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노래]
큰스님은 큰 시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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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 1997 년 9 월 [통권 제7호] / / 작성일20-05-06 08:36 / 조회9,465회 / 댓글0건본문
스님.
서울의 장경각 사무실이란 곳에서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독서를 하시곤 하면 메모를 하시는 습관이 있더군요. 저는 그 메모 가운데 한 장을 보면서 몹시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 메모 용지들은 종류가 다양했는데, 신도들이 떡을 가지고 올 때 싸 온 소위 떡 종이도 있었고, 지나간 일일달력 용지, 쓰고 남은 편지용지, 그리고 제 눈에도 낯익은 예전 학생들에게 사랑을 받던 대학노트 등도 있었지요. 한 결 같이 스님께서 얼마나 검박하셨는지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것들이었지요.
성철스님의 친필
스님.
저는 저를 놀라게 한 메모 용지를 그 자리에서 얼른 복사를 했지요. 집안 식구들과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걸 보면 모두 저처럼 감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영문자 필기체로 먼저 쓰고 그 밑에 스님의 자필로 번역이 되어 있는 그 메모는 저를 네 번이나 놀라게 했습니다.
첫번째는 영문자 필기체의 달필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아름답게 쓰려면 적어도 영어에 달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영어를 10년 이상 배운 저로서도 영어 문장을 그렇게 아름답게 써 본 기억이 없고, 또 제 주위에 영문학자들이 많지만 그렇게 멋들어지게 쓴 달필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랬습니다.
두번째는 그 영문 밑에 번역해 놓은 스님의 번역 실력이었습니다. 비록 한글 맞춤법이 더러 틀린 곳이 있었지만 그 적확한 어휘 구사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세번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강조한 물리학자 뉴튼의 겸허한 말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아마 하심(下心)을 강조하기 위해서 뉴튼의 고백을 메모하신 것 같은데, 번역한 내용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내가 세상에 어떻게 보일런지 모르나 그러나 나에게는 내가 바닷가에서 놀며 때때로 미끄러운 조각돌이나 보다 아름다운 조개껍질을 찾으며 스스로 즐기는 오직 한 소년같이 생각된다. 한편 크나큰 진리의 바다는 전혀 발견되지 않은 채 나의 앞에 놓여 있다.
네번째는 무슨 내용이든지 은유를 좋아하시는 스님의 시인적인 기질이었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뉴튼의 말도 얼마나 시적입니까. 저는 스님이 호랑이같이 무섭고 자신을 혹독하게 담금질하는 그런 같은 모습을 먼저 떠올리기만 하였는데, 막상 이 메모를 보면서는 ‘겉으로는 태풍이 불지만 속으로는 봄바람을 지닌 분이구나’ 하고 느꼈던 것입니다.
스님.
그래서 저는 천제스님을 만나 뵙고는 스님의 시인적 기질을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한 적이 있었지요. 그랬더니 이런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암 시절이었어요. 달 밝은 밤이 되면 큰 소리로 한산시를 외우곤 하셨어요. 또 중국 원관(圓觀)스님의 시를 하도 많이 읊조리셨기 때문에 그때 행자였던 저마저 저절로 외우게 됐습니다.”
원관스님의 시를 천제스님이 성전암 시절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낭송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삼생(三生)을 넘나드는 것이었습니다.
삼생들 이 옛 주인이여
달구경 추월함은 말하지 마라
부끄럽다 정든 사람이 먼곳에서 찾아오나
이 몸은 비록 다르나 자성은 항상 같다
전생 내생 일이 아득하여 알 수 없는데
인연을 말하고자 하니 창자가 끊어질 것 같다
오나라 월나라 산천은 이미 다 보고
도리어 배를 돌려 구당으로 간다.
또한 스님께서 성전암 시절을 마감하고 거처를 옮기시려고 했을 무렵에는 더욱 자주 이 시의 끝부분을 아주 멋드러지게 외우시곤 하였다고 천제스님이 전해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오나라 월나라 산천’은 스님으로서는 그동안의 행각처일 터이고, 배를 돌려 가겠다는 ‘구당’은 스님께서 출가하신 해인사가 아닌지요.
스님.
아무튼 저는 스님이야말로 한국이 낳은 대시인이라고 결론을 짓고 스님의 법문집을 다시 살펴보기에 이르렀습니다. 법문집 중에서 특히 ‘장경각’에서 발간한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주목하여 몇 번이나 정독을 하였었지요. 과연 저의 추측은 정확했습니다. 스님이야말로 시다운 시를 쓰신 대시인이었던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잡다한 일상사를 콩이니 팥이니 노래하는 조무래기 시인이 아니라 인생의 영원한 행복과 진리를 보여주신 큰 시인임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우연히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주장한 뉴튼의 발견보다 더욱 대단한 발견이라고 무릎을 치면서 스님의 법어, 아니 우주의 대서사시를 한편 한편 읊조려 보았습니다.
이 시는 1986년 초파일 법어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한 뿌리라는 대자비의 깨침을 주는 생명찬가(生命讚歌) 같은 철학시이기도 하지요.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없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구름 되어 변화무쌍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귀여운 부처님들, 허공을 훨훨 나는 활발한 부처님들,
교회에서 찬송하는 경건한 부처님들, 법당에서 염불하는 청수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넓고 넓은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 우렁찬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오고 가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천지는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이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세계는 모든 고뇌를 초월하여 지극한 행복을 누리며
곳곳이 불가사의한 해탈도량이니 신기하고도 신기합니다.
입은 옷은 각각 달라 천차만별이지만 변함없는 부처님의 모습은 한결같습니다.
자비의 미소를 항상 머금고 천둥보다 더 큰 소리로 끊임없이 설법하시며
우주에 꽉 차 계시는 모든 부처님들, 나날이 좋을시고 당신네의 생신이니
영원에서 영원이 다하도록 서로 존경하며 서로 축하합시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처럼 우주의 섭리를 그린 철학시를, 그러나 조금도 사변적이지 않고, 오히려 흥겹고 재미있게 쓴 시를 본 적이 없습니다. 천지가 한 뿌리이니 서로 존경하고 축하하자는 사상이 얼마나 쉽고 가슴에 와 닿습니까. 스님, 저는 이 시를 불경의 한 구절처럼 외우겠습니다. 스님의 이 시를 저의 삶이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화가 날 때나 쓸쓸할 때나 가만히 읊조리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생명을 아끼고, 더불어 옆에 있는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나중에는 서로의 생명을 축하하도록 하겠습니다. 스님, 고개 숙여 스님의 법문에 감사드립니다.
* 정찬주 님의 글을 알리는 난의 제목이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영원한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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