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面石]
일타스님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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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1996 년 12 월 [통권 제4호] / / 작성일20-05-06 21:16 / 조회9,648회 / 댓글0건본문
큰스님의 장엄한 다비식을 치루고 나서 백여 과가 넘는 사리가 출현하여 사리친견법회가 열리는 동안, 무려 열서너 곳에서 문도들의 허락도 없이 큰스님에 대한 비디오가 출시되어 시판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다비식에 관한 것뿐이어서 큰스님의 사상이나 일생을 전하기에는 애초에 부족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때에 문도들은 큰스님의 출가와 수행시절, 그리고 그 이후의 사상과 일생을 여실히 전해줄 수 있는 큰스님 일대기를 비디오로 만들어서 대중들에게 올바른 큰스님상을 전해야겠다는 원을 세우고 큰스님 6재 때부터 큰스님의 발자취를 좇아 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로부터 일년 후, 문도회에서는 ‘스님, 성철큰스님’ 5부작 비디오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큰스님 자취를 따라 카메라 렌즈를 옮기면서 너무나도 소중한 자료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운 것은, 그 옛날부터 큰스님 열반에 이르기까지 가까이서 또는 조금 멀리서 법향을 함께 나누신 어른 스님들의 한 말씀 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그때 시간 가는 줄 모르시고 큰스님과의 인연이야기를 들려주신 일타 큰스님의 말씀을 정리하였습니다. - 편집부
※ 일타 큰스님은 1929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하여, 1942년 양산 통도사로 출가하였다. 46년 송광사 삼일암의 수선안거를 시작으로 일평생 참선정진 및 중생교화에 몰두하였다고, 현재 해인사 지족암에 머물고 계신다.
● 쉬고 계시는 참에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송구스럽습니다. 스님, 건강은 어떠신지요? 저희들이 듣기로는 송광사에서 처음 큰스님을 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때 첫인상은 어떠하셨는지 그 시절 얘기부터 들려주시지요.
해방하던 바로 이듬해인 46년에 송광사에서 처음 뵈었으니까, 지금부터 치자면 근 50년이 다 되었습니다. 그 때 내 나이 18살이었는데, 중학교를 마치고는 일대사인연을 마치겠다는 일념으로 강원에 들어가지 않고 열흘 동안 걸어서 송광사를 갔습니다. 오로지 대선지식을 만나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여름 결제를 지내기 위해 효봉스님이 조실로 계신 송광사를 찾아간 것이지요.
결제 직전인 어느 날 저녁, 대중이 공양을 마치고 나왔는데, 대중스님들이 “철수좌 왔다, 철수좌 왔다”고 하며 좀 소란스럽더군요, 그래 “철수좌가 누구냐”고 물으니 어떤 스님이 말하기를, “말도 말어,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우는 굉장한 스님이야” 하더군요. 그 소리를 듣고는 호기심이 생겨 나도 가봐야지 하고는 가보니 다른 대중스님들은 일어나 있고 효봉스님과 나이가 아주 많으면서 입승을 보시던 지영월스님이 앉아 있는데, 두 분 앞에 절을 하고는 턱하니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시더군요. 어른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면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보통인데, 철스님은 당당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셨습니다. 영월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생식을 하시는 분은 여기서 대중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하니, 철스님도 “잘 알겠습니다. 며칠 쉬어 가겠습니다”라고만 하셨습니다. 그 당당하신 모습이 어찌나 인상 깊던지, 사람에는 평범한 사람이 있고 특기(特技)한 사람이 있는데, 철스님은 그런 특기한 사람 중의 한 분이로구나 싶었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눈빛에서는 지혜가 샘솟는 것 같고 훤칠한 이마에 흠씬 커 보이는 키가 대중을 압도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철스님은 법웅스님과 함께 국사전 노전에 머무셨는데, 생식을 하신다는 소리를 듣고 말뚝신심이 나서 상추를 뜯어다 씻어서 자꾸 가져다 드렸죠. 그러니까 물도 더 떠오라고 하고, 몇 살이냐, 본사가 어디냐 묻기도 하시고, 며칠 동안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한 5일 계시다가 법웅스님이 바랑을 짊어지고 화엄전 뒤로 해서 벌교를 넘어가시는 것을 전송해 드렸습니다.
