 것입니다.

 

끝으로 독자들께 작별의 인사를 올립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namaste 

 

 

주)

1) “謂於所觀事令心一境不散爲性.”(<대승오온론>, 대정장 31,848c18)

2) samādhir-upaparīkṣye vastuni cittasyaikāgratā/upaparīkṣyaṃ vastu guṇato doṣato vā/ekāgratā ekālambanatā/ jñānasaṃniśrayadānakarmakaḥ/ samāhite citte yathābhutaparijñāna/(Triṃśikā, ed by Lévi, p.25, 28-30)

3) “於所觀境令心專注不散為性.”(<성유식론>, 대정장 31,28b25)

4) “此飜爲定. 於所觀境. 令心專注不散. 而為體性. 智依此生.”(<대승백법명문론직해>, 속장경 48, 342c19)

5) “謂即於彼擇法爲性.”(<대승오온론>, 대정장 31,848c19)

6) dhīḥ prajñā/sā ’pi upaparīkṣya eva vastuni pravicayo yogāyogavihito ’nyatha veti/ pravinotīti pravicayaḥ yaḥ samyak mithyā vā saṃkīrṇasvsāmānyala kṣaṇeṣviva dharmeṣu vivekāvabodhaḥ / yuktiryogaḥ/ sa punarāptopadeśo ’numānaṃ pratyakṣaṃ ca/ tena triprakāreṇa yogena yo janitaḥ sa yogavihitaḥ/ sa punaḥ śrutamayaścintāmayo bhāvanāmayaś ca/tatrāptavacanaprāmāņyād yo ’vabodhaḥ sa śrutamayaḥ /yuktinidhyānaścintāmayaḥ/samādhijo bhāvanāmayaḥ/ayogo ’nāptopadeśo ’numānābhāso mithyāpraņihitaś ca samādhiḥ/tenāyogena janito ’yogavihitaḥ/upapattipratilambhiko laukikavyavahārāvabodhaś ca na yogavihito nāyogavihitaḥ/eṣa ca saṃśayavyāvartanakarmikā/saṃśayavyāvartanaṃ prajñāyā dharmān pravicinvato niścayalābhāditi/ete hi pañca dharmāḥ parasparaṃ vyatiricyāpi pravartante/(Triṃśikā, ed by Lévi, p.26, 8-18)

7) “於所觀境簡擇為性. 斷疑為業.”(<성유식론>, 대정장 31, 28c11)

8) “于所觀境. 簡別決擇 而為體性. 斷疑而為業用”(<대승백법명문론직해>, 속장경 48, 342c22)

9) 약은, 교활 할(黠): 약다, 교활하다, 간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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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불교학자. 유식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마음공부 첫걸음』·『왕초보 반야심경 박사되다』·『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마음의 비밀』·『유식불교, 유식이십론을 읽다』·『유식으로 읽는 반야심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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