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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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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2020 년 5 월 [통권 제85호]  /     /  작성일20-06-01 16:58  /   조회7,34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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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내 친구가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가상현실 체험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건 실제의 상황이 아니니까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아주 높은 곳에서 발아래 펼쳐지는 멋진 풍경이 변화해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패러글라이딩에 빠지게 하는 매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그러나 점차 고도가 내려가면서 솟아 오른 절벽을 피해가야 하는 상황이 됐다. 조종을 잘 해 바위를 멋지게 피할 수만 있었다면 짜릿하고 멋진 경험이 됐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 가상현실의 한 장면 >


가상현실이어서 위험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처음과는 달리,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두려움에 몸이 굳어지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는 실제세계와 가상세계의 구분이 없어지는 체험이었다고 한다. 또, 의식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식 이전에 몸이 세계를 감각하면서 그 세계에 맞추어 몸이 움직이는 것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럼, 실제의 세계란 무엇인가? 실제의 세계는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피연생과彼緣生果의 연기론>


법계의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하여 생한다는 것을 인연생기因緣生起 혹은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는 연緣에 기대어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피연생과彼緣生果의 의미를 갖는다. 인연因緣에서 인因은 직접적 원인이고 연緣은 간접적 조건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피연생과란 직접적 원인인 인因이 간접적 조건인 연緣에 기대어 과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연緣이 아니면 과果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고, 연緣의 개입으로 인因은 과果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숙異熟이다.

 

  이처럼 연緣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연기론은 여타의 인과론과 다르다. 보통의 인과론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직접적 원인에만 거의 전적으로 주목한다.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어떤 불씨가 그 화재의 원인이었는지를 찾아내려고 한다. 인화물질이 주변에 있어서 불이 급속하게 번진 경우에는 인화물질이 불씨 자체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화재의 원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씨가 없었다면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므로, 인화물질을 화재의 원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피상적 세계관이 반영된 보통의 인과론이 취하는 입장이다.

 

불교의 연기론은 이와 상당히 다른 입장에서 인과를 바라본다. 하나의 씨앗이 싹이 되는 사건을 살펴보자. 싹이 나왔다는 것은 씨앗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므로, 싹이 나왔다는 사실은 씨앗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씨앗의 있었음이 싹의 나옴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싹의 나옴”은 “씨앗의 있었음”의 충분조건이 되지만, “씨앗의 있었음”은 “싹의 나옴”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씨앗의 존재가 싹의 나옴을 보장하지 않으므로, 씨앗이라는 인因으로 인해 싹이라는 과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분, 토양, 햇빛 등의 무수한 연緣이 씨앗이라는 인因에 침투하여 씨앗을 싹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연緣을 이루는 조건 중의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씨앗은 싹이 되지 않는다. 연緣을 이루는 모든 조건이 씨앗에 침투하여 씨앗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씨앗은 싹이 된다.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현상은 씨앗이라는 인因과 무수한 연緣이 서로 침투하여 서로를 변화시키는 상입(相入, mutual penetration)의 과정을 통해 가능해 진다. 그래서 과果는 인因과 같을 수가 없다.

 

<원자의 모습>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돼 있으며, 원자핵은 다시 양의 전하를 띠는 양성자(proton)와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neutron)로 이뤄져 있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질량이 거의 같으며 전자 질량의 1,800배 정도다. 따라서 원자의 질량은 99.9% 이상 원자핵에 몰려있다. 전자는 그 크기를 잴 수 없을 정도로 작아서 거의 점이라고 간주되며, 양성자는 반지름이 1 펨토미터(fm) 정도인데, 1 펨토미터는 1옹스트롬의 10만분의 1이다.

 

가장 간단한 수소원자는 하나의 양성자와 하나의 전자로 이뤄져 있으며 수소 원자의 반지름은 0.5옹스트롬 정도다. 수소원자의 반지름은 수소 원자핵을 이루는 양성자의 5만 배나 된다. 원자핵을 방울토마토의 크기와 비슷한 반지름이 1cm 인 공으로 늘린다고 하자. 그러면 수소원자는 반지름이 500m이고 지름이 1,000m인 구가 된다. 북한산 백운대의 높이가 837m이니, 아무도 이렇게 큰 인공물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원자의 모습이다.

 

이렇게 큰 구 안에 방울토마토만한 크기의 원자핵이 중심에 위치해 있고, 그 작은 영역에 원자 질량의 대부분이 몰려있다. 원자질량의 0.06% 만 차지하는 전자가 원자핵을 제외한 나머지 넓은 공간을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원자핵이 위치한 아주 좁은 영역을 제외하면 수소원자 내부는 거의 비어있는 공간이다. 이는 수소 원자 뿐 아니라 다른 원자도 모두 마찬가지여서, 우리 주변의 물질이 차지하는 부피의 대부분은 예외 없이 이렇게 텅 비어있다. 이렇게 비어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엄청난 압력을 받으면 전자가 원자핵으로 흡수되면서 압축될 수 있다. 그 결과,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이 되기도 한다.