● 그렇게 상추시봉하시면서 들으신 말씀 가운데 기억나시는 대목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그때 대중 가운데서 내 나이가 가장 어려서 다른 스님들보다는 편안하게 스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밖에 나가시길래 따라나섰죠. 송광사 위쪽에 경치 좋은 수석대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위에 올라가면 석두스님이 지었다는 무구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곳인데, 그 쪽으로 올라가시더군요. 스님께서 “와 따라오노”하고 묻길래 “따라갑니까? 그냥 가는 거지요” 하니 허허 웃으면서, 은사스님이 누구냐, 본사가 어디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더니 “느그 스님은 강사인데, 무엇하러 이 선방에는 와 있노?” 하면서 또 빙긋 웃으시데요. 그때 스님에게 들은 말씀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말씀이 “중노릇은 사람 노릇이 아니다. 중노릇하고 사람노릇하고는 다르다. 사람노릇 할려면은 옳은 중노릇을 못한다”는 말씀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말씀이 내 중노릇의 가장 중심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하루는 삼일암 앞을 지나다가 내가 물었죠. “다른 사람들이 스님보고 괴각이라고 하데요?” 삼일암에 달마스님 탱화가 있었습니다. 스님의 크신 눈이 꼭 닮은 듯싶어 물었는데 그 속마음을 어찌 아셨는지 “달마스님 눈 봤나?” “봤습니다” “눈이 커야 많이 보고, 눈이 커야 탁 하니 바로 가지, 눈이 쪼깐해 가지고는 옳게 못 본다” 하시던 그런 풍자적인 말씀도 생각이 나는군요.
● 그럼 큰스님께서 떠나실 때 따라가실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법웅스님이 바랑을 짊어지고 나서는데 은근히 송광사 더 있지 말고 따라갔음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지만 그 소리는 못하고 “혼자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어찌 그 생각을 읽으셨는지 “중이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경에도 있듯이, 구도자의 길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외로운 길이라는 그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 그 순간들이 내 마음 가운데에 크게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 송광사에서 며칠 머무시고 떠나신 게 생식 때문이었군요.
그땐 그랬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꼭 생식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분이 워낙 아는 것이 많고 바른 소리를 잘하는 쉽게 말하면 ‘괴각’이다 보니, 대중 속에서 평범하게 얌전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틀린다 싶으면 바른 소리를 해버리니 좀 곤란하다 싶어 거절을 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 이야기를 좀 바꾸어 보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랫동안 전계 대화상으로 계시면서 한국불교의 율(律)을 대표하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해방을 전후로 한 우리 불교계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우리가 흔히 조선시대를 억불숭유의 시대라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활약을 하고 병자호란에는 벽암대사가 활약을 하기도 하여 호국불교 또는 구국불교라고도 하는데, 뜻있는 스님들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수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불교를 ‘수행불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선방이나 염불당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스님네의 계율사상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새벽예불에 참석하지 않으면 바리때 싸가지고 당장 나가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새벽예불은 모두 다 참석하고 육시예경을 하고 모두 신앙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일합병 전에 일본인 승려들이 와서 조선을 일본에 병합시키지 전에 우선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병합시킬려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고종 32년(1895)에는 승려입성금지가 부당하다며 해제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숙종 때부터 1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승려입성금지가 일본인에 의해 풀리게 되면서 해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방종의 길로 중들을 흐트러 놓았다고 봅니다.
● 일본은 그들 나름대로 조선불교의 씨를 일본화하기 위해 조동종이나 일본 임제종과의 병합을 꾀하고 조선에서도 이회광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그에 동조하여 활개를 치는 바람에 당시의 조선불교는 형편무인지경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렇습니다. 이미 일본의 힘을 등에 업고 대처승이 된 중들은 친인척은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억지로 절로 불러들여 공부를 시킨다며 절집 재산인 논을 팔아 일본유학을 시키고, 본래 불심은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들이니 갔다 오면 다 대처승이 되어버렸지요. 그래도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범산 김범진 씨나 김범룡 씨, 최범술 씨 같은 분들인데, 이들은 서울에서 혁신불교를 해야 한다며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이 삼보사찰을 특별 총림교육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창을 하고, 그 가운데서도 해인사를 제일 먼저 시범적으로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산을 따로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해인사의 논밭을 반으로 나누어서 반은 전의 대처승들이 그대로 살고 반은 총림의 운영예산으로 쓰도록 했지요.
