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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面石]
비구니계의 큰 대들보이셨던원허당 인홍큰스님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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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1997 년 12 월 [통권 제8호]  /     /  작성일20-05-06 08:33  /   조회9,85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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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홍스님 구술, 微侍者 정리 

 

지난해 4월 중순, 우리는 또 한 분의 큰스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가시는 길을 따라 한 발 발자국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원허당 인홍 큰스님. 태산 같은 엄격함과 바다보다 깊은 대자비와 끊임없는 정진으로 한국 비구니계의 오늘이 있게 하신 큰스님. 

성철 큰스님과의 만남을 ‘새로운 출가’라고 하실 만큼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시고, 평생 철석같은 신심으로 도를 위해 생명을 다하신 큰스님. 그 크신 어른께서 열반하시기 몇 해 전, 고구정녕한 말씀과 행장을 기록한 한 스님이 계셔 오늘 그 가르침을 다시금 되새겨 보는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결제 중에도 불구하고 자료를 복사하고 인홍 큰스님의 발자취를 영상으로 옮긴 비디오까지 보내주신 석남사 스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기록을 고경 독자들을 위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발심 수행자가 도를 구하러 남전스님을 찾아가다가 밭에서 일하는 한 스님을 만났다.

밭 가는 농부이려니 생각한 비구는 “남전스님 계시는 곳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하고 길을 묻는다.
“남전으로 가려면 20년, 30년 쟁기로 땅을 갈고 호미로 밭을 매야 한다”고 남전스님은 대답한다.
만일 누가 “인홍스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20년, 30년 한결같이 노스님 곁을 묵묵히 지켜온 가지산은 답할 수 있으리라.”

 


 

  

부처님 법대로, 큰스님 법대로

 

인홍 노스님의 생애에서 1949년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였습니다. 월내 묘관음사에서 노스님 수행에 확고한 지표가 되신 성철 큰스님을 처음 친견하신 것입니다. 법사스님이신 성철 큰스님과의 인연은 노스님 일생에 획기적인 일이었고, 말할 수 없이 크고도 ‘새로운 출가’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겨울 묘관음사에는 큰스님을 비롯한 향곡 큰스님 이하 사부대중이 결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성철 큰스님을 뵙고 깊이 믿고 존경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노스님께서 정진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경계가 났다고 합니다. 성철 큰스님은 “그게 아니다.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하여 오매일여가 되어야 된다”는 삼분단 법문을 들려주셨답니다. 즉 “우리의 공부는 실제로 오매일여를 넘어 내외명철한 구경묘각이 견성이다. 그렇게 되려면 목숨을 던져 놓고 해야 한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목숨을 돌보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는 큰스님의 법문이 만고 불변의 진리임을 확철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한 큰스님의 철저한 계행과 “부처님 정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구도자의 숭고한 자세 앞에서 노스님이 신심은 바른 법을 위해서 도(道)를 위해서라면 생명을 바치겠다는 철석같은 각오로 굳게 다져졌던 것입니다.

 

한겨울인 어느 날, 성철 큰스님은 누비옷을 입고 있는 노스님을 묘관음사 앞 연못으로 밀어넣었습니다. 겨우 연못에서 빠져나왔지만 옷은 이미 푹 젖어 얼음이 쩍쩍 달라붙었습니다. 노스님은 방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 젖은 옷을 입은 채 그대로 계속 정진하여 옷이 다 말랐다고 합니다. 큰스님의 대자비와 노스님의 대신심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일화입니다. 노스님께서 평소에도 “나는 큰스님 법대로 부처님 정법대로 사는 회상을 만들기 위해 석남사 도량을 수호했다”고 말씀하신 걸 생각하면, 큰스님에 대한 노스님의 존경과 신심은 실로 가이없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노스님께서 성철 큰스님 법대로 처음 회상을 이룩하신 것은 경남 창원의 성주사에서였습니다. 40여 명의 대중이 큰스님께서 정하신 공주규약을 따라 철저하게 생활했습니다.

 

一. 삼엄한 불계와 숭고한 조훈을 근수역행하야 구경대과의 원만속성을 기함.