 

<촉식觸識>


그렇다면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 주변의 물체나 우리 몸도 텅 빈 공간이다. 그런데 빈 공간인 우리 몸이 역시 빈 공간인 벽을 왜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가? 모든 물체가 거의 빈 공간이라도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들 사이의 정전기적 반발력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 물체를 구성하는 전자들 사이의 정전기적 반발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면서 커지기 때문에, 두 물체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지면 반발력은 거의 무한대가 된다. 이 정전기적 반발력 때문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가 벽을 구성하는 원자를 뚫고 지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피상적으로 그리는 세계는 이와 다르다. 우리 몸과 벽이 무언가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우리가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원자의 세계를 들여다본다면, 우리 몸이나 벽이나 모두 그 속이 텅 비어 있다. 그래서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나 중성미자는 텅 빈 공간인 우리 몸이나 모든 물체를 얼마든지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다. 내가 느끼지 못 할뿐,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중성미자가 우리 몸을 관통한다.

 

내 앞에 놓인 빈 공간으로 이뤄진 책상이라는 인因이 내 몸이라는 연緣을 통해 무언가가 꽉 차서 단단한 것으로 감지되는 책상이라는 과果로 나타난 것이다. 내 앞의 책상은 무언가로 꽉 차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촉각을 통해 책상이 무언가로 꽉 차 있다고 느낄 뿐이다. 단지 그것 뿐, 꽉 차 있는 물체는 어디에도 없다.

 

<이식耳識>


귀를 통한 경험인 이식耳識에 대해 생각해보자. 남이 하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성대가 떨리면서 발생하는 음파에서 시작된다. 공기의 진동을 통해 음파의 에너지가 나의 귀로 전달되고, 귀에 도달한 에너지가 고막을 진동시키고, 고막의 진동으로 발생하는 자극을 신경계가 뇌로 전달하고, 전달된 자극을 최종적으로 뇌가 해석함으로써 소리가 들리게 된다. 그러면 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내 뇌가 해석한 그 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소리가 발생해서 이를 듣게 되는 전 과정에서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음파라는 공기의 진동, 공기의 떨림뿐이다. 그래서 공기가 없는 달에 간다면 바로 옆에서 화산이 폭발해도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소리는 나의 중추신경계가 그려낸 것일 뿐이다.

 

인간은 대체로 20Hz에서 2만Hz까지의 진동을 감지한다. 이를 가청 주파수라고 한다. 박쥐나 돌고래는 훨씬 높은 진동수의 초음파를 들을 수 있다. 인간의 뇌가 해석하지 않는 공기의 진동을 박쥐나 돌고래의 뇌가 해석한다는 것이다. 모든 음파를 듣는 게 아니라, 박쥐든 돌고래든 우리든 들을 수 있는 것만을 듣는다.

 

소리라는 실체가 있어서 나에게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다. 소리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진동을 나의 뇌가 해석한 것이다. 공기의 진동이라는 인因이 나의 몸을 비롯한 무수한 연緣을 거치면서 소리라는 과果가 만들어진 것이다.

 

< 안식眼識 >


안식을 살펴보자. 논리적으로는 이식과 마찬가지다. 내 눈 앞에 놓인 사과를 본다는 과정은 사과에서 붉은 색 파장의 전자기파(electromagnetic wave)가 나오면서 시작된다. 전자기파가 내 눈의 수정체를 거쳐 망막에 도달하고, 그 에너지가 망막 신경을 자극하고, 시신경이 이 자극을 뇌로 전달하고, 뇌가 이를 해석함으로써 물체가 나타난다.

 

다시, 나의 뇌가 해석한 붉은 색은 어디에도 없다. 나의 뇌가 붉은 색이라고 감지하는 전자기파가 있을 뿐이다. 전자기파라는 인因이 수정체, 망막, 시신경, 뇌 등의 연緣을 거치면서 안식이라는 과果로 나타난 것이다. 색깔은 뇌가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뇌가 해석할 수 있는 색깔인 가시광선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색깔이라는 실체가 있어 나에게 색깔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색깔은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전자기파를 나의 뇌가 해석한 것이다.

 

<일체유심조 - 능숙한 화가가 그리는 가상현실>


우리의 감각이 느끼는 그대로의 외부 세계가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꽉 차 있어 딱딱하다고 느끼는 책상은 텅 빈 공간이고, 나에게 들리는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고, 사과의 빨간 빛은 전자기파일 뿐이다. 그 모두는 우리의 마음이 그려낸 것이다. 꽉 찬 물체도 없고, 소리도 없고, 빨간 색도 없다. 그건 모두 두려움에 떨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하게 했던 가상현실과 같다.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무無색성향미촉법이다. 부처님의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게 해 주신 성철 스님을 생각하며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의 게송으로 글을 마친다.

 

심여공화사 心如工畫師  마음은 재주가 많은 화가와 같아서

능화제세간 能畵諸世間  능히 일체의 세간을 다 그려낸다.

오온실종생 五蘊實從生  오온이 모두 마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니

무법이부조 無法而不造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법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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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고려대학교 과학기술대학 물리학과 교수. 연구 분야는 양자정보이론. (사)한국불교발전연구원장. <산하대지가 참 빛이다 (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양형진의 과학으로 세상보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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