그런데 쌀이 많이 나는 땅은 다 저희들이 쓰고 산간 벽지의 불량답이나 재 밑의 천봉답 등을 채워서 총림에 주니 양식이 부족해서 살 수가 있습니까. 전부 다 바랑을 짊어지고 동냥을 나가야 했지요. 그래도 먹는 것은 어떻게든지 충당시키면서 계살림을 해야 한다고 해서, 석교스님의 후손인 상월스님, 설서구스님, 석하스님 세 분이 율사가 되어 47년도에 50일간 습의살림을 했습니다. 그 때 어떤 식으로 어떻게 계살림을 해야 한다고 콘트롤한 스님이 누군가 하면 바로 성철스님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방조역활을 하신 분이 청담스님이십니다. 그때에 비단가사장삼을 없애고 통일을 시켰습니다.
보조장삼이라고도 하고 직철이라고도 하는데, 송광사 박물관에 보조스님장삼이 걸려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원래 보조스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위의 적삼과 밑의 치마를 봉합시킨 직철장삼입니다. 그것을 기본으로 해서 장삼을 새로 만들고, 가사도 지금 입는 괴색으로 바꾸고, 신장단에 절하지 말라, 산신이나 칠성 같은 무격신앙을 배격하고, 시주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말라는 등을 이론적으로 내세우신 분이 철스님이시고, 그것을 욕을 먹어가며 실천하신 분이 청담스님이십니다.
● 그렇지만 꽤 오랫동안 해온 일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쉽지만은 않았지요. 우리가 신장만큼 오신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진묵스님이 신장한테 절하니까 신장탱화가 앞으로 푹 떨어졌다는데 그만한 신통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스님이 용왕님 머리를 지팡이로 탁탁 치니 비가 내렸다는데 그런 신통력이 있으면 모르지만 아무 실력도 없으면서 어찌 절을 안 할 수 있느냐고 했지요. 그러니까 청담스님이 노스님께 들은 얘기 즉, 아무리 왕자가 나이가 어리더라도 장차 왕이 되어서 만조백관의 절을 받기에 신하에게 절하는 법이 없고, 사자새끼가 어리더라도 세 살만 지나면 그 포효 소리에 백 가지 짐승의 머리가 깨지기에 눈도 못 뜨는 어린 사자새끼라도 뭇 짐승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로 스님들을 설득해서 신장단에 절하지 않는 규율을 세우고…….
이와 같은 외형적인 정화문제가 철스님 머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인사는 여러 대중이 살다보니 중구난방이라 그 말을 다 막을 수가 없으니까 봉암사로 옮겨 다시 한 번 모임을 이끄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만 좋았으면 뭔가 이룩되었을텐데…, 산에 공비가 출몰하고 시절이 어수선한 6․25 직전이라 흩어져 내려오는 바람에 무산되었지요. 그래도 바로 그 정신이 불교 정화로 연결되었다고 봅니다.
