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의 세계]
문수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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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자 / 2020 년 5 월 [통권 제85호] / / 작성일20-06-01 16:41 / 조회8,487회 / 댓글0건본문
유근자
고창 문수사는 자장 율사(590-658)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는데 사찰의 가장 위쪽에는 문수전文殊殿이 있다. 법당 안에는 등이 구부정하고 머리를 삭발한 노승老僧의 모습을 한 석상石像이 있는데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상으로 알려져 있다.
문수신앙처로 이름난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 동자상에서 발견된 중수 때 남긴 원문願文에 의하면 “1599년(선조 32)에 ‘동자문수童子文殊 1존’과 ‘노문수老文殊 1존’을 중수한다.”는 내용이 있다. 동자 모습의 문수 보살상은 상원사 문수전에서 볼 수 있는데 ‘노老문수’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여러 기록에서 문수 보살은 동자, 노승,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과연 ‘노老문수’는 어떤 모습일까.
‘노인’ 문수보살상
2018년에 문수사 대웅전과 명부전에 보물로 지정된 존상들을 기록하는 사업을 진행하며 고창 문수사를 찾게 되었다. 문수전에 참배하러 들어간 순간 ‘아, 이 분이 노승의 모습을 한 문수 보살이구나!’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사진 1).
사진 . 고창 문수사 석상
「문수사 창건기(1758년)」에 의하면 “신라 초기 자장대사가 이 절을 창건했는데 여러 번 병화로 불타버렸고 남은 것은 오직 문수 보살 석상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또 다른 기록인 「고창현 축령산 문수사 한산전 중창기(1843)」에 의하면 “자장 율사가 중국에서 귀국길에 이 곳을 지나다가 중국의 청량산과 비슷해 절을 짓고 석불상을 조성해 문수사라고 이름했다.”고 전한다.
문수사 석상은 현재 일부는 땅 속에 매몰되어 있어 민속학자들은 ‘땅에서 용출하는 미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수사의 문수전 석상은 노승의 이미지를 한 문수보살상으로 여겨진다. 청량산 문수사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문수신앙처와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유일하게 남은 석상을 문수보살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을 기록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하로 긴 둥근 상호는 볼이 통통해 언뜻 보면 동자와 유사한 느낌을 주지만, 끝이 아래로 처진 눈썹과 구부린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큰 귀는 나이든 노승을 연상시킨다. 특히 y자로 여민 옷자락 위에 상하로 놓인 가냘픈 두 손에서는 노승의 이미지가 더욱더 강하게 느껴진다.
‘동자’ 문수보살상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 모셔진 문수 동자상(사진 2)은 우리나라 문수신앙을 대표하는 상으로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의 병 치유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 경전을 간행하기 위해 간경도감을 설치했던 세조는 스스로를 ‘불제자’로 칭했으며 원찰로 1466년에 상원사를 중창했다. 이 같은 중창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국보 제292호로 지정된 「상원사 중창권선문(1466년)」이 있다.
세조가 상원사로 가는 도중 계곡에서 목욕할 때 등을 밀어주었다는 문수 동자를 형상화했다는 설화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게재된 것으로 후대의 기록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상원사 문수 동자상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세조의 딸 의숙공주(1441-1477)가 그의 남편 정현조(1440-1504)와 함께 ‘지혜로운 아들을 얻기 위해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453년에 혼인한 의숙공주 부부에게 13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던 것은 세조의 병만큼이나 왕실의 근심거리였을 것이다.
문수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고자 했던 신앙 형태는 조선 후기까지도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1691-1756)도 그의 어머니가 삼각산 문수사에서 문수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문수’로 명명했다는 설에서도 유추가 가능하다. 30대 중반까지 아들이 없던 공민왕이 연복사에서 문수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 왕실에서의 문수신앙을 엿볼 수 있다.
동자 모습을 한 문수 보살상은 <금강정경유가문수사리보살법>에 “문수사리 5계동자[五髻童子, 5개의 상투를 가진 동자] 형상을 그리는데 몸은 황금색이고 갖가지 영락으로 장엄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금강검金剛劍을 쥐고 왼손으로는 경전을 들고 있다.”는 내용에 근거를 둔 것이다.
