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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선문정로]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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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20 년 10 월 [통권 제90호]  /     /  작성일20-10-21 09:41  /   조회8,44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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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선문정로』 4 | 무상정각無上正覺

                                                                                   [원문] 성철 스님

                                                                                   [옮김] 활  인 검

 

편집자 | 【번호】·【평석】·【강설】은 성철 스님이 직접 쓰고 말씀하신 것이다. 【4-1】은 제4장 제1절이라는 의미다. * 표시가 붙은 것은 보다 쉽게 풀이한 것이다.

 

【4-1】 ①곧 불성을 정견正見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하느니라. ②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여 불성을 정견함을 얻느니라. ①卽見佛性하야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②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야 得見佛性이니라. (『大般涅槃經』2, 『大正藏』 12, p.611c; 『大般涅槃經』 20, 『大正藏』 12, p.740b) 

 

* ①‘참다운 본성’[佛性=空性]을 체득하면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다. ②반드시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해야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다. 

 

【평석】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무상정각無上正覺 또는 무상정변지無上正遍知 등으로 번역되나니, 정각의 내용이 정변지正遍知에 있으므로 동일한 의미이다. 이 무상정각인 정변지는 불교의 최후 구경목표이다. 견성을 하면 정각을 얻고 정각을 얻으면 견성을 한다 함은, 견성 즉 정각이요 정각 즉 견성임을 선설宣說한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이 즉 무상정각이며 성불이다. 

 

*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은 ‘위없는 올바른 깨달음’ 또는 ‘모든 것을 두루 아는 위없는 지혜’ 등으로 번역되는데 ‘올바른 깨달음’[正覺]의 내용이 ‘모든 것을 두루 아는 위없는 지혜’에 있으므로 같은 의미이다. ‘위없는 올바른 깨달음’이자 ‘모든 것을 두루 아는 위없는 지혜’는 최후의 궁극의 목표이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면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다 함은 ‘올바른 깨달음’과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이 같은 것임을 선포하고 설명한 것[宣說]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이 바로 ‘위없는 올바른 깨달음’이자 성불이다.

 

【강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 번역하고 이를 줄여 무상정각無上正覺이라 한다. 무상이란 ‘제일 높아서 그 이상이 없다’는 의미이고, 정각이란 ‘조금의 거짓도 없이 바로 깨쳤다’는 의미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두 구절을 인용하였다. 앞에서는 견성을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즉 성불한다 하였고, 뒤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불성을 바로 볼 수 있다, 즉 견성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같다. 성불이 견성이고 견성이 성불임을 『대반열반경』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불성을 보고 나서 부지런히 닦아 성불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밝히고 있듯 견성이 곧 성불이고 성불이 곧 견성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왼쪽부터 하남 정심사 회주 원영스님, 성철스님, 해인총림 유나 원타스님

 

【4-2】 ①아성我性 즉 불성은 삼세여래三世如來의 궁극비밀窮極秘密의 보장寶藏이니 만약에 무상정각을 성취하면 아성我性을 원증명지圓證明知하느니라. ①我性者는 如來秘密之藏이니 若得成就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면 爾乃證知하느니라. (『大般涅槃經』 8, 『大正藏』 12, p.649c) 

 

* ①나의 본성은 부처님의 비밀스런 보배창고이다. 만약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면 분명하고 철저하게 안다[圓明證知].

 

【평석】 정각의 성취, 즉 성불하지 않고서는 본성本性을 정견할 수 없으니 성불이 즉 견성이다. 견성이 즉 성불이며 성불이 즉 견성임은 금구소선金口所宣이며 영산정전靈山正傳이다. 이는 견성이 원증돈증圓證頓證의 증오證悟, 즉 구경각임을 명시함이니 분증分證과 해오解悟로 견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사설異端邪說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 올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룬 것[成就], 즉 성불하지 않고서는 참다운 본성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 성불이 곧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이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이 성불이며, 성불이 바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임은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金口所宣]이고, 선문에서 정통으로 전해진 바[靈山正傳]이다. 이것은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이 ‘결함 없는 깨달음’[圓證]이자 몰록 깨닫는 증오證悟, 즉 궁극의 깨달음[究竟覺]임을 분명하게 보인 것이다. ‘부분적인 깨달음’[分證]과 ‘깨달음을 이해한 것’[解悟]으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릇되고 삿된 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강설】 언제든 부처님 말씀과 본분종사의 말씀을 의지해 공부해야지 이단의 사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대열반경』에서 견성이 곧 구경의 성불임을 누차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오와 분증을 정설이라 우긴다면 그것은 불법을 헐뜯는 외도가 아니겠는가?