● 당시 불교 정화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습니다만, 누구는 우리 스님께서 정화를 해야 한다고 불을 붙여 놓고는 정작 당신은 빠져버렸다고 운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때 정화는 왜 일어났으며, 스님의 역할이 있다면 어떤 점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은 승풍정화를 주장하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청정하게 중노릇 잘하면 다른 사람들은 저절로 따라와서 아무 마찰이 없고 시끄럽지 않지, 이걸 외부적인 정화 말하자면 관권이나 바깥 힘을 빌려서 하면 부작용이 많이 생긴다, 그러니까 정화하는 방법이 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담스님도 원래부터 그런 생각은 아니었는데, 대중의 힘에 밀리다 보니 마치 헤게모니 쟁탈전처럼 되어 버리고, 관권의 노리개처럼 되어 버리고 마치 한국불교 정화가 사찰 점령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지요. 그러다 보니 급조승도 많이 만들어지고 승풍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연결된 것이 아닙니까. 큰 세력을 대나무로 한 번에 탁 꺾을려고 하면 대나무도 못 쓰게 되고 부작용만 생깁니다. 그러니까 노장님은 수행정화를 해야지 물리적인 힘으로 사찰을 점령한다든지 살림살이 정화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신거죠. 한 번은 청담스님이 편지를 보내고 사람들이 왔더래요. 노장님께서는
“세 칸짜리 띠 집에 본래부터 머무르고 있으니
한길 신비로운 광명이 만고에 한가롭구나
시비거리를 나한테 가져와서 왈가왈부하지 마라
뜬 세상에 천착하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로다”
라고 답장을 쓰시고는, ‘호랑이 우는 곳에 까마귀야 짓지 마라’라고 했다든가 ‘해는 서산에 넘어가고 달은 동산에서 뜨느니라’ 했다든가 라고 썼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어쨌든 물리적인 정화로 인해 그 부작용이 지금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정회에 대한 노장님의 기본적인 생각은, 수행정화를 해서 모범적인 승려들이 많이 나와서 그 그림자만 보고서도 모든 사람들이 합장 배례하고픈 생각이 들도록 수행을 잘 하면 종단정화는 저절로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토굴에 계시다가 나오셨을 때도 해인사 주지 얘기가 있었지만 들은 체도 안하시고 성전으로 가셨지요. 노장님께서는 “대중교화, 하면 좋기야 좋지. 하지만 대중교화는 하지도 못하고 대중에게 동화되기가 더 쉽다”는 말씀을 항상 하셨고 일부러 나서지도 않으셨습니다. 말년에 김용사에 계실 때 “그래도 큰 절에 머무시어 후학들을 지도해 주십시오” 간청하자 부득이하게 해인사로 오셔서는 백일법문도 하시고 노력을 많이 하셨지요.
● 다시 이야기를 옛날로 돌려야겠습니다. 송광사에서 처음 만나신 후 다시 큰스님을 만나신 것은 언제쯤이셨습니까?
송광사의 첫 대면 이후 6, 7년 후에 다시 만났습니다. 물론 그 동안 모시고 지내지는 않았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요. 특히 봉암사에서 왜곡되어진 한국불교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결사를 하시던 때의 일도 이야기로는 다 들었습니다. 당시 나는 강원에 있었기 때문에 동참할 수 없었고, 강원을 졸업하고 6․25사변을 지내고 난 뒤 범어사에서 한 철 나고 창원 성주사에 갔는데, 거기서 7년 만에 철스님을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그때 겨울 한 철을 지내면서 여러 가지 법문을 많이 듣고, 중노릇뿐 아니라 우리 사상에 대해서도 지도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렇게 한 철을 살고 스님은 안정 천제굴로 가셨지요.
● 저희들도 우리 스님 꽤 괴팍하다, 별나다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50년대 주변에서는 뭐라고 하셨는지요?
노장님은 항상 말씀하기를, “이건 내 말이 아니고 불조의 말씀이다” 하시고는, 그 근거는 어느 경전 어디에 있다고 하시면서 이 이론과 저 이론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그저 덮어놓고 예, 예만 할 뿐이었지요. 참말로 모든 경전에 해박하시고 조사어록에도 해박하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노장님에게 ‘후레쉬’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는데, 번쩍번쩍하는 후레쉬처럼 무슨 소리 하면은 벌써 저 만큼 앞서가 계시거든요. 또 어떤 사람은 ‘벼랑박’이라고도 했습니다. 스님께는 아무 것도 가서 붙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노장님을 상대하지 않은 사람들은 괴팍하고 원만하지 못하다고 별소리를 다할지 몰라도 노장님을 알고 또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그렇게 밝은 지혜를 가진 해박한 분은 두 번 다시 없다고 합니다.