一. 여하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불조교칙 이외의 각자 사견은 절대 배제함.
一. 반월반월마다 포살대계를 송함.
一. 좌차는 계납에 의함.
一. 매일 2시간 이상 노무에 취함.

등 18가지였습니다.

 

그리고 화두를 받기 위해서는 3천배가 아닌 3만배를 했고, 불공도 안 하고 신도단련도 일체 안하고 오로지 정진만 했습니다.
성주사 대중은 해제 때면 안정사 토굴에 계시는 성철 큰스님께 인사를 갔습니다. 큰스님은 다짜고짜 “공부한 것 내놔라. 공부한 것 내놔라. 공부한 것 내놔라.”하고 세 번 말해서 아무도 내놓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주장자로 두들겨 패고 돌도 던지며 대중을 내쫓으셨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자비의 큰스님 앞에 노스님과 대중은 더욱 노력하지 못한 후회와 자책에 얼굴을 들지 못했고 다시금 마음을 다져 더 열심히 정진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며칠 전 노스님께서는 당시를 회고하시며, “큰스님께서 ‘실상은 무구상청정하야 귀천노유를 사여불호대 극죄악인은 극존경하고 심원해자는 심애호하라’는 게송을 써 주시며 ‘화합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때 분위기가 너무나 엄숙해서 ‘가슴이 서르르’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이건만 그 말씀을 전해 듣는 사람에게도 그때의 엄숙함이 이어져 노스님 말씀처럼 가슴에 ‘서르르함’이 전해져 오는 듯합니다. 아마도 그 시절은 노스님에게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소중한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행정진하며 ‘부처님 법대로 큰스님 법대로’의 회상을 설립하겠다는 노스님의 원력이 아름답게 꽃핀 것은 1957년 이후 이곳 석남사(石南寺)에서였습니다. 석남사 대중도 성주사 대중과 매한가지로 큰스님을 친견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큰스님을 친견하기란 하늘에 별따기 만큼 어려웠습니다. 매번 시자를 통한 문전박대가 일쑤였고, 거의 뵙지도 못하고 대문 밖에서 인사만 드리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태산 같은 의지와 불굴의 신심으로 평생을 일관하신 인홍 큰스님의 방에 걸려 있는 성철 큰스님의 십이명.

 

 

그렇게 매번 쫓겨나면서도 노스님은 해제 때면 석남사 대중과 함께 도시락도 싸고 떡도 싸서 걸망에 지고 운문재를 넘었습니다. 몇 시간씩 걸어 대천에서 차를 타고 팔공산 성전암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뵐 수 있을 때까지 며칠이라도 있자”고 각오를 다지며 철통같이 둘러쳐진 철조망을 이리저리 틈을 내어 한 사람은 위에서 잡고 또 한 사람은 아래서 철망을 누르고 해서 장삼을 입은 대중이 하나씩 기어들어 갔습니다. 발소리를 죽이고 숨소리도 죽인 채 큰방에 앉아 있으면 큰스님께서 나오시어 주장자 세례와 돌멩이 세례로 대중을 쫓아내셨습니다. 때로는 천재일우의 기회처럼 고생고생해서 큰방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뜻밖에 “왔나, 철조망 구멍으로 들어왔나” 하시면서 웃으셨습니다. 그때 대중의 마음은 ‘감격’ 그대로였을 겁니다. 이어서 “뭣하러 왔나” “공부가 안 되어서 법문 들으러 왔습니다”라고 답하면 “너그한테 법문은 필요 없어. 공부는 하지도 않으면서” 하시면서 또 몽둥이를 휘두르셨습니다.

