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및 특별기고]
영어망상?!으로 비롯된 해외포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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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스님 / 1997 년 6 월 [통권 제6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9,321회 / 댓글0건본문
36분의 큰스님 상좌 중에 특이하게도 해외포교의 현장에서 수행과 불법을 펼치고 계시는 원명스님은, 1년의 반 이상을 지구촌 곳곳에서 보내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구(舊)소련 지역의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의 우르베키스탄이나 키르키르스탄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싱가폴이나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건립한 해외포교당을 살피고 발전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하늘로 길로 다니셔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10여 년 전 해외포교의 꿈을 안고 세운 국제연등불교회관(Lotus Lantern International Buddhist Center)에서는 한국불교를 배우러 찾아오는 푸른 눈의 외국인들과 내국인을 위한 강좌와 참선 및 워크셥들이 항상 열리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누구나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찾아와서 수행할 수 있는 오픈(Open) 선원이 생겨야 한다는 원력으로 3년 전부터 시작한 강화국제선원 불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20여 년 전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나 돌아와서 해외포교를 해야겠다고 큰스님께 말씀드렸을 때, 꾸지람 보다는 꼭 필요한 일이라며 인정하고 격려해 주신 큰스님이 계셨기에 오늘의 이 시점이 가능했다고 하시는 원명스님, 잠시 틈을 내어 만나 뵙고, 30년의 세월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 편집부
올림픽 선수촌 법당에서
소나기가 내릴려는가.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바닷내음과 물기 가득한 바람이 단청 마무리가 한창인 법당 추녀 끝을 지나 마당 가운데 활짝 핀 감자 꽃에 머문다. 스위스 사람으로서 스리랑카와 티벳 등지에서 불교를 공부하다 한국에 와서 출가하여 상좌가 된 일고스님이 단청 일을 하는 사람들과 조용히 비겆이를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만이 존재의 자취를 드러낸다.
오는 9월 27일 개원을 앞두고 마무리가 한창인 이곳은, 큰스님 상좌로서 특이하게 해외포교의 일을 해온 그동안의 노력과 헌신이 우리나라에 결실을 드러내는 강화 국제선원 불사의 현장이다. 강화군 강화읍 불은면과 길상면의 접경에 위치하는데, 얼마 전 선방과 요사채, 객실채 등을 완공하고 지금은 법당 단청이 한창이다. 한 손길이 머물 때마다 색색깔로 피어나는 문창살들, 이제 이 불사가 완공되면 그동안 펼쳐온 해외포교의 제2장이 새롭게 열리리라. 비록 큰스님은 계시지 않지만 처음 해외포교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흔쾌히 허락해 주셨던 것처럼 무척 흐뭇해하시리라 생각하며, 지난 시절을 돌이켜본다.
내 발로 찾아갔던 백련암, ‘원명’이라는 법명을 받고 큰스님의 상좌로서 보내온 세월이 어언 30여 년이 되었다. 물론 내 위에도 몇 분의 사형님들이 계시기는 하지만, 67년 큰스님께서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오셔서 백련암에 주석하시면서 받으신 행자 1호가 바로 나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모두 인연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내가 처음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아주 친한 친구가 불교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친구의 영향으로 절에도 가고 학생회 모임에도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이끌어준 친구보다도 내가 더 열심이었다. 3박 4일간 밀양 표충사에서 열린 수련회에 참석하고 난 뒤, 나의 신심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스님들과 함께 예불하고 바루공양하고 참선하는 등 하루하루의 생활이 더없이 기쁘고 즐거웠다. 그래서 집에 와서도 식사 때는 혼자서 바루공양을 할 정도가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대학입시 공부를 하기 위해 수련회로 인연을 맺은 표충사를 찾았다. 한 두어 달 머물면서 입시준비를 하는데 스님들께서 지나가는 말로 “학생, 그 공부해서 뭐하나”라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내심 공부해서 대학 들어가서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등등 너무나 눈에 빤한 인생인데, 이게 사내대장부가 가야 할 길인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절에 있으면서 걸망을 지고 왔다가는 수좌스님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는데, 도를 구하기 위해 참선정진하는 모습이 더없이 멋있어 보였다.