● 스님께서 들으신 봉암사 이야기 중, 기억나시는 대목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봉암사라 하면 소문이 자자했지요. 수좌계의 중진이신 향곡스님, 보문스님, 우봉스님, 최일도스님, 자운스님 등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가사와 바리때를 불법에 맞게 만들기 위해 홍경스님이 바리때를 맡고 자운스님이 가사를 맡았답니다. 홍경스님은 부처님법 답게 와바루를 만들어야 한다며 문경요에까지 가서 도자기 바리때를 굽고, 자운스님은 괴색가사를 만들려고 오후불식을 하면서도 점촌까지 나가서 물감을 사다가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또 매일 능엄주대참회를 하고 모든 생활은 공주규약대로 했다고 하지요.
● 들리는 말에 의하면, 큰스님께서 만공스님 문하에서 수행을 하실 때, 큰스님께서 확철대오하셨냐고 물으니 어디 어디서 확철대오 세 번 했다고 하시며 그 풀 뽑는 얘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만공스님은 경허스님의 법을 잇고, 해월스님이 잇고, 운봉스님이 있고, 향곡스님이 법맥을 이었다고 하는데, 해방을 전후로 한 당시 우리 종문의 인가수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만공스님과 철스님과의 문담에 대해서는 나도 소문만 들었지 직접 들은 바는 없습니다. 종문 제일서라고 일컬어지는『벽암록(碧巖錄)』백칙 공안이 나오고 난 뒤에 수좌들 사이에서 화두선 보다는 구두선(口頭禪)이 발달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입으로 중얼거리면 왠지 깨친 것 같지만 대경환미(對境還迷)라 경계를 대하면 금방 어두워져버린다 그 말입니다. 말로는 잘 꾸며대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해당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노장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금봉스님이나 고봉스님이나 만공스님 밑의 제자들이 화두문답하기를 즐겨 했다고 합니다.
물론 만공스님께서 제자들을 가만 놔두지 않고 격발시키기 위해 자꾸 시험을 봐서, 너는 한 70점쯤 된다, 너는 아무개보다는 조금 낫다, 너는 아직 멀었다고 하니까 ‘내가 누구보다 못하다니’ 하며 분심을 내게 하는 방편이 되긴 했지요. 그러나 옛 조사의 말씀에, ‘단지작불(但只作佛)이요 막수불불해어(莫愁佛不解語)’하라 ‘다만 부처를 지을 줄 알지언정 부처가 말 이해하지 못할까 근심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실참실오(實參實悟) 참되게 참구해서 참되게 깨달아야지 그 겉껍데기에 불과한 허두선(虛頭禪)을 논하는 것은 좋은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구두선을 허두선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때의 풍습은 그 구두선 논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철스님한테 자꾸 뭘 물으니까, “스님, 꿈속에 화두가 잘됩니까?” 하니 “꿈에는 꿈에도 안 된다”라고 하니 “꿈에 안 되면 말하지 맙시다.
꿈에 안 되는 사람이 그런 소리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만 둡시다” 하니 “아 꿈에는 안 되더라도 아 그런 거 안 있는가. 그 별 다른 거 그것만 가지고 얘기를 해보자고” 했다고 하셨답니다. 확철대오와 지견력(知見力)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공부를 안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공부를 해서 어떤 지견력이 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생사를 해탈한다든가 확철대오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 보조스님의「수심결(修心結)」이고, 보조스님 당시 오교구산이 선교로 합쳐지면서 대각국사는 교법으로서 선을 융섭할려고 하고 보조스님은 선으로 교법을 융섭할려고 하니까 “그거 틀렸어, 그렇게 하면 안돼”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것도 옳기는 옳지만 그것만 가지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니까 거기서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더 노력해야 한다”고 하며 격외향상문을 주장하게 되고 화엄선이라든지 하여 돈오점수를 많이 내세우게 된 것이지요.
● 이야기가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를 흘렀는데, 그렇다면 큰스님께서 돈오돈수를 주창하시 게 된 근본 뜻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당시의 스님들은 실참실오 보다는 구두선으로 논하기를 좋아하고, 또 이론적 근거인 보조스님의 법문을 보면 ‘상근대기(上根大機)는 부재차(不在此)하니라’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보조스님이 크게 깨달았다고 하는 부분이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내세우는 돈오점수에는 누구든지 조금만 엉뚱한 생각을 하면은 그만 깨쳤다고 하고 더 향상할려는 생각이 없어지고 마는 폐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스님께서는 마조와 백장스님의 근본종지에 의해서 돈오돈수가 육조스님의 본뜻이고 부처님의 본뜻이라고 하는 종지를 내세우신 것이라 봅니다.