 

대중이 혼비백산하여 마루로 나오면 도량은 눈이 가득한데 신발이 하나도 없습니다. 큰스님께서 시자를 시켜 “신발을 모두 소쿠리에 담아 밖에다 버려라”고 하신 것입니다. 겨우 신발을 찾아 신고 나서면 먼 길을 왔으니 해는 저물어 캄캄한 밤중에 동네에 내려와 탁발로 주린 배를 채우고 간신히 방 얻어 자곤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가슴 한구석엔 서릿발 같은 꾸지람이 얼얼하게 남아 있는데 금생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그리운 옛 시절이 되었구나” 하시며 노스님은 눈을 지긋이 감으십니다. 노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몽둥이세례 그대로가 큰스님의 대자비 법문이었고 또한 무수히 쫓겨나고 구박받으면서도 끊임없는 불퇴전의 의지로 선지식을 향한 노스님과 대중의 신심에 가슴이 저릿해 올 뿐입니다.

 

큰스님의 가피, 노스님의 정진 또 정진

 

노스님은 부처님과 다름없으신 큰스님으로부터 무량한 가피를 수차례 입으셨습니다. 석남사에 오신 지 4년째 되는 1961년 7월 13일, 그러니까 노스님께서 53살 되던 해였습니다. 갑자기 편찮으셔서 언양을 비롯해서 부산의 여러 병원으로 한약방으로 다녀보았으나 병명을 알 수 없었습니다. 묘경스님의 정성스런 기도에도 아랑곳없이 두 달 동안 고생만 하시던 9월 어느 날, 법희스님과 불필스님은 성전에 계시는 큰스님께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길을 나섰습니다. 만나 뵙기가 너무너무 어려웠던 시절, 예나 지금이나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신심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큰스님께서 나오셔서 나무 아래 서 계신 채로 잠시 생각하시더니 “너 대장은 아직 죽으면 안 돼. 살려야 돼” 하시면서 기도를 주셨습니다.

 

큰스님의 말씀대로 열여섯 명의 기도 부전이 만들어졌습니다. 능엄주 2명, 대참회 2명 즉 4명이서 4팀으로 나누어 2시간씩 교대하여 24시간 계속되는 3주간의 장좌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전 대중은 일심단결하여 지극하게 기도했습니다. 밤낮없이 도량을 울리는 참회와 발원의 간절한 목소리는 제불 보살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노스님의 상태는 췌장이 곪아터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외국인 원장이 손수 6시간이나 걸려 수술을 했는데 살아나신 것이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수술 후 혼수상태에서 일주일 동안 계속 잠만 자던 노스님은 깨어나서 말씀하시기를, “수술대에 누었는데 문수보현보살님, 관세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 세 분이서 주위를 둘러서서 배를 만져주셨다”고 합니다. 그 후 전혀 고통도 안 느끼시고 고름뭉치가 빠지더니 빠르게 쾌차하여 기도회향에 참석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석남사는 매년 정월 초 3일부터 9일까지 일주일 동안 능엄주대참회 장좌기도가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도 노스님은 담낭수술, 갑상선 수술 등 몇 차례의 대수술 때에도 대중 장좌기도와 아비라기도 등으로 많은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으셨습니다. 그것은 곧 큰스님의 크신 가피였고, 노스님에게 큰스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부처님이었습니다.

 

1966년 여름, 경북 문경 김용사에서 큰스님께서 최초로 사자후를 토하셨습니다. 큰스님의 초전법륜이셨습니다. 노스님은 석남사의 모든 일을 접어두고 대중을 인솔해서 법회에 참석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완행버스를 타고 점촌에서 내려 60리를 걸어야만 하는 먼 거리였습니다. 20여 일간 양진암과 대성암에서 머물렀습니다. 김용사 큰방에는 비구, 비구니만 100여 명 대중이 운집했습니다. 법문은 반야심경으로 시작하여 육조단경,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의 차례로 이어졌습니다. 선악을 떠나 모순이 융합된 세계, 일체만법이 서로서로 융화하는 중도사상에 입각한 큰스님의 우레 같은 사자후는 모든 대중을 신심의 바다에 빠뜨렸습니다. “얼마나 환희심나고 신심나던지”라고 말씀하시는 노스님의 표정만으로도 그때의 감회를 알 수 있는 듯합니다.

