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책의 향기]
티베트불교는 왜 중관을 중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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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조병활) / 2020 년 5 월 [통권 제85호] / / 작성일20-06-01 17:13 / 조회7,784회 /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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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火中牛 | 불교학자·자유기고가
티베트에 불교는 언제쯤 전래됐을까? 적지 않은 학자들은 28대 짼뽀(왕의 티베트식 칭호) 하토토리낸짼 당시 불교가 들어왔다고 지적한다. 『바세』, 『부뙨불교사』(1322), 『왕조명경王朝明鏡』(1388), 『투깐 교의론敎義論』(1801) 등 티베트 고대 역사서들도 그렇게 주장한다. 『바세』 첫머리에 나오는 기록을 보자.
사진1. <까따까, 정화의 보석> 한글판, 담엔북스
“부처님 가르침이 어떻게 티베트에 전파됐는지에 관한 문서. 토번에 불법佛法이 처음 나타난 것은 짼뽀 하토토리낸짼 시대며, 짼뽀 송짼감뽀(617-629-650) 통치시기에 [부처님 가르침의] 큰 일이 시작됐으며, 짼뽀 치송데짼(742-755-797) 시대에 교의敎義가 발전해 번창했다. 짼뽀 치죽데짼(치랄빠잰, 재위 815-841) 당시 [경문의 번역에 관한 용어와 규칙 등을] 혁신해 확정했다. 하토토리낸짼 시대 처음 나타난 불법과 관련해 이야기가 전한다. 금니金泥로 쓰여진 범어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이 들어있는 상자가 하늘에서 국왕 앞에 떨어졌다. [당시 누구도 그것이] 불교의 물건인지 본교의 물건인지를 잘 몰라 상자 이름을 ‘신비하고 신령스러운 물건’이라 부르고는 ‘깨끗한 옥돌’과 ‘금빛 나는 음료’ 등을 바쳤다. 그리곤 유부라강 궁전의 창고에 비밀스레 모셨다.”
사진1. <까따까, 정화의 보석> 티베트어판
“불교의 물건인지 본교의 물건인지를 잘 몰라 상자 이름을 ‘신비하고 신령스러운 물건’이라 부르고는 ‘깨끗한 옥돌’과 ‘금빛 나는 음료’ 등을 바쳤다.”는 기록이 웅변하듯 하토토리낸짼 시대 불교는 티베트에 알려진 정도에 불과하다. 전래라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물론 어떤 지역에 갓 전파된 종교나 사상이 곧바로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이 무슨 종교이고 사상인지는 알 수 있어야 ‘전래傳來’라 할 수 있다. 티베트 최고最高 역사서 가운데 한 권으로 평가되는 『푸른 역사』도 이 점을 지적했다.
사진2: <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 한국어판, 운주사
“하토토리낸짼 재위 당시 『보협경요육자진언寶篋經要六字眞言』과 『제불보살명칭경諸佛菩薩名稱經』 등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 하토토리낸짼 시대 정법正法이 티베트에 시작된 정황은 경전만 있고 [경전을] 쓰는 것, 읽는 것, 설명하는 것 등은 없었다. 송짼깜뽀 시기 비로소 톤미삼보쟈를 인도에 파견해 하릭빠셍게라는 스승에게 [범어] 문자와 말 등을 배우게 했다. … 모든 백성들이 문자와 「재가도덕규범16조」를 배웠다. 새롭게 불교의 문에 들어오는 사람들 뿐 아니라 다른 선법善法도 매우 성했다. 티베트 지역이 선량善良하게 되었다.”