● 당시에 하도 철수좌 철수좌 하니까 망월사에 들르셨을 때는 당시 조실인 춘성스님이 정말 장좌불와하는지 지켜봐야겠다며 문구멍으로 확인을 하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또한 파계사 성전에서 10년 동구불출이다, 장좌불와다 하여 그 수행이 모든 납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만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큰스님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노장님이 웃으면서 “참새가 죽어도 다리를 뻗고 죽는다”고 하시면서 흔히 하시는 말씀이 “아이고 우습다, 아이고 우습다. 내야 뭐 밥 한 그릇이면 그만이니까”였는데, 그렇게 한 생각 돌이키고 한 생각 쉬시는 생각, 그러면서도 수좌를 가르칠 때는 돈오점수에 족하지 말고 돈오돈수를 해야 한다는 그 주장을 하시는 데 아주 철저하셨습니다. 본래 동산스님께서 성철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실 때, 참 잘 지으신 것 같애요. 그 철(徹)자가 ‘철저할철’자 아닙니까. 한철 모시고 지내던 성주사에 계실 때였지요. 그때는 담식하실 때가 아니었는데, 공양 드시고 나면 비위가 약하다 하시면서 죽염을 한 숟가락씩 드셨습니다.
삼시세끼 거르지 않고 드셨지요.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부산에 있는 한 병원에 입원을 하셨는데, 독일의사들이 스님 피를 뽑아보니 다른 사람하고는 다르게 아주 맑고 깨끗하니까 자꾸만 피를 뽑으러 들락날락했던가 봅니다. 노장님이 이놈들이 남의 피 다 뽑아갈려고 한다고 고함을 치고 눈을 무섭게 뜨니까 그 의사들이 놀라서는 문만 빼꼼이 열고는 쬐끔만! 쬐끔만! 하면서 쳐다보다가 노장님이 눈을 크게 뜨면 달아나곤 했다고 합니다. 노장님은 담식뿐 아니라 생식, 요가, 운동, 장좌불와 등 무엇이든지 한 번 하신다고만 하면 언제든지 그것도 철저하게 하셨는데, 본 성품이 그렇게 철저하셨던 것 같습니다.
● 어느 책에서 보았던가, 저희 스님께서 누구와 법거량하다 밤이 되니 철수좌는 가버렸다고 하는 대목을 읽은 것 같기도 합니다만 혹 다른 회상에 가셔서 법거량하신 얘기는 들으신 적 없으십니까?
원래 밖에 많이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한참 젊어서 행각할 때 속리산 복천암을 떠나서 수안보로 문경으로 걸어오면서 주정꾼을 만나서 어쨌다거나 어느 마을 집에 가서 주무셨다든가 하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일부러 누구랑 법거량하러 다니셨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어쩌다 금봉스님 같은 이를 만났는데 자꾸 “철수좌, 법이 어떤가?” 하고 떠보니 “꿈에도 안 된다면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거나, 내가 노장님 모시고 있을 때 더러더러 편지가 오는 때도 있고 또 어떤 수좌는 “철수좌한테 가서 이렇게 물어 봐라”하는 문제를 가지고 오기도 했지만 노장님께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모른다 해라” 하셨습니다. 대담을 안 한다기보다는 대답해 줘 봐야 알아들을 사람들이 아니다 하는 뜻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스님께서 그때 대답을 안해 주신 게 혹 법량이 모자라서 피하신 게 아니냐는 말도 더러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소리 한다고 하면 그건 당연히 몰라서 입만 놀리는 것이고, 노장님 생각은 ‘오불심종(悟佛心宗)’이어도 부처님의 심종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득무차별(得無差別)’이라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더라도 해행(解行)이 상응(相應)하여야 ‘방능이불(方能以佛)’이라 해와 행이 상응하여야 바야흐로 부처라고 할 수 있다는 이런 말씀을 항상 내세우시면서 실참실오해야지 어중간하게 한 철 지내고 떠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수행은 철저해야 한다는 것을 내세우셨지 시시껄렁한 것을 가지고 수행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항상 말씀하신 겁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내말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이자 조사 스님네의 말씀’이라고 항상 하셨듯이, 경전에도 해박하고 어록에도 해박하고 철저하신 분이니까 감히 누가 따라갈 사람도 없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라고 봅니다.