 

1967년 겨울, 큰스님의 두 번째 사자후인 백일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노스님은 역시 열 일 제치고 대중과 함께 홍제암에 머무르면서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현당에는 200여 명의 대중이 모였습니다. 10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결같이 쏟아지는 법문은 폭포처럼 힘차게 바다처럼 깊고 넓게 이어졌습니다. 바로 부처님의 무량설법이었고, 부처님의 무량광명이었습니다. 노스님께서 “그 당사의 마음을 누가 알겠느냐?”고 하신 걸 보면 그 법회의 가치와 무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화장찰해였음이 분명합니다.

 

노스님은 가람 수호도, 후학 양성도, 스스로의 수행도 둘이 아니었지만 그 무엇보다 큰스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정진 또 정진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지난 가을(93년 11월) 태산처럼 믿고 의지하던 큰스님께서 열반하셨습니다. 노스님의 심정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열반,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비통함이었을 겁니다. 인산인해의 대중도, 하늘도, 땅도, 숨죽여 통곡하던 다비식장에서도, 평생 존경하고 존경하던 선지식의 열반 앞에 노스님의 마음은 태양이 사라짐과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노스님의 서재엔 사바세계를 떠나시기 얼마 전 완간한 선림고경총서 37권과 큰스님 법어집 11권이 열반의 메아리처럼 꽂혀 있습니다. 노스님을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주고 가신 고귀한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음 생에도 기필코 큰스님 회상에서 수행하시겠다는 원력을 굳게 다지시는 노스님의 표정을 보면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이 진리처럼 느껴집니다.

 

저 소금산이 당신 것이야

 

노스님이 석남사에 오시기 전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누군가 큰 트럭에 소금을 가득 싣고와 스님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소금을 다 나를 주느냐고 하니까 뒤에 보이는 큰 산 전체를 가르키며 ‘저 산이 전부 소금산인데 당신 것이다’라는 꿈이었습니다. 노스님께서 꿈에 본 그 산이 바로 석남사를 품고 있는 가지산입니다.

 


1972년경 좌로부터 인홍스님, 묘엄스님, 불필스님과 해인사 백련암에서

 

노스님이 석남사 오셔서 주지를 맡고 사임하기까지 20여 년, 그 20여 년간 참 많은 불사를 하셨습니다.

대웅전, 극락전, 사리탑, 정수원, 누각, 강선당, 언양포교당, 동인암 및 요사 9동을 신축했습니다. 그러나 화주책을 들고 집집마다 다니신 적도 없고, 상좌들을 화주하러 내보낸 적도 없습니다. 가지산 크기 만한 노스님의 대복력에 비해 오히려 석남사 터가 좁았을 뿐입니다. 아마 도량이 넓었으면 훨씬 많은 건물을 지었을 겁니다.

 

노스님은 집 불사 못지않게 정진과 후학 양성에도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69년 심섬당에서 큰스님 지시대로 근래에는 처음으로 3년 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매일 새벽예불, 대참회 300배를 비롯해서 절속, 금욕, 천대, 하심, 정진, 고행, 예참, 이타의 수도8계와 잠 많이 자지 말 것, 책 보지 말 것, 간식 먹지 말 것, 돌아다니지 말 것 등의 큰스님 수좌 5계가 결사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혜춘 노스님, 혜관 노스님, 법희스님, 법용스님, 불필스님, 혜주스님 등 9분의 대중은 1972년 가을 무사히 회향을 했습니다. 그 결사 동안 총무스님, 재무스님, 교무스님, 원주스님도 3년간 소임결사를 했습니다. 그 시절은 두문불출하고 열심히 정진하는 스님들이 계시는 살아 있는 도량으로서 노스님 회상의 가장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정수원에서의 3차례의 3년 결사 및 매년 동안거 하안거도 큰스님 가르침대로 행해졌습니다.

 

일상의 예식에도 능엄주, 108대참회, 보름 그믐 마다의 포살, 법공양, 전경, 정초기도, 아비라기도, 3000배 100일기도 등 모두 큰스님 가르침대로 이행했습니다. 특히 포살은 전국 사찰 중 유일하게 해제 때도 반월마다 빠짐없이 낭송했습니다. 침계루, 심검당, 정수원도 큰스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셨으며 학인 입선은 영가대사의 증도가와 승찬대사의 신심명을 독송했습니다. 행자가 삭발할 때, 불명탈 때, 계 받을 때, 화두 탈 때, 반드시 전날 저녁 밤새워 3000배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석남사는 큰스님 말씀이 곧 법이었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실천은 큰스님을 향한 노스님의 지극한 신심이었습니다.

