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산책]
하루살이 떼가 아득한 성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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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기 / 2020 년 9 월 [통권 제89호] / / 작성일20-09-21 10:45 / 조회9,131회 / 댓글0건본문
스스로를 ‘설악산 산지기’라고 한 무산 조오현(1932-2018)은 1959년 김천 직지사에서 성준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1968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으며, 1968년 『시조문학』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한글 선시를 개척 해온 스님은 ‘공초문학상’과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무산은 치열한 구도와 깨달음을 향한 시적 노정에 성/속, 스님/속인, 산중의 일/ 세상일 등을 두루 담아내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시적 세계에는 고뇌의 극복과 자아의 눈뜸에 대한 외로운 구도자의 모습, 그리고 생명존중과 자비실천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구도의 길, 깨침의 길이란 끝이 없는 것, 그러기에 스님은 다시 절망과 허무의 은산철벽을 만날 수밖에 없다.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 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 「아지랑이」
그렇다! 살아있는 한, 열반으로서 죽음에 들지 않는 한 수행자는 언제나 ‘나아갈 길도 없고 물러날 길도 없는’ 백척간두 끝에 놓여져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이기에 어쩔 수 없는 절망감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또한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라는 결구처럼 모든 것이 아지랑이, 즉 꿈이고 헛될 뿐이라는 공(空)에 대한 인식도 드러나 보인다. 구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무산은 이러한 회오와 번민의 늪을 빠져 나와 드디어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다. 다음은 오도송이다.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언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산과 들만이 아니라 밤하늘도 먼 바다 울음소리도 모두 하나가 되어 시적 화자와 함께 한다. “천경 그 만론이” 바람에 이는 파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책 속의 그 많은 논지들도 그것을 읽으면서 화자의 머리를 오가는 생각의 줄기들까지 그저 모두 바람 따라 일어나는 파도일 뿐, 그 아래 본래의 내 편안한 마음은, 바다 속처럼 흔들리지 않는 내 마음은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 변함이 없는 것임을 내비치고 있다.
선은 ‘이언절려離言絶慮’라 하여 모든 말과 생각을 끊어버리고 그 너머의 진리를 추구한다. 하여 무명을 깨뜨리기 어려운 장애를 비유할 때 “은산철벽銀山鐵壁 같다”는 표현을 쓴다. 온 산이 흰 눈으로 덮이고 차디차고 단단한 얼음으로 덮여 있어 철벽을 이룬 상태를 말하는데, 세상의 분별지 정도로는 도저히 그것을 깨뜨릴 수 없다. 한 마디로 백척간두에 선 위급한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순간의 깨달음의 흔적이 「무자화無字話부처」에서 한결 잘 극화되고 있다.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무자화無字話부처」 전문
선승들은 불립문자라는 깨달음의 세계를 ‘무자화無字話’ 혹은 ‘무설설無說說’의 방법으로 표현한다. 무산은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혹은 범람하게 해놓고 그 강물에 떠내려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뗏목다리와 같은 존재가, 아니 존재하지 않는 존재 곧 ‘허깨비’ 같은 존재가 ‘부처’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강물도 없는 강물”을 흐르게 하고, 범람하게 하고는 정작 “떠내려가는 뗏목다리”로 표상되는 “부처”의 존재 속에 있다. “뗏목다리”는 분별심의 산물이다. 모든 삿된 것과 허망한 것을 깨부수는 것이 선의 목적이듯이, 무산은 문자로 표시할 수 없는 진리를 ‘무자화’로서 그려내고 있다. 분별이 없는데 분별을 일으키고 사량思量이 없는데 사량을 일으키게 하는 놈이 누구인가? 그것은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이다.