그러다가 한 수좌스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저도 출가할 생각이 있는데 이왕이면 큰스님께 가고 싶습니다. 종단의 큰스님이 계신 곳을 좀 일러 주십시오.” 그러자 해인사의 성철스님, 향곡스님, 청담스님, 전강스님, 통도사의 경봉스님 등 당시 큰스님들 얘기를 죽 들려주는데, 그 중에서도 장좌불와에 성격이 대단히 괴팍하고 무섭다라고 하는 해인사의 성철스님 얘기가 귀에 쏘옥 들어왔다.
출가할 결심을 하고 대구에서 해인사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지금이야 대구에서 해인사 가는 게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지만 그때는 서너 시간이 족히 걸리는 완행버스밖에는 없었던 시절이다. 마침 버스 안에 행자스님이 계시길래 “저도 해인사에 계신 성철스님에게 출가하러 가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나를 쳐다보면서 “보아하니 이제 대학 갈 나이인가 본데, 그 스님은 대학 안 나온 사람은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육조스님은 일자무식이어도 도를 깨치셨는데 도를 구함에 세속의 공부가 중요할까요. 어쨌든 저는 큰스님께 가서 말씀드릴겁니다”라고 배짱 있게 대답하였다.
천제스님의 인도로 백련암에 도착하여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왜 중이 되려고 하느냐?”
“견성성불하려고 합니다.”
“중노릇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잘 할 수 있겠느냐.”
“잘 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잘 살아 봐라”는 한마디로 나를 선뜻 받아주시는 게 아닌가. 그리고 앞으로 살게 될 방까지 데리고 가서는 “여기서 잠도 자고 공부도 하라”고 일러주셨다. 이렇게 해서 나의 백련암 행자생활이 시작되었다.
오픈 선원으로서 제2의 해외포교의 장소가 될 강화국제선원의 모습
비록 30여 년 전 일이라지만 우리 사회의 빠른 변화속도로 본다면, 그때의 생활은 참으로 원시적이었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불조심해야 한다며 큰스님께서 초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호롱불을 사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아침이면 호롱병 닦는 것이 큰일이었다. 공양간에도 일체의 문명적 도구가 없었다. 숯불 피워서 밥 짓고 반찬을 만들었는데, 숯이 떨어지면 생나무 꺾어다 불을 피우느라고 매운 연기에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석유곤로라도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얄궂은 생각이 들곤 했다.
백련암 행자가 되면 우선 능엄주부터 외워야 한다. 법전스님은 일주일만에 외우고 또 어떤 분은 보름만에 외웠다고 해서 밥 먹으면서도 외우고 불 때면서도 외우니 나도 한 보름만에 외운 것 같다. 그리고 백팔참회와 전경 외우기, 일본어 익히기, 하루 나무 두 짐이 기본이었다. 또 당시는 한글로 된 불교서적이 많지 않은 때라 큰스님께서는 일본어를 공부하도록 시켰다. 간단한 자습서 하나로 가나 및 문법을 익히고 나면 일본 소설을 읽고 바로 불교성전을 읽었다. 그리고 경전을 보거나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읽었다. 책은 마음대로 가져다 보는 것이 아니라 큰스님께서 준 책을 다 보고 가져가면 다음 책을 손수 꺼내 주셨다.