 

그동안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논란이 불교계에 적지 않게 파문이 일었으나 노스님 및 그 제자들은 한결같이 침묵했습니다. 왜냐하면 논란의 여지없이 오직 돈오돈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라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석남사 도량에서 수행한 상좌와 손상자가 250여 명에 이르고, 심검당 및 정수원을 거쳐 간 운수납자는 1,500여명에 이릅니다. 도의국사 개산 이래 비구니로서는 가장 큰 중창 불사였으며 가장 많은 후학양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노스님께서는 젊은 시절 법답게 수행하는 비구니 도량이 없음을 통탄하시고, 크나큰 원력을 세워 이곳 석남사에서 이루셨고, 이젠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모범 도량이 되었습니다.

 

대중스님이 부처님이고, 소임이 기도다

 

노스님은 매초, 매분, 매시, 매일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후학들을 냉엄하게 질책하시고 또한 가지산 자락처럼 넉넉하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매일 아침 공양 후 공사석에서는 노스님의 법문이 있었습니다.
“깨끗한 그릇에 물을 담으면 깨끗한 물이 되고 더러운 그릇에 물을 담으면 더러운 물이 되듯이 수행자는 계행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인욕해야 하고 하심해야 한다. 청빈하고 검소해야 한다.”

 

‘수도원은 용광로와 같고 대장간과 같아서 누구든 수행자로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기치 아래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백장청규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대웅전, 극락전 등 많은 불사를 할 때 쓰여진 나무를 산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낫으로 껍질을 벗기는 것도 비구니 스님들이 했습니다. 그 외에도 일렬로 서서 수십만 장 되는 기와 옮기기, 매일 나무 한 짐씩 하기, 모심기, 밭매기, 곡식 거두기 등 모두 스님들 몫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장부들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아마도 노스님은 우리 비구니들을 장부처럼 키우고 싶은 원력이 가득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쳐다보기만 해도 위험해 보이는 대웅전 지붕 위에서 대중이 기와를 옮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경상남도 교육감이 보고 놀라움을 나타내자 노스님은 “기와집에 사는 사람은 기와를 만질 줄 알아야 한다”는 말로 안심을 시켰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교육감은 일선교사들에게 얘기하여 좋은 귀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대중스님들이 부처님이다” “소임이 기도다”라고 늘 말씀하시면서 성실하지 못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절대 용납하지 않으셨고, “상사는 들숨, 날숨에 있다” 하시면서 헛되어 시간 낭비하는 것을 결코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년 365일 새벽마다 노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발소리도 내지 않고 강선당을 방문하여 졸거나 게으름을 보이는 학인에게는 불호령을 내리셨습니다. 새벽 3시 예불을 시작으로 어두워질 때까지 운력의 연속이었지만 젊은 스님들은 노스님의 끊임없는 가르침에 힘입어 잠시도 방일하지 않고 노력했습니다. 주머니에는 그날 강사스님께 배워서 익혀야 할 경 구절이 항시 들어 있어 채공간에서, 지붕 위에서, 나무하면서 어디에서 무얼 하든 쉬지 않고 공부했습니다. 큰스님께서 일본의 도인스님이신 도원선사의 정법안장을 보라고 해서 일어 공부도 해야 했는데 늦어도 1년 내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시간과 장소가 공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증명하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새벽이나 밤에는 대웅전 문을 잠그지 않을 정도로 부처님께 참회와 발원의 기도를 했습니다. 큰스님께서 정해 주신 일과 절 600배, 1000배를 어김없이 했고 3000배 100일기도, 능엄주 독송, 아비라기도 등 밤낮없이 법당을 비우지 않았습니다. 수행자에게 참회와 발원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겨울 한가한 때면 일주일간 학인 단체로 아비라기도를 합니다. 저녁에 그날의 기도가 끝나는 시간에는 보현행원품 서문을 큰소리로 합장합니다. “우리는 오직 일체중생을 위하여서만 산다. 영원에서 영원이 다하도록, 법성이 무진하므로 법계가 무한하며… 광덕스님의 원력으로 이에 널리 개방되었다”까지 읽습니다.