1466년에 조성된 상원사 문수 동자상은 5개의 상투 대신 2개만 표현했고 지혜를 상징하는 금강검과 경전 대신 설법인을 짓고 있을 뿐이다. 요나라(907-1125) 때 조성된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의 문수 보살상(사진 3)은 지물인 금강검과 경전은 없어지고 일부만 남아있지만 5개의 상투가 표현된 것은 ????금강정경유가문수사리보살법????의 내용과 부합된다.
사진 . 5계 동자상
강릉 보현사는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문의 선승이었던 낭원 대사가 주석했던 곳으로, 경내에는 940년에 건립된 그의 사리탑과 탑비가 남아 있다. 보현사는 문수사와 함께 보현 보살과 문수 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건립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강릉부사 맹지대가 강릉의 역사와 인문지리 등을 엮어 1788년(정조 12)에 편찬한 <임영지臨瀛誌>에는 보현사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이 전하고 있다. “돌로 된 배에 실린 문수 보살상과 보현 보살상이 바다를 건너와 한송사와 함께 보현사가 일시에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즉 두 보살상을 모시기 위해 보현사와 한송사가 창건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한송사의 옛 명칭은 문수사로 <삼국유사>에도 이곳의 석탑에 대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강릉 보현사의 ‘노老 문수’ 보살상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문수사는 강릉부 동쪽 해안에 있다. 이곡의 「동유기」에는 ‘사람들이 문수 보살과 보현 보살 두 석상이 땅에서 솟아나왔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아마 조선 후기에 편집된 <임영지>의 내용은 이것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보현사에는 1599년에 상원사 문수동자상과 함께 중수된 나무로 조성된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3호로 지정된 보살상이 있다. 필자는 2017년 10월에 보현사 보살상의 보물 승격을 위한 조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때 새로운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상원사 문수 동자상에서 발견된 1599년 중수기 속의 ‘노老 문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조사할 당시 이미 대부분의 복장물은 유형문화재 지정 때 개봉되어 조사된 상태였다. 보살상에서 꺼낸 복장물 가운데 후령통만 황초폭자에 싸인 채로 보관 중이었다. 후령통을 감싼 황초폭자를 열자, 쪽물을 들인 비단 천에 붉은 글자로 쓰인 「조성기」가 드러났다.
후령통을 감싼 채 황초폭자 안에 싸여 있던 보살상을 중수한 자료를 보는 순간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1599년 중수기와 짝을 이룬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 필자가 쓴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서울:불광출판사, 2018)를 가지고 갔기 때문에 상원사 문수보살상의 기록과 대조해 보았다. 상원사의 경우 ‘童子文殊一尊, 老文殊一尊’이라 했고 보현사의 경우 ‘老文殊佛像一尊, 童子文殊像一尊’이라고 해 동자문수와 노문수의 차례만 다르게 표기했다(사진 4). 또한 「보현사중수기」에는 노문수보살상을 ‘노老문수 불상’이라고 표현했다.
보현사 목조보살상(사진 5)은 고개를 앞으로 숙여 옆에서 보면 고창 문수사 문수전의 문수 보살상처럼 나이든 노승을 떠올리게 한다. 상원사 문수 동자상은 오른손을 위로 들고 있다면 보현사 문수 보살상은 왼손을 위로 들고 있어 서로 대칭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상원사 문수 동자상은 어린 아이의 당당함이 느껴진다면, 보현사의 노문수 보살상은 참선에 든 노스님을 연상시킨다.
두 보살상이 1466년에 함께 조성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1599년 중수 당시에는 함께 상원사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보현사의 노문수 보살상은 대대적인 수리를 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노승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어깨에까지 내려오는 머리칼과 신체를 장엄했던 장신구가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보현사의 노문수 보살상으로 추정되는 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향후 발표될 논문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사진 5. 보현사 문수보살상, 1599년 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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