행자시절을 돌이키면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 떠오른다. 출가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당시 큰스님은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오신 지 얼마 안 되어서 주로 큰절에서 생활하시고 하루에 꼭 한 번 백련암으로 산책을 오셨다. 다른 몇몇 식구들도 스님을 모시고 큰절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백련암에는 나와 법명이 기억나지 않는 노스님과 살았다. 큰스님께서는 백련암에 올라오시면 잠시 방에서 쉬시고 나서 큰절로 내려가셨는데, 그럴 때마다 나와 노스님은 불면석 앞까지 나와서 전송을 했다. 그 날도 큰스님을 전송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노스님이 가슴이 답답하다며 업어서 방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방에 들어와 노스님을 눕히는데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나이도 어리고 처음 보는 일이라 당혹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마침 백련암에는 큰절 하고만 연결되는 군용비상전화가 있었다. 사형스님을 찾아 이리저리 연락을 하는데, 그 사이 노스님은 생을 달리하고 말았다. 한참이 지나서 연락을 받은 스님들이 올라오고 다음날 백련암 뒷산에서 다비를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나에게 큰 숙제가 떨어졌다. 내일 다비에 스님들이 많이 오실 터이니 떡국으로 공양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몇 분 정도가 오실 것 같냐고 물으니, 한 5백여 명은 오지 않겠냐고들 했다. 다음날 일찌감치 원통전 큰 가마솥에 물을 한가득 붓고 떡국을 끓였다. 그런데 다비식을 마친 스님들께서 이 작은 암자에서 공양할 게 뭐 있겠냐고 하시며 다 내려가 버리시는 게 아닌가. 아! 이 일을 어쩐담. 쌀을 씻다가 정미가 덜 된 낱알이 나오면 손으로 까서 쓸망정 한 톨이라도 흘려버렸다간 큰스님 날벼락이 떨어지는데, 저 가마솥의 떡국을 혼자서 어쩐담. 아마 혼자 먹을려면 1년도 더 걸릴 것만 같았다. 큰스님께 의논을 드리자 암자에 갖다 주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날 하루 종일 양손에 바게츠를 들고 이 암자 저 암자로 떡국을 퍼 날랐다. 저녁 무렵이 되자 가마솥에는 두 바가지 정도가 남았다. 그렇게 하고도 한 달 정도는 그 떡국을 먹어야 했다.
행자 생활을 마치고 계를 받으러 가야 하는데, 문제는 큰스님 상좌 허락이었다. 그때 큰스님 곁에는 이미 몇 분의 원 자 돌림 상좌가 있었는데, 모두 서울대학이나 교수 출신들이어서 아마도 상좌 허락 받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렇지만 “스님 상좌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아뢰자 그런 속설과 우려를 일축이라도 하듯이 ‘원명’이라는 법명으로 상좌허락을 하신 것이다.
계를 받고 나자, 나는 하루라도 빨리 선방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큰스님께 ‘선방을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큰스님께 호되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이눔의 자식, 경전과 어록을 좀 더 공부할 것이지…. 모든 게 기본이 단단해야 한다.”
그렇지만 출가를 결심한 것도 그랬고 어서 빨리 참선 정진하여 ‘견성성불’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큰스님 말씀을 듣지 않고 내 고집대로 선방으로 도망을 갔다. 가서 생활해 보니 큰스님 말씀처럼 기초가 단단해야 함을 느끼고 해제를 하면 백렴암에 올라가서 스님 말씀대로 경전공부를 병행했다.
그런데 10여 년 수좌생활을 그만두고 지금의 해외포교의 길로 나를 나서게 하는 일이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좋은 말로 해서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선방에서 한 번 일으킨 망상 탓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수도암에서 한 철을 날 때였다. 이상하게 화두가 잡히지 않고 자꾸만 망상이 일었다. 세속의 학문을 놓은 지도 10년이나 지난데다가 학교 다닐 때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 영어였는데, 화두는 어디로 가버리고 자꾸만 영어가 생각났다. 영어라면 고등학교 2학년 때 무서운 영어선생의 회초리를 피해 한 학기 열심히 한 것이 전 재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때 배운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자나가는데도 하나하나가 너무나 분명하게 기억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출가해서 공부만 하다 보니 마음이 맑고 순수해서 그랬는지, 그 식(識)대로라면 한 철만 공부를 해도 영어를 완전히 마스터할 것 같았다. 마침 해제도 얼마 안 남아서 해제를 하면 한 철 영어공부를 해 보리라 생각을 한 것이 스님으로서의 내 생의 큰 전환점이 될 줄이야.
해제를 하고 서울에 올라와 영어 학원을 다니는데 실제로 남들보다 학습효과가 뛰어났다. 그렇지만 영어를 배우기는 해도 별달리 목적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 학원에 스리랑카에서 출가하여 우리나라에 온 외국스님이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생김새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스님은 나에게 남방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당시 나 자신이 남방불교에 대하여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게다가 우리나라와도 교류가 많지 않은 때라 남방불교가 근본불교라고 하는 그 스님의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렇다면 큰스님께서도 평소 원전에 대한 말씀도 많이 하셨으니 남방불교도 공부하고 배운 영어도 써 볼 겸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큰스님께 말씀을 드리러 갔다. 하지만 큰스님께서는 스님 본분사 외에 일체의 소임이나 잡일을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당연히 몽둥이 세례를 받으리라 각오를 했다. 그런데 큰스님께는 너무나도 흔쾌하게 허락을 하셨다.
