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대승기신론』 논쟁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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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0 년 5 월 [통권 제85호] / / 작성일20-06-01 17:09 / 조회7,196회 / 댓글0건본문
김제란
중국 근대에 『대승기신론』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논쟁은 단순히 유식 불교와 『대승기신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가의 선택이 아니라 진정한 불교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된 것이다.
구양경무와 남경내학원 학자들은 진정한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된 유식 불교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일관되게 중국불교를 비판하였다. 그들은 불교는 공종과 유종, 즉 중관 불교와 유식 불교가 중심이 되는 것이고, 중국불교는 완전 다른 성격의 여래장 사상임을 지적하며 “절대 배워서는 안 되는 잘못된 사상”이라고 혹평하였다. “천태, 화엄 등의 종파가 흥성한 뒤에 불법의 빛이 더욱 어두워졌다”고 하였다. 중국불교의 폐단으로는, 선종이 문자를 경시하고 불전을 부정한 것, 학문적인 정밀성이 부족한 것 등의 이유를 들었다.
이에 반해 태허와 무창불학원 학자들은 중국불교를 추숭하고, 그 중에서도 선불교가 불교 개혁의 최대의 정신적 동력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다양한 종파들의 사상은 모두 평등하며 상호 융섭되어 있고, 중국불교는 인도불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다. 나아가 “중국불교만이 불교의 핵심을 파악하였다. 석가 이래 올바른 불교는 지금 오직 중국에만 있다.”고 보았다. 불교에서는 좌선과 학문이 모두 중요하고, 철학적 · 논리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좌선을 통한 종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구양경무는 철학성에, 태허는 종교성에 더 강조점을 두었기문에, 구양경무는 철학성을 강조한 유식 불교를, 태허는 종교성을 강조한 『대승기신론』을 불교의 핵심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차이는 불교의 핵심인 ‘진여眞如’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여의 활동 - ‘절대부동絶對不動’과 ‘인연에 따른 움직임[隨緣]’
‘진여’는 불교에서 이상적인 개념의 하나로서, 우주 만유에 보편적으로 상주하며 불변하는 궁극적 실체를 가리킨다. 영어로는 ‘true thusness’, ‘true suchness’, ‘the highest reality’, ‘the purely formal aspect of existence’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이 진여에 대한 해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컨대 지론종에서는 아라야식과 진여를 같은 것이라고 하고, 섭론종에서는 아라야식 밖에 제9 아마라식을 따로 설정하여 진여를 설명한다. 유식 불교에서 진여는 아라야식의 핵심實性이며, 생멸 변화가 없는 고요한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를 무활동체가 아니라, 인연을 만나면 생멸 변화하여 만유 현상이 되지만 진여 그 자체는 조금도 변화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진여와 만유의 관계를 물과 파도의 관계를 비유하였다. 바람[무명無明]이 불면 바닷물(진여 본체)은 다양한 모습의 파도(만유, 현상)를 일으키지만, 그 바다와 파도는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승기신론』에서 진여 본체와 만유 현상과의 관계를 말한 그 유명한 구절을 다시 한번 보기로 한다.
“‘한 마음(일심법一心法=진여, 실체)’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하나는 마음의 진여라는 문이고, 하나는 마음의 생멸이라는 문이다. 두 가지 문은 모든 현상들을 각각 다 포함한다. 이 두 가지 문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큰 바닷물이 바람이 불면 파도가 움직이는 것과 같다. 바닷물의 형상과 바람의 형상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물에 활동하는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람이 그치면 물이 활동하는 모습(=파도)은 없어지지만, 젖은 성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구양경무는 유식 불교의 관점에서 『대승기신론』의 진여연기를 비판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대승기신론』에서 진여문과 생멸문, 두 문을 세운 것은 옳지만, 생멸문을 세우고는 ‘정지正智’를 그 본체로 보지 않고 진여에 근본을 둔 것이 잘못이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유식 불교에 근거하여 진여와 정지正智를 구분하였다. 유식 불교는 아라야식을 기본적으로 더러운[妄] 성격으로 보는데, 이 아라야식 속의 더러운, 오염된[染] 종자가 완전히 힘이 약해져서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정지正智’라고 부른다. 유식 불교에서 보기에 이 정지正智는 더러운, 오염된 종자가 소멸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진여眞如 그 자체는 아니다. ‘진여’와 ‘깨달은 상태’[覺性]인 정지正智를 구분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진여는 본체이고, 아무리 오염된 종자가 사라졌다라고 해도 깨달은 상태란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양경무에게 진여는 생성 소멸되지 않는 절대적인 실체이고, 진여와 정지는 서로 차원이 다른 영역에 속한다.