 

【4-3】 ①이 모든 중생이 무량한 번뇌 망상의 복폐覆蔽한 바 되어 자기 심중心中의 불성을 알지 못한다. 만약에 번뇌가 멸진滅盡한 때에는 불성을 증득하여 분명요지分明了知하되, 저 역사力士가 명경明鏡 중에서 액상額上의 무가보주無價寶珠를 명견明見함과 같으니라. ①是諸衆生이 爲無量煩惱之所覆蔽하야 不識佛性하나니 若盡煩惱時엔 乃得知明了하야 如彼力士가 於明鏡中에 見其寶珠니라. (『大般涅槃經』 8, 『大正藏』 12, p.649b) 

 

* ①이 모든 중생들이 한량없는 그릇된 생각과 허망한 마음에 뒤덮여 있어 자기 마음속[心中]에 있는 참다운 본성을 알지 못한다. 만약 그릇된 생각이 모두 사라지면 바로 분명하게 아는데, 이는 힘 좋은 사람이 거울을 보다 자기 이마에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로운 구슬이 달려있음을 확실히 보는 것과 같다.

 

【평석】 3세細의 극미 망상까지 멸진무여滅盡無餘하면 자연히 구경무심究竟無心에 도달하나니, 이것이 견성이며 성불이다. 

 

* 세 가지 미세한 허망한 마음까지 완전히 사라지고 없으면 자연히 궁극의 집착 없는 참다운 마음의 경지에 도달하나니, 이것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이고 성불이다.

 

【강설】 망상에 가려 자성인 진여를 모르다가 공부를 해 확연히 깨치면 망상이 사라져 자기의 본성 즉 불성을 보게 된다. 그것이 무엇과 같은가? 밝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환히 보는 것과 같다.

 

【4-4】 ①제불여래는 일체중생에게 양의良醫와 같아서 모든 번뇌의 체상차별體相差別을 실지悉知하여 이 번뇌를 단멸제거斷滅除去하여, 여래의 비밀한 보장寶藏 중에 있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불성이 영겁永劫토록 상주하여 절대로 불변함을 개시開示하느니라. ①如來는 於諸衆生에 猶如良醫하야 知諸煩惱體相差別而爲斷除하야 開示如來秘密之藏의 淸淨佛性이 常住不變하느니라. (『大般涅槃經』 8, 『大正藏』 12, p.651b) 

 

* ①부처님은 중생에게 있어 마치 뛰어난 의사와 같아 모든 ‘그릇된 생각’[煩惱]의 실체와 모습[體相]을 자세하게 안다[悉知]. 그릇된 생각을 끊어 없애기 위해 ‘부처님의 비밀스런 보배창고’에 ‘깨끗하고 참다운 본성’[佛性]이 변하지 않은 채 항상 머무르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이셨다.  

 

【평석】 여래의 신방법약神方法藥이 아니면 중생들이 어찌 무가진보無價眞寶인 자기심불自己心佛 즉 불성을 볼 수 있으리오. 그 대비홍은大悲鴻恩은 분골쇄신粉骨碎身하여도 미족수未足酬이다. 

 

* 부처님의 신령스런 처방과 진실한 약이 아니면 중생들이 어찌 값을 매길 수 없는 자기 마음의 붓다인 참다운 본성을 볼 수 있으리오. 그 크고 넓은 은혜는 몸이 부서지도록 갚아도 다 갚지 못한다.  

 

  

 앞줄 앉은 분이 성철스님. 뒷줄 오른쪽 첫번째는 벽련암 원주 원인스님, 두번째는 대구 정혜사 주지 원당스님

 

【4-5】 ①불성은 중생이 본유本有한 것이요 조작造作한 법法이 아니다. 다만 번뇌인 객진客塵에 복폐覆蔽되어 있을 뿐이니, 만약에 그 번뇌를 단제斷除하면 즉시에 불성을 명견明見하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느니라. ①佛性은 非是作法이요 但爲煩惱客塵의 所覆이니 若能斷除하면 卽見佛性하야 成無上道하느니라. (『大般涅槃經』 8, 『大正藏』 12, p.652b) 

 

* ①참다운 본성은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들어 낸 것[造作法]이 아니다. 다만 밖에서 들어온 손님 같은 그릇된 생각에 덮여있을 뿐이니, 만약에 그 번뇌를 끊어 없애면 즉시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해 ‘위없는 큰 진리’[無上大道]를 성취하느니라.  