“앞으로의 시대는 외국어도 잘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되니 가서 열심히 하거라.”
80년 초, 나는 선방으로 가는 대신에 스리랑카 행 비행기에 걸망을 실었다. 스리랑카에서는 봉은사와 자매결연을 맺은 캘라니아라고 하는 사원에 머물렀는데, 그 나라에서는 제일 크고 역사도 오래된 유명한 사원이었다. 거기에 머물면서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공부를 하는데, 나의 주된 관심사는 수행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포교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지금이야 유학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스님이 외국 유학을 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묵고 있던 사원에는 이미 많은 서양인들이 유학와서 출가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있었다. 밖에 나가 보니 우리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로 살고 있었나가 피부로 느껴졌다. 그들은 한 결 같이 이미 영국이나 유럽 쪽에는 일본을 비롯한 티벳, 버마 등의 불교가 소개되어 많은 서양인들이 공부를 하거나 종교로서까지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직접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리랑카에서 영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럽에 가보니 한국불교는 그 존재 자체가 없는 듯이 보였다. 단적인 예로, 영국 런던에 있는 국제불교도서관에는 일본, 티벳, 스리랑카, 버마 등 각국의 불교가 영어로 번역되어 각 나라별로 백 권에서 수백 권씩 서가를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불교도서는 한 권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뒤지고 찾은 끝에 겨우 한국불교를 소개하는 책자를 한 권 찾았는데, 송광사 국제선원에서 번역되어 나온 구산스님의 법문집이 단 한 권 있었다. 도서관 관리자에게 이 책 이외에 한국불교 관련 도서가 더 있느냐고 물으니, 가끔 한국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료가 전혀 없어 안타깝다고 하였다. 그 당시 영국 내에만도 티벳, 일본 등 150여개의 해외포교당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한국의 포교당은 유럽을 통틀어 하나도 없을 때였다. 게다가 우리에게 불교를 전해 받은 일본은 이미 팔구십 년 전에 유럽에 와서 일본불교를 포교하지 않았는가.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해외 포교당을 찾아 그들의 수행과 포교활동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러나 귀국을 결심하면서 나는 다시 고민에 쌓였다. 큰스님께 유학 얘기를 드렸을 때의 마음대로라면 두말없이 선방으로 가야 하는데, 몇 년 동안 외국에서 체험한 한국불교의 현실을 생각하니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다시 야단맞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큰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말씀을 드렸다.
“스님, 저는 앞으로 국제포교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벼락은커녕 “중요한 일이니 열심히 하라”고 흔쾌히 격려까지 해주시는 게 아닌가.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큰스님께서도 마음속으로 해외포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정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확신과 위안을 받으니 힘이 솟았다. 만약 큰스님께서 조금이라도 다른 말씀을 하셨더라면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큰스님의 법을 따르는 상좌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문서포교를 생각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번역을 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돈도 많이 들 뿐더러 무엇보다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우선 자그마한 방을 얻어 주한 외국인을 가르치는 일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얻으러 다녔다. 10여 년 선방생활하다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들어왔으니 신도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돈도 넉넉하지 않았다. 겨우 약간의 돈을 마련하여 조계사 근처를 한 3개월 동안 헤집고 다니다가 좋은 인연을 만나 지금의 국제연등불교회관이 있는 이 집을 얻게 되었다. 지금 둘러보면 이 좁은 데서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외국인을 위한 불교 기초교리 강좌, 영어로 불교경전 공부하기, 참선강좌, 한국문화 배우기 등등 외국 스님 및 불자들과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중, 소련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자기는 불자인데 그 곳에 한번 와서 불교를 가르쳐 줄 수 없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소련과는 국교가 수립되기 전이었지만 다음날 나는 겁도 없이 소련으로 떠났다. 우리가 생각하던 공산주의 국가니 철의 장막이니 하는 말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오히려 인간의 순수성이 잘 보전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불교에 대한 무한한 관심에 큰 감동을 하고 정신없이 시베리아로 중앙아시아로 소련의 전 지역을 다녔다. 가는 곳마다 강의하는 곳은 꽉꽉 만원이었고, 우리 지역에도 법당 하나 만들어 다라고 애원이었다. 그 후 일본에 서너 번씩 다니면서 일곱 분의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다. 내가 힘만 닿는다면 백분 천분의 부처님과 법당을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몸이 따르지 않고, 부처님을 모실 재정적 능력은 없고, 나를 보좌해서 포교할 스님도 없었다. 대학에 가서 한 시간 예약으로 강의를 시작하면 그런 법문 들을 기회가 없다면서 3시간이 되기도 하고 5시간이 되기도 하고 7시간씩 강의를 하곤 했다. 소련은 그야말로 포교의 황금어장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함께 일할 스님이었다. 아시다시피 소련은 우리나라보다 2,3백 배 큰 나라로서 한 도시로 옮겨 다니는데도 2,3십 시간은 최소고 며칠씩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한두 달씩 걸리니 먹을 것은 귀하고 몸이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한두 스님이라도 이곳에 와서 도와준다면 몇 배의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하며 사제나 아는 스님들에게 부탁을 해도 아무도 소련으로 갈려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 땅에 절과 공양주까지 구해 놓고 한 철만 살러 가자고 해도 아무도 나서지 않아 처음에는 원망도 하고 욕도 했으나 이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고 문제점이니 어찌하겠는가.