사진2: <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 티베트어판
『푸른 역사』가 지적한대로 하토토리낸짼 당시엔 “경전이 하늘에서 떨어진” 정도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경전인지도 제대로 몰랐다. 불교가 전래됐다고 말하기엔 충분치 않다. 사실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가 하루아침에 어떤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즉시 이식移植되지는 않는다. 오랜 기간의 전파기간을 거쳐야 된다. 고대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어떤 사상이나 종교가 새롭게 이식된 지역에 뿌리내리려면 대개 전파傳播 → 공인公認 → 발전發展 → 토착화 단계를 거친다. 전파된 후 곧바로 공인되지도 않고, 공인되는 즉시 발전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하토토리낸짼 시대 불교는 티베트에 그 존재가 알려진 정도로 봐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고대 문명이 태동한 나라의 하나인 인도는 티베트 바로 옆에 붙어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라는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이 티베트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다. 상인들을 통해서든 티베트와 인도를 왕래하는 사신들에 의해서든 불교의 존재를 티베트 사람들은 듣거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파된 종교나 사상이 현지現地 사람들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어느 정도 끼칠 때 ‘공공 기관의 문서’에 기록된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역사서 같은 공식 문서에 기록된 것을 공인公認이라 부른다.
사진3. <현중장엄론 역주>, 불광출판사
게다가 불교가 전래됐다고 표현하려면 ‘불佛’을 상징하는 불상, ‘법法’을 표상하는 경전, 본토 출신 ‘출가자[승僧]’가 없으면 이국異國의 출가자 등 최소한 세 가지는 완비完備돼야 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 권제18에 기록이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전진의 부견 왕이 사신과 순도 스님을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소수림왕이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 4년 아도 스님이 왔다. 5년 봄2월. 처음으로 초문사를 세우고 순도 스님을 모셨다. 또 이불란사를 창건하고 아도 스님을 모셨다. 이것이 해동 불법의 시작이다.” 불상과 경문 그리고 사찰을 세웠던 때를 불법의 시작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여기서 시작은 공인公認을 말한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소수림왕 당시 공인되기 이전, 요동 지방 등 고구려엔 불교가 많이 알려지거나 전파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티베트 역사에서 언제를 전래로 봐야할까? 불·법·승이 구비具備된 시기는 언제쯤일까? 네팔 출신의 치쭌 공주khri btsun ong co가 송짼감뽀와 결혼하기 위해 라싸에 도착한 639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녀는 석가모니 8세 등신부동금강상等身不動金剛像, 미륵법륜彌勒法輪 등을 모시고 라싸에 도착했다. 641년 라싸쭉라깡, 즉 조캉사원[대조사大昭寺]을 세웠다.
전통종교인 본교와 대립·갈등하는 등 여러 파란과 곡절을 겪으며 토번의 불교는 서서히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 나갔다. 불교 전래를 막았던 본교는 지속적으로 태클을 걸었다. 몇 차례의 법난法難도 발생했다. 갈등과 대립은 마지막 짼뽀 랑달마(재위 841-846) 때까지 이어진다. 랑달마가 불교를 탄압한 것도, 랑달마 자신이 살해된 것도 이 갈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650년 송짼감뽀가 타계하고 짼뽀 치송데짼이 764년 삼예사를 건립할 때까지 - 사료史料 부족으로 불교 상황을 정확히 모르지만 – 불교에 크나큰 발전은 없었다. 티베트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조손삼법왕祖孫三法王’이라는 말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송짼감뽀, 치송데짼, 치죽데짼(치랄빠잰) 등 3명의 짼뽀 재위 당시 불교가 발전했기에 붙여진 명칭이기 때문이다.
사진4. <해탈장엄론>, 티베트어판
새로운 전기는 치송데짼 시대인 8세기 중후반 적호(샨타락쉬타), 연화생(파드마삼바바), 연화계(까말라씰라) 등이 잇따라 티베트에 들어오면서 마련된다. 삼예사 건립과 삼예종론(792-794년)을 거치며 불교는 완전히 정착된다. 그러다 랑달마의 폐불(841-846)을 겪는다. 폐불 진행 과정에 랑달마는 살해되고, 토번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군소 지방 정권이 난립했으며, 불교는 130여년의 침체에 빠진다. 산의 정상에 올라 높이를 더 보태던[등봉조극登峰造極] 최고의 경지境地에서 직하直下했다. 융성에서 쇠퇴로의 변곡점이 됐던, 당나라 무종의 회창폐불(會昌廢佛, 844-846) 당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토번 시기의 티베트불교는 대략 공인기(639-650), 탐색기(651-763), 발전기(764-840), 쇠퇴기(841-846) 등 4기로 나눌 수 있다. 송짼감뽀 시대부터 랑달마 시대까지의 불교를 통틀어 ‘전홍기前弘期 불교’라 부르기도 한다. 당시 불교계의 주류 사상은 무엇일까? 『바세』의 기록이 주목된다.