구양경무의 이러한 논의는 진여의 절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에서는 아예 정지正智라는 단계를 설정하지 않고 생성 · 소멸하는 현상 세계의 모든 모습 그대로를 다 진여의 표현으로 보고 있으니, 잘못도 이런 큰 잘못이 없는 것이다. 반면 태허는 『대승기신론』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서,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은 진여의 표현이며 따라서 진여는 생성 소멸하는 부동의 실체가 아니라 인연에 따라 움직이는 활동성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진여와 무명은 상호 훈습이 가능한가
진여가 불생불멸한 실체인가, 아니면 인연에 따라 활동하는 존재인가 라는 문제를 둘러싼 구양경무와 태허의 논쟁은 사실상 ‘진여의 훈습薰習’이라는 문제와 연관된다. 이 문제에 관하여 구양경무가 『대승기신론』을 비판하는 논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진여가 훈습될 수 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종자 없이 인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유식 불교에서는 아라야식 속 종자들의 현행으로 현상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설명하였다. 우리 마음 깊은 속에 있는 경향성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고[현행現行],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 다시 우리 마음속에 그러한 행동의 경향성으로 축적되게 된다[훈습薰習]고 한다. 그러나 구양경무가 보기에, 이러한 훈습과 현행의 상호 작용은 진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진여는 활동성이 전혀 없는 부동의 상태로 종자들과 떨어져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대승기신론』에서 진여가 인연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것은 혼란을 야기할 뿐이 된다.
이러한 구양경무의 입장은 『대승기신론』에서 종자설을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구양경무가 보기에, 진여는 고요하고 활동성이 없으며 현상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것이므로 결코 훈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진여는 고요한 것이므로, 깨끗하고 더러운 종자들이 없이 진여가 더러운 현상들을 훈습하여 현상 세계가 나타난다고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옷에 더러움과 깨끗함이 동시에 훈습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진여를 훈습하여 더러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러운 현상이 깨끗한 진여에서 나온다는 모순”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구양경무는 『대승기신론』의 관점대로라면 깨끗한 진여와 더러운 현상이 상호 융합된다고 보는 것이고, 이러한 관점에서는 더러운 현상을 없애고 새롭게 변화할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기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더러운 현실 세계를 보면 볼수록 ‘완전하고 깨끗한 절대적인 진여’라는 분명한 목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태허는 『대승기신론』이 제창한 진여연기론의 합리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대승기신론』을 공종 이전의 작품이라고 봄으로써 그것과 특성이 일치하는 중국 불교가 유식 불교보다 근본적인 교법임을 주장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진여가 현실 세계에 제대로 투영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더러운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태허의 관심사는 진여 그 자체가 절대 부동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지 생동감을 가지고 현실에 투영될 수 있는 논리 (‘인연에 따라 움직이는 진여’)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진여가 활동성을 가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태허는 연기緣起의 주체를 더러운 망식妄識의 성격을 갖는 아랴야식이 아니라, 진여와 진여의 활동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아타나식으로 설정하였다. 아타나식은 ‘깨끗함과 더러움이 뒤섞여 있는 의식[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은 더러운 종자에서 더러운 현상이 나타나고, 부처는 깨끗한 종자에서 깨끗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보살은 더러움과 깨끗함이 서로 생성할 수 있어서, 더러움과 깨끗함은 하나가 되고 진여의 일심으로 귀의하게 된다고 보았다.
초전법륜상. 인도 사르나타 고고학박물관. 박경희 불자 제공.
『대승기신론』과 유식은 회통가능한가
태허는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진여와 유식 불교의 진여는 성격이 다르다고 하였다. 『대승기신론』의 진여는 유식 불교와 달리 근본적인 지혜[근본지根本智] 뿐만 아니라 실천 수행으로 얻는 후득지後得智도 함께 강조하는 체계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보기에, 유식 불교는 차별적인 현상 세계는 이론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지만, 실천적인 평등 진여의 진실성을 잘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차별의 형상을 떠나 일체법의 진여 실성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을 유식 법성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유식 불교와 『대승기신론』이 근본에서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일견 대조적으로 보이는 『대승기신론』과 유식 불교는 서로 융합될 수 있고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님을 강조함으로써 『대승기신론』의 가치를 옹호하려 한 것이다.
실제로 태허는 기본적으로 중관 불교는 물론 유식 불교, 그리고 『대승기신론』을 하나로 보는 원교圓敎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런 입장은 『대승기신론』과 중국불교의 내재적 관계를 생각해볼 때, 중국불교의 근본인 『대승기신론』이 뒤엎어지면 근대 시기에 서양의 도전에 맞대응할 동력을 잃게 되리라는 깊은 우려에서 나온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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