해외포교를 하면서 또 하나의 숙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였다. 사실 서구인들은 불교를 종교적인 측면에서보다는 교리적 철학적인 측면에서 더 관심 있게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란 교리적면과 신앙적인 면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한다. 한국 불자들이 기복과 기도 쪽이 강하다면 서양 불자들은 철학적․학문적으로 탐구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절을 시키고 아비라기도도 시켰다. 그러므로 그들이 선을 좋아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참선만 가르치면 얼마 못 가서 다 그만두고 만다. 게다가 그들이 말하는 명상(Maditation)과 참선의 개념이 혼용되어 진정한 선을 실현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선 불교의 기본교리를 가르치고, 아침예불과 108배, 절 등으로 어느 정도 공부가 되고 나서 화두 참선을 하도록 해야 한다. 견성(見性)은 호기심만 충족시키거나 적당히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오매일여를 뛰어넘어 바른 깨달음이 깊이 와야 하는 것이다. 큰스님께서 소련 절 이름을 정각사(正覺寺)라고 지어 주셨듯이,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포교를 하든 바른 법, 바른 깨달음을 펴야 한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겁 없이 뛰어든 해외포교의 일이었다. 스스로 찾아간 백련암, 단 한 번의 꾸지람으로 평생 간직해야 할 가르침을 심어주신 큰스님, 10여 년 선방을 다니다가 우연히 끼어 든 영어 망상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해외에서 접한 참담하기 그지없는 한국불교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든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인데 벌써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큰스님의 인정과 격려가 없었다면, 어찌 큰스님의 상좌로서 이 일을 해올 수 있었을까.
한평생 철두철미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살다 가신 큰스님. 지난 세월, 매일같이 엄한 질책과 가르침 속에서 하루해가 어찌 가는지 모르게 큰스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큰스님 품을 떠나 해외포교 일을 하면서 힘이 들거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 꾸지람이 오히려 나를 깨우는 힘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큰스님의 그늘이 깊고 넓기 때문이다. 며칠 전, 소련을 다녀오면서 나는 깊은 그늘을 눈 푸른 소련인에게서 보았다. 그들은 내가 오면 화두를 타겠다고 4명의 소련인이 3천배를 성취한 것이다. 너무나 뿌듯한 일이었다.
새로운 개척지에 씨를 뿌리는 심정으로, 다가올 21세기에는 서양에도 불법의 꽃이 활짝 필 것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지구촌 구석구석을 찾아가는 것이다.
* 국제연등불교회관에서는 외국인 및 국내인을 위한 다양한 모임과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영어로 불교배우기, 팔리어 경전 공부하기, 참선, 매주 토요일 어린이 불교시간, 일요법회 등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 강화 국제선원은 1997년 9월 27~28일 개원을 앞두고 한창 마무리 단장을 하고 있습니다. 강화의 맑은 바람과 자연 속에서 생활 속의 선원으로 자리매김할 이 선원에는 누구든지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면 전화 (02) 735-5347이나 팩스(02)720-7849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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