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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불교]
진각국사 혜심 -“차 끓이며 하루 보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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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  2020 년 7 월 [통권 제87호]  /     /  작성일20-07-20 15:05  /   조회9,25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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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 철학박사 

 

  진각 국사 혜심(眞覺國師慧諶, 1178-1234, 사진 2)은 무신정변(1170년)이 일어난 후 활약했던 수행승이다. 무신정변은 문벌 귀족 사회의 문제점으로 인해 발발한 정변이지만 고려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문벌 귀족체제의 몰락은 사원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옴에 따라 교종 사원의 반발이 커져 귀신사 등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저항했다. 결과적으로 무신정권이 교종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교단의 재편을 위해 선종의 승과를 실시하는 등 선종을 우대하는 조치를 내리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특히 최충헌崔忠獻의 집권 기간인 1196-1219년에는 소수 종파를 후원, 선종 중심의 교단체제의 옹립을 강화한다. 

 



 

 

  진각 국사가 수행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던 시기에는 담선법회談禪法會가 성행했는데, 여기에서 드러난 폐단은 불교계의 반성과 비판으로 번져 출가자 본연으로 돌아가려는 결사結社운동으로 이어졌다. 진각 국사의 스승 보조 국사 지눌(普照國師知訥, 1158-1210, 사진 1)은 결사 운동의 중심에 있었는데, 그가 교단의 타락 양상을 몸소 경험한 후, 동지 10여 명과 함께 이를 비판하여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반포하고, 1200년경 송광사를 결사의 근거지로 삼아 불교계를 개혁하려는 실천 운동으로 승화 시켰다. 1219년 최이崔怡가 권력의 중심에 등장하며 수선사는 불교 교단의 중심축으로 부상한다. 

 

  진각 국사는 스승 지눌의 결사 정신을 이어, 치밀하고 체계적인 선사상을 표방하는 한편 이타행의 실천에 주력하였다. 또한 그는 정토사상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결단을 내렸기에 독서층과 지방의 향리,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의 이런 폭넓은 포용은 귀족불교를 배척하고 모든 계층에게 문호를 열어 적극 참여를 유도하는 조치였다. 그리하여 수선사는 점차 지식층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교세를 넓혔는데, 다양한 계층의 지지는 결국 최이崔怡 정권이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여 정권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와도 부응되는 일이었다. 이후 수선사는 최이 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고려 후기 불교계의 중심축으로 부상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과의 친소親疎가 종단의 흥성과 몰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진각 국사는 어떤 인물이며 차 문화가 극성했던 13세기 초, 그는 어떻게 차를 즐겼던 것일까. 그 자취를 따라가 보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찬撰한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은 혜심의 생애를 어느 정도 밝혀줄 자료이며, 혜심의 문집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역시 그의 차 생활을 살필 수 있는 문헌이다. 「진각국사비명」에 의하면 나주 화순현 출신인 혜심의 자는 영을永乙이고, 자호自號로 무의자無衣子라는 호를 사용했다. 그의 생애에서 특이한 점은 태몽과 태어날 때의 정황인데, 이는 그가 범인과 달랐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태몽과 관련된 내용은 「진각국사비명」에 상세하다. 내용은 이렇다.  

 

“모친 배씨裵氏가 천문天門이 활짝 열려 보이는 꿈을 꾸고, 또 세 번이나 벼락 맞는 꿈을 꾸고서 임신하였으며, (그를) 열두 달 만에 낳았다. 태의胎衣가 겹겹이 감겨 있어 마치 가사袈裟를 메고 있는 듯하였다. 아이를 낳자, 두 눈이 모두 감겨 있었는데, 7일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매번 젖을 먹은 뒤에는 곧 몸을 돌려 모친을 등지고 누우니 부모가 괴이하게 여겼다.[母裴氏夢天門豁開, 又夢被震者三, 因而有娠, 凡十有二月乃生焉. 其胞重纏, 又如荷袈裟狀. 及拆兩目俱瞑, 經七日乃開. 每飮乳後, 輒轉身背母而臥, 父母怪之].”

 


 

 

  윗글은 진각 국사가 이미 범인과는 달랐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태어날 때 가사를 메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는 점과 젖을 먹은 뒤 모친을 등지고 누웠다는 것은 그가 수행자의 자질을 타고났음을 암시하는 것이요, 그가 병이 났을 때 태어난 곳에 산석山石이 무너지고 새 떼가 골짜기에 가득하게 날아와 10여 일을 울었다는 점은 그가 범상치 않는 성인이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진각국사비명」에는 그가 유불에 통달했고, 천성이 온화하고 충실했으며 내외경전에도 능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각국사비명」에 최우와 그의 관계를 기술하는 곳에, 최이가 혜심에게 차를 공급했다는 기록이 있어 특히 눈에 띈다. 

