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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바른 길]
見性卽佛 제 성품을 보면 바로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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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  /  1996 년 12 월 [통권 제4호]  /     /  작성일20-05-06 21:16  /   조회9,12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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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선문정로(禪門正路)』의 본문으로 들어가 본다.

첫째 장은 그 제목이 말하듯이 견성하면 곧 부처라는 얘기를 주제로 한다. 자기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성품, 본래 진여인 그 성품〔眞如自性〕을 보면 곧 부처라는 얘기이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성불(成佛)이란 사실은 부처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깨닫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본래 그런 상태임을 확인하는 것일 뿐이니, 그 깨달음은 차근차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몰록’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頓悟〕는 것이다.

 

 


 

 

곧바로 마음에 질러들어 제 성품을 보면 곧 부처가 된다〔直指人心 見性成佛〕는 것은 널리 알려진 선종(禪宗)의 종지(宗旨)인데, 성철 스님은 왜 또 새삼스러이 이를 역설하는가? 무엇보다도 우선, 견성만으로는 아직 부처가 아닐 수 있다는 설을 부인하기 위해서이다. 성불과 별개로 운위되는 돈오 견성은 진정한 돈오 견성이 아니며, 아직 성불은 못했다고 하면서도 견성했다, 깨달았다, 인가받았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성철 스님은 우선 영명 연수(永明延壽: 904~975) 선사의 『종경록(宗鏡錄)』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 견성만 하면 당장에 무심(無心)의 경지가 되어, 치료해야 할 중생으로서의 병(病)이 다 없어지고 따라서 약(藥)도 필요 없으며, 가르침을 배우거나 관(觀)을 하는 것도 다 쉬게 된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부처라는 것도 별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본래 성품이 워낙 진여인지라, 그것을 보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부처라니까. 그런데, 본래 내 자신이 부처라는데 우리는 도대체 왜 그것을 모르고 중생을 자처하며 사는가? 무명(無明)에 가려서 부처로서의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 대답이다. 이것을 성철 스님은 구름과 해의 비유로 설명한다. 본래 진여 그 자체인 자기 자신의 성품, 그 지혜의 태양은 가없는 빛으로 온 세상을 언제나 비추고 있지만, 무명의 구름이 잔뜩 끼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저기 푸른 하늘과 태양이 있다고 누누이 얘기해 주어도 못 믿어워 하고, 악착같이 회색 구름이 본래 하늘인 줄로만 아는 것이다. 그러다가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면 그 찬란한 햇살이 확연히 드러난다. 새로 만들어진 창공도 아니요 새로 생긴 해도 아니다. 원래 있던 그 모습을 실제로 목격하는 것일 뿐이다. 일단 한번 푸른 하늘과 해를 목격하고 확인하면, 구름이 덮인 날이라고 해서 그 푸른 하늘과 태양이 없어졌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번이라도 보고 확인했으면 그 보고 확인한 것을 돌이킬 수는 없다. 그래서 불퇴전(不退轉)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눈을 가리는 구름, 그 무명은 정체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성철 스님은 원효(元曉)와 현수법장(賢首法藏)의 『기신론소(起信論疏)』를 인용하면서 망념(妄念)이 바로 무명이라고 적시하였다. 그리고 망념이란 분별(分別)에 다름 아닐 터이다. 분별 망념에는 여러 가지 층이 있다. 성철 스님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의거하여 거친 망념 여섯 가지[六麤]와 세 가지 미세한 망념〔三細〕을 언급한다. 성철 스님은 『선문정로』에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았지만 참고 삼아 여기에서 소개하자면, 세 가지 미세한 망념이란 무명업상(無明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으로 일어나는 망념을 가리킨다. 무명업상이란, 깨치지 못한 탓에 마음이 움직여 업(業)을 짓는 것을 말한다. 깨치면 마음의 움직임도 없을 텐데, 마음이 움직이는 탓에 괴로움이 있게 된다. 둘째 능견상은 그 움직이는 마음이 지·감각(知感覺)의 주관이 되는 것이요, 셋째 경계상은 주관이 생김으로써 그 지·감각의 대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들 미세 망념은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의식하면서 일으키는 생각의 차원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애당초 한 개별자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깨치지 못한 탓에 윤회하고 있으므로 사실에 담긴 기본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도, 무명업상이 일어나는 것은 깨치지 못한 탓이라고 설명한다. 이 세상에 한 개별자로 태어났다고 함은 이미 윤회하는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태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 속에 이미 업(業)을 업고 있으며 또 짓게 마련이라는 기본적인 조건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이상 아상(我相)을 갖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또한 대상이 있게 된다. 세 가지 미세 망념이란 그러한 중생의 존재론적인, 또한 인식론적인 기본 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 가지 거친 망념이란 그런 기본 조건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는 좀 더 뚜렷한 분별적 인식과 행위, 상황을 가리킨다. 지상(智相), 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字相), 기업상(起業相), 그리고 업계고상(業繫苦相)이 그것이다. 간단하게 쉬운 말로 엮자면, 주관과 객관이 만나서 좋다, 싫다 하는 인식을 일으키는데〔智相〕, 그 좋거나 싫다는 생각들이 또 다른 좋고 싫은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相續相〕. 다리가 아파지는 것은 싫다는 생각은 걷기가 싫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자동차를 타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또 이어진다. 좋고 싫음은 당연히 집착으로 이어지고〔執取相〕, 그 집착의 생각과 대상에 온갖 개념, 이름을 붙여 고정시키고는 이제는 거꾸로 그 개념, 이름에 끄달려 좋고 싫음을 헤아린다〔計名字相〕. 그리하여 온갖 업을 짓게 되고〔起業相〕, 그 업에 매여 괴로움에 빠져 살게 된다〔業繫苦相〕. 

 

이러한 분별 망념이 겹겹 구름으로 중생의 하늘이 되어, 본래 제 하늘인 푸른 하늘과 본래 제 정체인 부처로서의 자성(自性), 진여자성(眞如自性)의 태양을 가리고 있다. 성철 스님은 그러한 구름이 짙은 것이든 옅은 것이든 한 점도 남지 않고 사라져야 비로소 견성이며 성불이라고 역설한다. 아무튼 그래도 의문이 하나 남는다. 무명의 구름, 그 정체는 설명되었지만 그 구름이 도대체 왜 거기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깨치지 못했으니까’라고만 대답된 셈이다. 깨치지 못한 이유는 망념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망념은 왜 일어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변은 ‘깨치지 못해서 일어난다’고 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잡담 제하고 깨치고 못 깨치고 만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해석학적 순환’이 떠오르는데, 그도 그것이 꼭 잘못된 순환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 순환이 그려내는 원의 텅 빈 공간에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사들을 따라서 원만 그리고 있지는 못하겠고 자꾸 따지면서 얘기하려 드는 것이 학자들의 업이다. 무명의 구름은 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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