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산책]
퇴옹성철- “진리 향해 초연히 걸어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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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기 / 2020 년 6 월 [통권 제86호] / / 작성일20-06-22 16:01 / 조회8,882회 / 댓글0건본문
백원기 /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문학평론가
경남 산청 출신의 퇴옹 성철(1912-1993, 이하 성철 스님)의 속명은 이영주이다. 어린 시절부터 진리탐구를 위해 모든 경서와 신학문을 섭렵했지만 이는 진여의 문에 들어가는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무렵, 그는 한 노승으로부터 받은 영가대사의 「증도가」를 받아 읽고 홀연히 심안心眼이 밝아짐을 느낀 후, 지리산 대원사로 가서 『서장』을 읽었다. 이후 잡지 『불교』를 보며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들고 불철주야로 정진해 42일 만에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지 않는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에 이르렀다. 짧은 기간의 수행으로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그의 남다른 결의와 정진력을 말해준다. 화두참선에 확신을 가진 이영주는 1936년 봄 담대한 마음으로 출가를 결심하고 가야산 해인사로 떠나며 이렇게 읊었다.
하늘 넘친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彌天大業紅爐雪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跨海雄基赫日露.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誰人甘死片時夢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超然獨步萬古眞.
득도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장부의 호연한 기품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즉, 담대하고도 조용하게 출가 심경을 밝히는 이 ‘출가시’에는 장차 대선사가 될 스님의 놀라운 각성과 감성이 담겨 있다. 이런 탕탕 무애한 기상이 있었기에 한 시대의 선사가 됐던 것이다. 사실, 현실로부터의 초연함은 선승들의 중요한 수행실천의 덕목으로, 이것은 걸림이 없는 탈속한 자유를 갈망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하늘을 덮을 정도의 큰일들도 ‘붉은 화로 속의 한 점 눈송이[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고, 바다를 덮는 기틀도 햇볕에 사라지는 한 방울 이슬에 불과하다. 하여 이영주는 일장춘몽의 덧없는 세속적인 삶을 살다가 죽어갈 바에야 만고에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아 초연히 출가의 길로 나선 것이다.
‘불성’이 마음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며 찾는 것은 수행자의 가장 중요한 본분사이다. 때문에 수행자는 마음 안에 있는 불성을 찾아 끊임없는 운수행각의 길에 오른다. 1936년 봄 해인사 백련암애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하고, 같은 해 운봉 화상으로부터 비구계를 수지한 성철 스님은 눈 밝은 선지식을 참문하며 참선 수행에 정진했다. 범어사 금어선원, 금강산 마하연 등 남북의 제방선원에서 언어가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본래부터 밝고 신령하여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할 수도 없고 모양 지을 수 없는 ‘한 물건’이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들고 치열하게 정진하였다. 스님은 29세 때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마침내 칠통漆桶을 타파하고 무심을 증득하여 선기禪機 넘치는 ‘오도송’을 읊었다.
황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 黃河西流崑崙頂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내리도다. 日月無光大地沈.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遽然一笑回首立
청산은 옛 대로 흰구름 속에 있네. 靑山依舊白雲中.
선문을 참구하여 조사관을 뚫은 경지를 선명하게 묘출하고 있다. 향곡 스님은 이 ‘오도송’을 칭찬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중국의 황하는 동쪽으로 흐르지만, 우리나라 강은 대개 서쪽으로 흐른다. 우리의 서해가 중국에서는 동해이다. “황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른다.”는 것은 시공의 흐름을 거슬러 흐름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거기에 이르니, 거기에는 해와 달이 있기 이전이라 이미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대지는 꺼지고” 없다는 것이다.
한편,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대지가 꺼져 허공계가 됐다는 것은 ‘백척간두 진일보’의 경지이다. 그 경지에서 보면 태허太虛와 진공眞空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가 있기 이전이고 태고 이전이다. 일체가 있기 이전이라서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텅 빈 태허 진공이다. 분별과 차별을 뛰어넘은 무심의 경지에서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문득 한 번 웃고 돌아서니 도리어 청산은 예대로 구름 속에 서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자연과 깨달음의 세계가 둘이 아닌 스님의 무심합도無心合道의 선적 사유가 잘 표현되어 있다.