 

“지금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진양晉陽 최 공이 국사의 풍운風韻을 듣고 성의를 다하여 여러 번 서울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국사는 끝내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천 리의 거리라 해도 서로 마음의 합함은 마치 대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 공은) 다시 두 아들을 보내 국사를 모시게 하였고, 무릇 국사의 생활 도구를 힘을 다해 마련해 주었으며, 차茶·향香·약이藥餌·진수珍羞·명과名菓와 도구道具나 법복法服에 이르기까지 항상 제때 공급하여 끊어지지 않았다.[今門下侍中晉陽崔公, 聆師風韻, 傾渴不已. 屢欲邀致京輦, 師竟不至焉. 然千里相契, 宛如對面. 復遣二子參侍, 凡師之常住資具, 莫不盡力營辦. 至於茶香藥餌珍羞名菓及道具法服, 常以時餉遺 連亘不絶].”

 

  윗글에 나오는 문하시중 진양 최 공은 바로 최우(崔瑀, ?~1249)를 말한다. 무신정권 최고의 권력자이고, 글씨를 잘 썼던 그는 후일 최이崔怡로 이름을 바꿨다. 그가 진양후로 봉해진 것은 1234년 강화로 천도를 주도한 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익재난고益齋亂稿』에서 “진강후 최충헌이 명왕 때부터 24년간이나 국사를 전횡하였고, 아들 진양공 최이가 정권을 계승한 것이 32년이며, 그 아들 진평공 최항과 최항의 아들 최의가 차례로 계승하여, 임금을 폐하고 세우는 일이나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한 것이 4대에 걸쳐 60년이다.”고 기록해 놓았다. 무신정권의 전횡을 지적한 이 기록을 통해 최 씨 집안이 어떻게 권력을 전횡했는지 알 수 있다. 

 

  아무튼 이제현이 언급한 바와 같이 최이는 32년간이나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집권자였다. 그런 그가 진각 국사를 극진하게 모셨고 두 아들을 보내 국사를 모시게 했다는 사실은 당시 진각 국사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게다가 최이는 진각 국사를 위해 차와 약재, 진기한 음식, 도구와 법복을 때에 맞춰 제공했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 최이가 진각국사를 위해 공양했던 차는 무엇이었을까. 백차白茶로 짐작된다. 

 

  백차(사진 3)는 12세기 송 휘종 대에 유행했던 최고급 차로, 이미 고려 왕실이나 수행승, 관료 문인들도 익히 즐겼던 귀한 차였다. 13세기 백차白茶를 애호했던 정황이 당시 문인들의 다시茶詩에도 자주 언급되고 있기에 최이가 진각 국사에게 보낸 차는 백차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당시 차 문화를 주도했던 그룹은 사찰의 승려들이었고 선종 사찰의 음다飮茶는 수행 생활의 일부였다. 진각 국사가 보조 국사에게 인가 받게 된 게송偈頌에도 차가 언급될 정도였다. 게송의 내용은 “시자를 부르는 소리, 송라의 안개에 울려 퍼지고[呼兒響落松蘿霧]/ 차 향기, 돌길 바람 따라 전해 오누나[煮茗香傳石徑風]”이다. 

 

  게송은 보조 국사가 자신에게 불법을 전해 줄 것이란 함의를 은연중에 밝힌 것으로, 시자를 부르는 소리, 송라의 안개, 돌길 바람, 차향은 은유적으로 자신과 보조 국사의 불연佛緣을 암시한 것으로, 『조계진각국사어록』 「시중示衆」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차에 대해 읊은 시詩는 『무의자시집』에 8 수首가 전해진다. 「전물암에 머물며[寓居轉物庵]」라는 시에는 음다를 일상화했던 수행자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봉산 앞, 오래된 암굴                       五峰山前古庵窟

그중에 전물암이 있다네.                      中有一菴名轉物.

내 그 암자에 살면서 활계를 도모하지만        我栖此庵作活計

그저 껄껄 웃을 뿐, 토설하기 어려워라.         只可阿阿亂吐出.

가장자리 깨진 차 사발, 다리 부러진 솥          缺脣椀折脚鐺口

차 끓이며 하루를 보내네.                      煮粥煎茶聊遣日.

게으름에 쓸지도 않고 베지도 않으니            疎慵不掃復不芟

마당의 풀 구름처럼 무릎까지 잠기네.           庭草如雲深沒膝.

 

  시에 알 수 있듯이 보조 국사에게 나아가 인가를 받기 전에도 그는 소탈하고 자유 자재했던 수행자였다. 오래도록 그의 곁을 지킨 다구(茶具, 사진 4)는 낡을 대로 낡아진 기물, 이를 통해 그가 이미 차에 익숙한 수행승이었음이 은근히 드러난다. 그의 일상에 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던 진각 국사의 힘도 분별심이 사라진 수행력에서 기인된 것이리라. 늘 차를 마시며 구름처럼 자유로웠던 그의 모습은 이미 익을 대로 익은 수행자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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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동국대 일반대학원 선문화 전공, 철학박사. 응송 박영희 스님에게 초의선 사로부터 이어진 제다법 전승. 현 (사)동 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한국전통문 화대학교 겸임교수. 성균관대·동국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 『초의선사의 차 문화연구』 등 7권의 저술이 있다. ‘초의 선사와 경화사족들의 교유에 대한 연구’ 및 ‘한국 차 문화’ 전반을 연구하며, 순천 대광사지에서 ‘동춘차’를 만든다. 한국차 문화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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