 

노스님은 학인들에게 “부처님은 왕궁부귀를 버리고 도 닦으러 온 사람이다. 우리는 부처님 제자다. 참선해서 부처되려고 온 사람이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더욱이 불법 만나기 어려우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라고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또한 순치황제 출가시를 들려주시면서 수행자의 위상과 책임을 강조하시고 “중이 공부 못하면 소가 되어 빚을 갚아야 한다. 우리가 때마다 먹는 밥 한 바루가 신도의 피 한 바루나 마찬가지다”라고 귀에 못이 막히도록 말씀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시시각각 긴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절 일 할 때는 등잔을 켜고 개인일 할 때는 개인 등을 켜신 옛 선사스님들의 말씀을 자주 하시어 사중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심었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된다”는 말씀도 수없이 하시어 각자가 스스로 자신을 키우는 좌우명으로 개개인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지게 하십니다.


이처럼 철저한 노스님의 생활은 신도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석남사 오는 신도에게는 하룻밤 편히 자고 가는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밤새워 기도하고, 정진해야 한다고 호령하셨기 때문에 석남사를 찾는 신도들의 머리 속엔 ‘쉰다’는 단어 자체가 없을 정도입니다. 노스님은 학인에게나 신도에게나 한결같이 ‘절집은 한가하게 쉬러 오는 곳이 아니라 신명을 다 바쳐 도 닦으러 오는 곳’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87세 되시는 94년 단오날, 노스님 출가 이후 상좌스님들이 처음으로 다 모였습니다. 수행자가 생일 챙기는 것을 비상처럼 나무라시어 여태껏 한 번도 생신을 챙겨드리지 못했는데 이번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이젠 나무라실 기력이 없어지신 탓인지 아니면 모두 한 번쯤 보고 싶은 얼굴이었는지 케익을 자르고 묵묵히 계시다가 한 말씀 하셨습니다. 

 

“수행자는 신심이 있어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일체중생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노스님 회상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힘차고도 푸르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부처님처럼 생각하시니…

 

푸른 하늘에 간간히 굵은 빗방울이 흩어지던 1976년 7월, 참으로 긴 시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하신 석남사 주지직을 뒤로 하고 새로운 운수납자가 되어 칠순의 반이 넘도록 지리산 칠불암, 현풍 도성암, 지리산 상무주암, 대원사 등에서 하안거를 지내셨습니다. 그 후 별당에 계시면서 구순을 바라보면서도 정수원 입선 시간을 지키려고 무진히 노력하셨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도 용맹정진 때면 어김없이 장군죽비로 힘있게 경책해 주신 노스님, 후학들 중 누가 감히 노스님의 자비와 신심을 흉내 낼 수 있으리오. “누워서 편안할 때 지옥고 받는 중생을 생각하라”고 하신 당신의 말씀을 실천 수행하셨습니다. “내 인생의 사전에는 휴식이란 없다”는 프랑스 장군 나폴레옹의 말처럼 노스님 일생에는 휴식이란 없었고 부단한 노력과 인내로 일관되었습니다.

 

노스님은 정진 열심히 하는 수행자를 제일로 여기셨고, 결제하러 오는 많은 납자들에게도 아낌없이 경책하는 대자비로 대하셨고, 항상 대중 가운데 인기 1위를 차지함으로써 여러 스님들로부터 존경과 덕망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평생 동안 사중 볼 일 외에는 한 번도 나가신 일이 없으며, 중이 공부하는 일 외에 무슨 볼 일이 있느냐고 하면서 대중의 무단외출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해인사 도량에 노스님이 나타나시자 젊은 비구스님들이 “석남사 인홍 노스님 오셨다. 행건 바로 매라. 옷고름 바로 해라”고 했다는 일화는 노스님의 일상의 행이 비구 스님들에게도 큰 감화를 주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일입니다.