사진5. <티베트 불교철학>, 불교시대사
"돈문파가 점문파의 말에 대해 대답을 못했기에 꽃을 바치고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짠뽀가 ‘돈문파의 일시에 들어가는 법을 수행하면 십법행十法行에 어긋나므로 행하지 말고, 나와 다른 사람의 배움과 수행의 문을 막으면 마음이 가라앉아 흐리멍덩해지고, 붓다의 가르침 역시 쇠퇴해진다. 따라서 불교를 보는 관점은 나가르주나의 그것을 따르고, 수행은 세 가지 지혜에 의지해 지와 관을 수행하도록 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게다가 치송데짼 시기 편찬된 『댄까르마목록ldan dkar ma dkar chag』에 용수의 논저들, 지장(즈나냐가르바, 적호의 스승)·적호·연화계의 주석서들이 들어 있다는 점도 이를 방증傍證한다. 『중관이제론』, 『중관장엄론』, 『중관광명론』 본송本頌과 주석서들도 당시 이미 번역돼 있었다. 청변(바바비베카)의 『반야등론般若燈論』, 관음계(觀音戒, 아왈로끼따브라따)의 『반야등론주』, 불호(붓다빨리타)가 『중론근본송』을 주석한 『불호주』, 적천(샨티데바)이 저술한 『입보리행론』과 『대승집보살학론』 등도 『댄까르마목록』에 기재되어 있다. 중관사상 연구에 필요한 전적들이 당시 이미 모두 티베트말로 옮겨져 있었지만 적호와 연화계 사제師弟의 저서가 주로 주목받았다. “8세기 경 요가행과 중관을 융합한 적호의 중관사상이 티베트에 처음 소개된 이래, 그의 중관사상은 이후 약 400년 동안 흔들림 없이 꽃을 피웠다. 그의 중관 전통은 진나(디그나가)와 법칭(다르마키르티)의 논리-인식론적 전통을 고도로 수용한 것이었다.”
사진6. <선설장론> 티베트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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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랑달마의 폐불 이후 티베트 중앙지역, 즉 라싸를 중심으로 한 위dbus 지방과 제2의 도시 시가체를 중심으로 한 짱gtsang 지방에는 승가 조직이 사라졌다. 폐불의 여파로 사찰과 출가자들을 보기가 힘들어 졌다. 재가자들은 신앙을 숨겨야 했다. 846년의 토번 멸망과 함께 침체된 불교는 978년 이후 비로소 서서히 회복된다. 이 때부터 1950년 이전 까지를 ‘후홍기後弘期 불교’라 부른다. ‘후홍기의 시작을 언제로 보느냐’에는 네 가지 관점이 있다.
