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특별한 대상에 반응하는 마음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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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20 년 4 월 [통권 제84호] / / 작성일20-05-28 16:15 / 조회7,600회 / 댓글0건본문
강물 아래로 봄이 흐르듯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든가? 산천과 들에는 봄기운에 완연하지만 사람들은 포근한 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건강에 대한 불안은 물론이고 경제활동이 위축되면서 소상공인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무심한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바이러스의 창궐조차 무수한 생명활동 중에 하나일 뿐이다.
비록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있지만 자연의 흐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강물 밑으로는 잿빛 겨울을 녹이는 온기가 흐르고, 앙상한 나목의 잔가지에도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이렇게 흘러가고 변화하는 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진리이기에 이런 난관 속에서도 우리는 내일을 향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이 또한 영원하지 않고 흘러갈 것이며, 화사한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계절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돌아와 지난 호에 백일법문에서 다루고 있는 법상종의 유식설 중 변행심소(遍行心所)에 대해 살펴보았다. 어떤 감정이나 행위로 표출되는 심리작용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유념(有念)’, 즉 ‘생각 있음’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변행심소는 우리들의 마음에서 항상 작용하고 있지만 그 행상이 극히 미세하여 범부들은 그런 심소가 있는지 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이를 ‘무념의 염(念)’이라고 설명했다. 항상 작동하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변행은 항상 작용하고 있지만 어떤 형태의 업(業)으로 드러나지 않는 잠재의식이므로 달리 ‘무기식(無記識)’이라고도 부른다. 잠시도 쉬지 않고 작동하지만 행상이 너무 미세하여 겉으로 표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깊은 강물 밑으로 봄기운이 도도히 흐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번 호에 살펴볼 별경심소(別境心所)는 이상과 같은 변행심소와 대조적인 마음작용을 말한다. 앞서 살펴본 변행은 항상 작동하지만 인지되지 않는 심층적 작용이다. 하지만 별경은 특별한 경계에 반응하여 작동하며, 어떤 형태의 업(業)으로 표출되어 그 작용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행심소와 운영체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육위심소의 구성은 변행심소 5가지, 별경심소 5가지, 선심소 11가지, 번뇌심소 6가지, 수번뇌심소 20가지, 부정심소 4가지 등 총 51가지 마음의 작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 별경심소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여기서 ‘별경(別境)’이란 마음이 반응하는 별도의 경계, 특별한 대상을 말한다. 변행심소는 언제 어느 때나 항상 마음의 주체인 아뢰야식과 함께 작동하는 심소지만 별경심소는 별경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만났을 때만 마음(심왕)과 함께 작동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변행심소와 별경심소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누구나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의 작동원리에 대입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문자도 보내고, 사진도 찍고, 메모도 한다. 그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 메신저 앱이나 카메라 앱을 작동시켜야 한다. 하고 싶은 작업내용에 따라 해당 응용프로그램을 작동시키면 화면에는 자신이 실행한 앱의 작업내용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이용자는 스마트폰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있다. 각각의 응용프로그램은 작업내용이 고스란히 화면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용자들은 메신저나 카메라 등의 앱이 스마트폰을 움직이는 핵심요소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작동하려면 화면에 나타나는 그런 애플리케이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모든 스마트폰에는 운영체제(OS)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사용자가 스마트폰을 작동시키든 작동시키지 않든 운영체제는 언제나 작동하고 있고, 배터리를 소비하며 깨어 있고, 사용자가 요구하는 것을 즉시 실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다만 그런 활동은 화면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사용자는 아무런 작동도 없는 것처럼 느낄 뿐이다.
사용자는 문자를 보내기 위해 메신저를 작동시키고,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실행시키고, 메모를 하기 위해 메모장을 실행시킨다. 그 모든 응용프로그램이 작동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작동하고 있는 운영체제가 있기 때문이다. 운영체제에는 카메라를 어떻게 작동시킬지, 마이크로 들어오는 음성정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들이 모두 설계되어 있다.
스마트폰의 운영체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마음의 작용이 바로 인간의 심층심리를 구성하는 아뢰야식이다. 그리고 아뢰야식과 함께 항상 모든 사유작용에서 빠지지 않고 함께 작동하는 것이 다섯 가지 변행심소이다. 스마트폰의 운영체제가 하는 작업내용이 화면에 나타나지 않듯이 변행심소가 하는 작용도 인지되지 않고, 업의 형태로 표출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변행심소는 언제나 작동하고 있다. 사용자의 의도를 받아들여 작업할 내용을 결정하고[作意], 작업할 대상과 접촉[觸]하고, 대상의 정보를 받아들이고[受], 받아들인 정보를 분석하고[想], 완성된 정보[思]를 제공해 주는 것이 변행의 작용이다.
별경심소와 응용프로그램
이번 호에는 개별적인 대상에 대응하여 작동하는 별경심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변행심소는 마음의 왕인 아뢰야식이 움직일 때 늘 함께 작동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변행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다. 반면 별경심소는 항상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대상을 조건으로 작동하는데 ‘욕(欲)’, ‘해(解)’, ‘념(念)’, ‘정(定)’, ‘혜(慧)’라는 다섯 가지 심소가 그것이다.
여기서 ‘욕(欲)’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所樂境]에 대응하는 작용으로 선욕(善欲)과 악욕(惡欲)으로 구분된다. ‘해(解)’란 승해(勝解)라고도 하는데 대상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작용을, ‘염(念)’이란 ‘분명히 새겨 잊지 않는[明記不忘]’ 작용을, ‘정(定)’이란 전일하게 집중하는 작용을, ‘혜(慧)’란 교묘한 지혜의 작용을 각각 의미한다. 이와 같은 별경심소 각각에 대한 교학적 설명은 현재 『고경』에 연재되고 있는 허암 선생님의 ‘유식이야기’에서 매우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별경심소 각 항목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은 허암 선생님의 연재를 참고할 것을 권하며, 본고에서는 백일법문에 나타난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성철스님은 변행과 별경에 대해 “변행은 생각뿐이고 아직 업을 짓지 않은 것이지만, 별경은 각각 경계를 반연하여 선악업을 짓는 마음”이라고 둘의 차이에 대해 정의했다. 이런 설명은 감산덕청의 주석서인 『백법명문론논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감산덕청은 변행에 대해 ‘단지 사유작용일 뿐 업을 짓지 않는다(但念而未作)’고 설명했다. 하지만 별경에 대해서는 ‘각각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여(則別別緣境) 선업과 악업을 짓는 마음(作善惡業之心也)’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비유로 설명한 바와 같이 변행은 운영체제처럼 항상 작용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심층심리라면 별경은 각기 다른 대상에 대응하여 작용하며 업으로 표출되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별경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들 다섯 가지 마음작용은 대상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유식삼십송』에 따르면 별경을 ‘소연사부동(所緣事不同)’이라고 했다. 마음이 작용하는 대상[所緣]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마치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처럼 구체적인 대상에 대응하여 작동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크는 소리를 대상으로 작동하고, 카메라는 빛을 대상으로 작동하고, 자판은 입력하는 손가락에 대응하여 작동한다. 카메라가 음성을 담지 못하고, 마이크가 이미지를 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별경심소 역시 각각 자신에게 배대된 대상에만 작동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 광경
이처럼 별경심소는 언제나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 작동하는 마음이다. 스마트폰의 운영체제는 사용자가 무엇을 하든 간에 항상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카메라는 사진을 찍을 때만 작동하고, 전화기는 통화를 할 때만 작동한다. 다섯 가지의 별경심소 역시 이런 응용프로그램처럼 특정한 경계를 대상으로 작동하는 심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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