 

노스님은 검소하시기 이를 데 없습니다. 휴지를 조금씩 쓰는 건 따라갈 수 없고, 당신 찬상에 대중반찬 외에 한 가지라도 더 오르면 야단야단 하시며 그냥 내보냅니다. 노스님의 마음은 늘 대중과 함께이고, 자신에게 철저하십니다. 출타하시어 다른 사찰에 가셔도 법당에 거미줄이 있으면 손수 걷어내시고, 첫차를 타러 갔다가 기사가 늦게 나오면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고 엄하게 타이르십니다.

 


스님의 떠나심을 아쉬워하며 한 잎 한 잎 꽃잎을 떼어 붙였다. 순간 한 송이 연꽃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꽃잎을 든 비구니 스님들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속에 인홍 큰스님의 미소가 함께 있었다.

 

또한 노스님 마음은 언제나 나와 남이 둘이 아니었습니다. 심검당에서 정진하실 때 얘기입니다. 입선 중 갑자기 큰 새가 유리창에 부딪쳐 큰소리를 내며 떨어졌습니다. 노스님은 정신을 잃은 새에게 청심환을 조금 먹였습니다. 살아날 듯하던 새가 숨을 거두자 가사를 수하고 목탁을 치며 천도하시는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였습니다. 또 어느 날 새에게 놀림을 받은 뱀이 어미 새 대신 새끼를 잡아먹으려고 심검당 추녀 밑에 몸을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노스님은 날지 못하는 새끼 새를 지키려고 점심공양도 안 하시고 뱀을 향해 큰소리로 발원문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엄숙한 법회는 일체중생을 부처님처럼 생각하는 실참 수행자의 거룩한 모습이었습니다.

 

비구니계의 큰 대들보셨던 인홍 큰스님

 

“스님, 다음 생에는 무슨 일을 하고 하고 싶으십니까?”
“내생에는 수승하게 자라 청정비구가 되어 도를 이루어 많은 인재를 기르고 싶다. 어린 비구든, 노비구든 백 명이 모여도 천만 명이 모여도 잘 자란 나무처럼 키우고 싶다. 스님들이 동네에 나가면 존경심이 나서 저절로 합장할 수 있는 훌륭한 스님들로 키우고 싶다.”

 

많은 불편하신 몸을 가누시면서 엄숙하게 말씀하시는 노스님의 크신 원력 앞에 목이 메어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누가 그토록 경책해 주고, 누가 그토록 보살펴 주고, 누가 그토록 알뜰히 바로잡아 주겠는가? 혼란한 시대, 어려운 세상을 가로지르며 때로는 대중과 함께 때로는 독행독보로서 태산 같은 신심과 불굴의 의지로 이루어내신 노스님의 철저한 수행은 이 시대의 반짝이는 별로서, 불교계의 상록수로서, 비구니계의 큰 대들보로서 그리고 문도들의 냉엄한 사표로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또한 한국불교의 최고의 큰 스승 아니 동서고금을 통한 최고의 큰스승이신 성철 큰스님, 그분의 제자답게 일생 동안 바르게 그리고 총기 있게 최선을 다해 걸어오셨습니다.

 

법당 하나 가득, 허공 하나 가득 메우던 노스님의 축원소리, 도량 구석구석 쉬임없이 큰 소리로 질책하시던 노스님의 모습, 잘못을 꾸짖던 몽둥이세례, 정진중 내려치시던 장군죽비의 경책, 새벽예불 불참 때의 물 양동이 세례도 이젠 옛날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노스님 방에는 큰스님 사진과 큰스님의 친필인 십이명(十二銘)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항상 노스님을 지켜주실 겁니다.


노스님!
노스님의 원력대로 이루어지소서.

노스님의 크신 수행의 면면을 문장이 서툴고 정진이 성근 탓으로 잘 그리지 못했음을 삼가 사과드립니다.

 

불기 2538년 9월 5일 微侍者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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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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