특히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시 「아득한 성자」는 시집의 제목인 동시에 정지용문학상 수상작으로 무산의 대표작이다. 여기에서 무산은 하루만 살다 죽는 하루살이와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살아 있는 화자를 대립적 관계를 설정하여 순간을 살아도 깨달음에 이르는 자와 천 년을 살며 성자로 존경받아도 깨닫지 못하는 차이가 무엇인가를 절묘하게 드러내 보인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아득한 성자」 전문
무산 시의 압권이다. 자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마치고 생을 마감하는 ‘하루살이’의 모습에서 ‘성자’를 발견한다. 하루살이가 어떻게 성자가 될 수 있을까? 상상을 뛰어넘는 선적 사유이다. 이것이 이 시가 주목을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뜨는 해도 다 보고 / 지는 해도 다 보았다”라는 언설은 우주의 질서를 모두 터득한 하루살이의 하루를 의미한다. 그 하루살이에게 “오늘 하루”는 전체 생에 해당하는 시간이며, 내일이나 어제란 시간관념이 없다. 오늘 볼 것 다 봤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의 삶은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가 ‘성자’라는 생각에 이른다. 이에 반해 시의 화자는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가는 “나”는 “하루도 산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삶은 천년을 산다 해도 제대로 산 게 아니며, 설혹 성자로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을지언정 하루를 살아도 세상살이 이치를 모두 깨달았다고,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고 미련없이 적멸에 드는 “하루살이”와는 “아득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일색변一色邊은 일색나변一色那邊의 준말로, 유/무, 색/공, 미/오, 득/실을 초월한 일색의 경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래서 무산은 ‘바위’는 바위이기 위해서 들어 올려도 끝내 들리지 않아야 하고,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소리 들으려면 속은 썩고, 가지들은 다 부러지고 굽은 등걸에 장독들도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위나 고목이 풍진의 세월을 견디어 바위소리, 고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내부가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내부를 비울 수 있을까? 무산은 육신이 아닌 마음을 잘 다스려야 진정한 장부라고 사자후를 던진다.
사내라고 다 장부 아니여 장부소리 들을라면
몸은 들지 못해도 마음 하나는 다 놓았다 다 들어 올려야
그 물론 몰현금 한 줄은 그냥 탈 줄 알아야
- 「일색변 3」전문
일색의 경계를 표현하는 그 세 번째 방법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는 시편이다. 사내로 태어나 진정한 의미의 장부 소리를 들으려면 몸은 들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마음 하나쯤은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알아야 하고, 거기다가 “몰현금 한 줄”은 탈 줄 아는 풍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몰현금은 줄 없는 거문고를 말한다. 줄이 없어도 마음속으로는 울린다고 하여 이르는 말이다. 결국 마음을 비워야 그 비움 속에 많은 것들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무산이 강조하는 것은 불교의 연기설에 입각한 생명연대 의식이다. 이는 곧 삼라만상의 존재들이 상호연대를 이루며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친연성의 형상화를 상징한다. 이러한 만다라적 세상을 「산창을 열면」에서 분명히 드러내 보인다.
화엄경 펼쳐놓고 산창을 열면
이름 모를 온갖 새들 이미 다 읽었다고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로 포롱포롱 날고.…
풀잎은 풀잎으로 풀벌레는 풀벌레로
크고 작은 나무들 크고 작은 산들 짐승들
하늘 땅 이 모든 것들 이 모든 생명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하나로 어우러져
몸을 다 드러내고 나타내 다 보이며
저마다 머금은 빛을 서로 비춰주나니…
대상에 대한 분별을 초월한 지점에서 세간과 출세간이 하나가 되어 어우러져 조화로운 화엄의 세계가 멋지게 조형되고 있다. 『화엄경』을 “이름 모를 온갖 새들 이미 다 읽었다고”라고 한 것에서 말하듯이, 온갖 새들이 나무 사이를 날고, 풀과 벌레, 산짐승과 들짐승, 그리고 하늘과 땅 등 우주 만물이 저마다 제 빛으로 빛나는 동시에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야 말로 곧 화엄의 세계임을 무산은 보여 준다. 이 숨어 있는 뜻을 알면 『화엄경』을 정말로 다 읽은 것이요, 번뇌의 불을 끈 적멸의 경지를 얻은 것임을 무산은 설파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대립적 경계선이 지워진 곳에 무산의 선시의 묘미가 있다.
그런데 생명 앞에서, 삶 앞에서 모든 존재의 높낮이가 없다는 만유 평등사상을 제시했던 무산은 수행자의 위선과 자만을 경계한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천방지축天房地軸. 기고만장氣古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 「임종게」
종교인의 위선과 자만을 경계한 일갈이다. 일생을 통해 선禪을 추구했으면서도 목표하는 바에 이르지 못했음을 고백한 내용이다. 속인들은 스님의 수행을 추앙하지만, 수행자 자신은 늘 수행정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았다고 형상화하고 있다.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았다면 본능에 지배당하는 짐승의 모습이다. 무산스님은 일생을 통해 수행정진 했건만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연 무산 스님다운 진솔하고도 하심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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