사진7. <람림, 깨달음의 길을 말하다>, 부다가야
첫 번째, 티베트 암도 지방에 머물던 라첸공빠랍살(952-1035)이 위짱 지역에서 이 지역으로 피난 온 스님들로부터 구족계를 받은 973년부터라는 것으로 이는 『부뙨불교사』의 저자 부뙨(1290-1364)의 주장이다; 두 번째, 암도 지방 단딕 사원(dan tig dgon pa, 중국 청해성靑海省 화륭현化隆縣에 위치)에 머물던 라첸공빠랍살이 위짱 지역에서 온 제자 루메출침세랍 등 10명에게 구족계를 준 978년부터라는 것으로 이는 아티샤의 제자 좀된빠(1005-1064)가 제기한 것이다; 세 번째, 대역경사 린첸상뽀(958-1055)가 밀교와 관련된 전적들을 번역하던 시기부터라는 지적이다; 네 번째, 랑달마의 5세손으로 후일 출가한 구게gu ge 왕국의 초대 국왕 예세외(965-1036)가 11세기경 3명의 인도 스님들을 초청해 계맥을 이은 시기부터라는 설명이다. 암도 지방에서 위짱 지역으로 계율이 전파된 두 번째를 ‘하로홍전下路弘傳[동율東律]’이라는 의미의 ‘둘바맷룩‘dul ba smad lugs’으로, 위짱 북쪽에서 계맥이 전승된 네 번째를 ‘상부율전上部律傳[서율西律]’이라는 의미의 ‘돗둘stod ’dul‘이라고 부른다. 네 가지 가운데 978년 라첸공빠랍살이 루메출침세랍에게 구족계를 준 이후부터를 후홍기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사진8. <대원만 수행요결> 한글판, 운주사
후홍기 불교의 성장은 역경사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대표적 인물이 옥로얍세rngog lo yab sras, 즉 옥렉뻬세랍과 옥로덴세랍(1059-1109)이다. 전자는 숙부, 후자는 전자의 조카이자 제자다. 옥렉뻬세랍은 린첸상뽀와 함께 역경을 했고, 1042년 티베트에 온 아티샤(982-1054)를 따라 배웠다. 역경사 낙초출침갤와(1011-?)와 더불어 아티샤의 주요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받는 그는 특히 중관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아티샤에게 청변의 『중관심론中觀心論』과 그 주석서인 『사택염思擇焰』을 티베트어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했고, 본인도 참여했다. 아타샤가 입적한 지 20여 년이 지난 1073년 그는 11-12세기 티베트불교 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상푸네우톡 사원을 건립했다.
3년 후[1076] 그는 조카에게 비구계와 옥로덴세랍이라는 법명도 주었다. 옥로덴세랍은 삼촌의 기대에 부응했다. 옥로덴세랍은 인도로 유학 가 17년 동안(1076-1090) 캐시미르에 머물며 산스크리트어, 현종, 밀종 등을 세밀하고 광범위하게 배우고 연구했다. 귀국한 그는 『양결정론量決定論』, 『보성론』, 『법법성론』, 『중변분별론』, 『현증장엄론』, 『장엄경론』 등을 티베트 말로 옮겼다. 이들 사제는 인명因明을 중시한 것이 특징이다. 요가행중관자립파에 속하는 적호와 연화계의 사상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많았다. 물론 『중관심론』과 주석서인 『사택염』을 번역해 달라고 요청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부행중관자립파에 속하는 청변의 사상에도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결국 중관귀류파 보다는 중관자립파 연구에 보다 집중했다. 티베트불교 전홍기에 휴행했던 요가행중관자립파 체계를 잊지 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옥로덴세랍이 캐시미르에서 공부하던 3년차인 1079년 무렵 티베트에서 새로운 유학생 한 명이 캐시미르로 왔다. 파찹니마닥빠(1055-?)다. 둘은 캐시미르에서 같이 공부했다. 서로 알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옥로덴세랍이 인명因明과 유가행중관자립파에 관심이 많았다면 파찹은 월칭(찬드라키르티)의 사상에 흥미를 보였다. 1100년 경 티베트로 돌아온 파찹은 월칭이 지은 『입중론入中論』, 『근본중송(중론)』에 대해 월칭이 주석한 『명구론明句論』, 제바의 『사백론四百論』, 『사백론』에 대해 월칭이 주석한 『사백론주』 등을 번역하고 개정했다. 동시에 치송데짼 시기 번역된 용수의 저서들을 새롭게 보완하거나 개정했다. 그는 특히 논리학적 인식론으로 중관의 근본요지를 설명하려는 시도 보다는 귀류적인 방식으로 공성을 논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의 문하에서 중관귀류파는 새롭게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꺄롤뻬돌제(1717-1786)도 그의 『교의론敎義論』에서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사진9. <친우서>, 운주사
“앞 시대의 대역경사 파찹니마닥빠 역시 캐시미르에서 23년간 공부한 뒤 ‘세르끼고차(까나까와르만)’라고 불리는 대학자를 초청했다. [파찹은 세르끼고차와 함께] 중관 논서를 많이 번역했으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제자들은 가르침을] 들었다. 파찹의 4대 제자 등 유명한 제자들이 많은 나타났다. 티베트에서 월칭 계통의 중관 해석은 이로부터 더욱 발전했다.”