성철 스님은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답게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만들어 결사를 추진했다. 1955년 해인사 주지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철망을 두르고 10여 년 동구불출을 마치고 1965년 김용사에서 최초 대중법문을 하였다. 그리고 1967년 해인총림 초대방장에 취임 후 18년 동안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퇴설당과 백련암에 머무르며 ‘백일법문’을 토하며 서릿발 같은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특히 1981년 1월 20일,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종정에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추대식에 참석하는 대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법어를 내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텅 비고 고요한 선심의 현상을 잘 담아낸 법어로, 산중에 물러나 있으면서 세상에 가장 깊숙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교의 면목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러서는 것이었으니 제자리를 지켜 현실과 불교계를 깨웠던 것이다. 스님은 자연의 모든 현상을 어떤 분별이나 걸림 없이 무심히 있는 그대로 보면, 조금도 흠결 없는 우주의 신령스런 깨우침이 널리 비추니[원각보조圓覺普照], 고요함[적寂]과 멸함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보고 들림은 모두가 관음이고 묘음으로 극락이 따로 없다는 영구불변의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 곧 눈으로 보는 만물이나 귀로 듣는 소리 모두 보살이고, 보살의 소리라는 것이다. 즉, 텅 비고 집착과 분별이 없는 마음으로 세계를 보고 듣게 되면 어디에나 부처의 이치가 있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깨달음, 즉 ‘보리菩提’이다. 이것이 바로 ‘촉목보리觸目菩提’이고 ‘일체현성一切現性’이다. 일체의 집착을 놓아버리고 사물을 관조하는 무심합도無心合道의 경지가 바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언설로, 지금도 세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는 곧 선이 지향하는 깨침의 미학이며, 이는 곧 ‘색심불이’의 시적 미학이라 할 것이다.
성철 스님은 간화일문看話一門이 깨달음에 이르는 첩경임을 천명하고, 마음은 본래 형체가 없으므로 자신의 마음, 바로 그것이 부처이므로 마음 밖에서 따로 구할 필요가 없음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마음이 일체의 근본임을 깨닫고, 지관止觀을 통하여 진여를 찾고자 하였던 스님은 일생 동안 산문을 중심으로 구도와 깨달음, 이를 통한 중생교화 등에 몰두하였다. 산중에 앉아서도 세상을 널리 비춘 스님은 1993년 11월4일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세수 82세, 법랍 58세로 상좌들에게 “참선 잘 하라!”는 당부를 하며 다음의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生平欺誑男女群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넘는다. 彌天罪業過須彌.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活陷阿鼻恨萬端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一輪吐紅掛碧山.
보편적으로 선사들은 세속의 길을 버리고 올곧게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다. 즉, 마지막까지 자유자재한 열반모습을 통해 중생들에게 생사가 다르지 않음을 일깨워 주고자 한다. 나고 죽음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스러워야 자신의 죽음도 그렇게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자신을 다그쳐 역설의 자화상 만들어냈다.
가령, 원오극근은 아무 일 해놓은 것 없다 했고, 부용도개는 지옥과 천당을 겁내지 않는다 했지만, 성철 스님은 평생 살아 온 삶을 점검해 보니 남녀 무리를 속였고, 또한 그 죄업이 수미산을 넘는다고 했다. 그토록 초탈하고 정법에 따른 수행을 강조했던 스님이 사람들을 속였다 함은 지나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언설한 것은 사람들이 ‘거짓 자아[가아假我]’ 속에서 헤매다 모두 지옥을 가지만, 스님은 자기를 보았고, 자기의 갈 길을 보았음을 말함으로써 끝까지 자기 성찰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 주목하면 “내 말에 속지 마래이!” 등은 속임 없는 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둥근 한 수레바퀴[일륜一輪] 일생은 후딱 지나가니, 부디 오욕칠정에만 끌리는 평범한 생을 살며 시간낭비하다 후회하지 말고, 항상 깨어 있으며 부지런히 닦으라고 간곡하게 당부한 것이다. 여기에 성철 스님다운 중생들의 어리석음의 깨우침을 촉발하는 날카로운 선지가 번득인다. 마지막 구절은 깨달은 이의 장엄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덩이 붉은 해는 육신을 벗은 그의 법신이며 푸른 산은 열반의 문이다. 스님은 그렇게 역설적으로 꿈속에 살아가는 미혹한 중생을 일깨우고 영원불멸의 대자유의 세계로 나아갔다.
흔히 선은 ‘줄 없는 거문고’[몰현금沒弦琴]에 비유된다. ‘줄 없는 거문고’는 상식이나 사량 분별을 넘어선 불립문자의 세계를 상징한다. 즉, 줄이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울린다고 하여 이르는 심금心琴, 즉 마음을 상징한다. 때문에 ‘줄 없는 거문고’는 궁극의 소리를 담고 있는 악기인 것이다. 이처럼 선의 세계는 언어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철 스님은 내 마음이 본래 부처이니 자기 마음 이외 불법佛法 없고, 자기 마음 외에 부처가 따로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선정지혜의 고요하고 밝음[定慧等持 止觀明淨]의 세계로 가는 길을 중생들에게 일러주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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