● 큰스님께서는 공부하는 수좌들에게 ‘돌아다니지 마라, 잠자지 마라, 말하지 마라, 책 보지 마라, 간식하지 마라’는 수도오계로써 가르침을 주셨는데, 특별히 스님께 하신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내가 태백산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인사를 여쭙자 이렇게 적어주셨습니다. “사람노릇 하려면 공부는 못한다. 공부는 천대받는 생활에서 시작된다. 고독만이 공부의 대협조자다. 옛사람의 걸식정신에 의해서 탁발할 마음을 가지고 하루에 4시간 이상 자지 말라. 한 생각만 일으켜도 화두가 간단히 되는데 하물며 이야기할까 보냐. 오직 최후까지 화두를 위해서 노력하라.” 내가 비록 그대로 실행은 못했지만 이것이 노장님께 배운 근본사상입니다. 오직 공부를 위해서 중노릇해야지 사람노릇 위해서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말입니다.
그래서 그 전에 해인사 주지를 한 번 하라고 할 때도 “아, 스님이 저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주지를 하기는 해도 달아날주(走)자 갈지(之)자 주지를 합니다” 하고 달아났더니 노장님 껄걸 웃으시더군요. 그래도 그 뒤에 한 번 이름을 걸기는 했지만서두요. 처음에는 나도 노장님이 뭘 물으면 솔직솔직 대답도 하고, 우기기도 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장님이 “아 저거 큰일이네, 큰일. 글자깨나 배웠다고 자꾸 입을 놀려서 큰일이네” 하시더니 중봉스님이 쓴『산방야화』를 읽어어보라고 내주시더군요. 그러면서 중봉스님의 스승인 고봉스님의 삼분단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후에는 삼분단을 해결해야지 향상사지 그 외에 지껄이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뒤에는 뭘 물어오셔도 “저 해결 못했습니다. 모릅니다” 했지요. 그러면 스님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요.
● 평소에는 여러 재미있는 말씀을 많이 들은 것 같은데 이렇게 자리를 잡고 앉아 여쭙다 보니 미진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큰스님의 일생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문 위에 걸어 놓은 액자를 가져와 보십시오. 큰스님의 임종게인데, 어찌나 좋은지 액자를 만들어서 늘 보고 있습니다. 이 글 속에 노장님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부처님 말씀이 범소유상(凡所有相)은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고 했고 세상을 비상으로 보면 직견여래(卽見如來)라고 했으니, 바로 그 말씀을 설파하신 것입니다. 노장님 열반하셨을 때는 그 빗줄기 속에서도 수십만 명이 애도를 하고, 사리친견 때는 그 찬바람 눈보라 속에서도 끊임없이 줄을 서지 않았습니까. 산속에 가만히 계셨지만 법문 백 자리 만 자리 한 것보다도 더 높게 더 깊게 한국불교의 위상을 쑥 올려놓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장님께서 평생 일관하신 ‘중도사상(中道思想)’입니다. 흔히들 노장님이 모든 것을 다 털어내고 수행에만 일관하셨다고 말하기 쉬운데, 그것은 빙산의 일각을 보고 하는 얘기입니다. 중도사상이란 한 가지를 없애고 한 가지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털어버림으로써 한 가지를 건설한다 즉 털어버리는 것이야말로 건설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노장님께서는 0하고 100 사이에는 1,2,3,4,5……99가 있지만은 그렇게 빙 돌아가기보다는 그냥 그 자리에서 돌아서면 10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0과 100은 백지장 차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노장님의 한평생은 어디에 끌려 다니면서 어중간하게 사신 게 아니라 그야말로 철저한 수행 속에서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실현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한 시간 여 넘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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