중관귀류파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던 이 시기 어느 때 중관자립파(dbu ma rang rgyud pa, 스와딴드리까)와 중관귀류파(dbu ma thal ’gyur ba, 쁘라상기까)를 뜻하는 티베트어 ‘우마랑귀빠’와 ‘우마탈규르와’라는 용어도 창안되어 정착됐다. 파찹의 제자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유가행중관자립파의 지위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관자립파가 세속제와 승의제를 구분하고 세속제 분상分上에서 인식(유가행파)과 외경(경부행파)의 존재를 인정하고, 승의제 분상分上에서 부정하는 방식은 에둘러 본질을 설명하는 방식에 가깝다. 조금씩 이해해 정상에 올라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400년 동안 티베트에서 환영받아온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이것일 수 있다.
사진10. <불교논리학의 향연>, 불교시대사
반면 중관귀류파의 방식은 빙빙 둘러 설명하는 요로설선繞路說禪 방식을 비판하고 곧바로 본질에 들어가는 것에 가깝다. 개념화된 지식과 언어가 오히려 사람들을 호도할 수 있다며 곧장 본성本性을 철견徹見해 진제를 체득하도록 하는 이 방식도 가유假有는 인정한다. 주의할 것은 중관자립파들 역시 중관의 견해와 입장을 공유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근본중송(중론)』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해석상의 문제, 나아가 용수의 문헌을 어떻게 설명하고 교육할 것인가에 대한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 귀류파와 다른 입장을 가졌을 수 있다.
사진11.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 불교시대사
그러나 쫑카빠는 다르게 보았다. “청변의 자립논증 방식을 월칭이 비판한 것은 현상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낸 것”이며, 그래서 “『반야경』이 설한 공성에 대해 믿을 만한 견해를 드러낸 용수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꿰뚫고 있는 것은 귀류파들 뿐이며, 자립논증파는 미세하게 실유론을 주장하고 있다. 자립논증파의 견해로는 윤회를 벗어나 해탈하는 것조차 확신할 수 없다.”고 쫑카빠는 지적했다. 지장, 적호, 연화계, 청변 등은 어느 순간에 ‘실유론자實有論者’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과연 실유론자인가? 중관 해석의 새로운 문을 연 쫑카빠의 관점이 하나의 ‘교조敎條’가 된 것은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사진12. <까말라씰라의 수습차제연구>, 불교시대사
아무튼 현재 티베트불교의 사상적 중심은 누가 뭐래도 쫑카빠의 견해를 계승한 겔룩파다. 중관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티베트불교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다행히 최근 우리나라에는 ‘티베트불교 사상’을 깊이 연구해 소개하거나, 원서를 번역한 책들이 적지 않게 출간되어 있다.
사진13. <적호의 중관장엄론>, 여래
『께따까, 정화의 보석』(서울:담앤북스, 2020, 사진 1), 『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서울:운주사, 2015, 사진 2), 『현증장엄론 역주』(서울:불광출판사, 2017, 사진 3), 『고귀한 가르침의 여의주 해탈장엄론』(서울:운주사, 2012, 사진 4), 『티베트 불교철학』(서울:불교시대사, 2008, 사진 5), 『불경의 요의와 불요의를 분별한 선설장론』(서울:운주사, 2014, 사진 6), 『람림, 깨달음의 길을 말하다』(부산:부다가야, 2019, 사진 7), 『대원만 수행요결』(서울:운주사, 2013, 사진 8), 『친우서』(서울:운주사, 2018, 사진 9), 『불교논리학의 향연』(서울:불교시대사, 2016, 사진 10),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서울:불교시대사, 2012, 사진 11), 『까말라씰라의 수습차제 연구』(서울:불교시대사, 2006, 사진 12), 『적호의 중관장엄론』(용인:여래, 2006) 등이 그들이다. 상당히 긴 호흡과 시간을 갖고 한 권 한 권 읽다보면, ‘중관中觀’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가진 자신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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