 

【평석】 무상정각은 중생의 무량 번뇌 망상을 단제斷除하고 본유의 청정자성을 철견徹見함에 있으니 이는 불교 만세불변萬世不變의 대원칙이다. 

 

*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無上正覺]은 수많은 그릇된 생각을 끊어 없애고 본래 있는 깨끗하고 참다운 본성을 철저하게 체득하는 것으로, 이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불교의 크나큰 원칙이다.  

 

【4-6】 ①일인一人의 중생도 여래의 지혜인 불성을 구유具有하지 않은 자 없지마는, 망상으로 생긴 전도顚倒에 집착하여 이것을 증득하지 못한다. 만약에 망상을 이탈하면, 자성에 구유되어 있는 일체一切의 자연지自然智와 무애지無碍智가 즉시에 현전하느니라. ①無一衆生而不具如來智慧언마는 但爲妄想顚倒執著而不證得하나니 若離妄想하면 一切自然智와 無碍智가 卽得現前하느니라. (『八十華嚴經』 51, 『大正藏』 10, p.272c) 

 

* ①중생 치고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갖추지 않은 사람이 없지마는 허망한 생각 때문에 거꾸로 집착해 참다운 본성을 깨닫지 못한다. 만약 허망한 생각을 벗어 던지면 참다운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지혜’[自然智]와 ‘걸림 없는 지혜’[無礙智]를 곧바로 깨닫는다.  

 

【평석】 중생이 본구本具한 여래 지혜는 곧 진여불성이니, 일체망념이 돈진頓盡하면 이것이 견성이며 무상정각이다. 

 

* 중생이 가지고 태어나는 부처님과 같은 지혜가 바로 참다운 본성이니 모든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없애면 참다운 본성은 저절로 드러나고, 위없는 정확한 깨달음을 곧바로 증득한다. 

 

【4-7】 ①여래가 언명言明하였다. 신기하고도 신기하다. 일체 중생이 모두 일체지자一切智者인 여래의 지혜를 구비하고 있거늘 우치愚痴하고 미혹하여 부지不知하며 불견不見하는 도다. 내가 당연히 성도聖道로써 교도敎導하여 그 장폐물障蔽物인 망상집착을 영원히 이탈케 하여 중생의 자신自身 중에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지견智見을 체득하여 독존무비獨尊無比한 불타와 차이가 없게 하리라. ①如來言하사되 奇哉奇哉라 此諸衆生이 云何有如來智慧어늘 愚痴迷惑하야 不知不見고 我當敎以聖道하야 令其永離妄想執著하야 自於身中에 得見廣大智見하야 與佛無殊케 하리라. (『八十華嚴』 51, 『大正藏』 10, p.272c)

 

* ①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신기하고도 신기하다. 일체 중생이 나와 같은 지혜를 갖고 있으면서도 어리석고 미혹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구나! 마땅히 성스러운 가르침으로 중생들을 인도해 그들이 영원히 허망한 생각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 몸 안의 ‘거대하고 위대한 지혜’[廣大智見]를 체득하도록 해 나와 다르지 않도록 만들어야겠다.” 

 

【평석】 『열반경涅槃經』과 『화엄경華嚴經』의 양대兩大 경經에서 일체 중생의 본구불성本具佛性을 언명言明한 것은 인간 본유의 진가眞價, 즉 절대성을 발표한 유사이래의 일대선언一大宣言이다. 이로써 인간은 본유의 절대성을 개발開發하여 무상도無上道를 성취하는 영원한 활로活路를 얻었다. 만약에 불타가 무애대지無碍大智로써 중생이 불성을 구비하였음을 통견洞見하여 이를 교시敎示하지 않았으면, 중생은 영영 중생의 영역을 이탈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팔만보장八萬寶藏의 금구성언金口聖言은 그 목적이 불성 개발開發에 있으니, 언어문자의 습득으로써 불교를 삼는다면 이는 불교의 역행逆行이다. 

 

* 『열반경』과 『화엄경』에서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참다운 본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은, 인간은 참다운 가치를 타고났다는 절대적인 가치를 역설한 중대한 선언이다. 이로써 인간은 본래 타고난 절대성을 갈고 닦아 위없는 진리를 성취할 수 있는 살아있는 방법을 얻었다. 만약 부처님이 걸림 없는 크나큰 지혜로 중생이 참다운 본성을 갖고 있음을 통찰해 이를 가르쳐 드러내지 않았으면, 중생은 영영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팔만사천이 되는 보배로운 경전에 담긴 부처님의 성스러운 말씀들은 그 목적이 참다운 본성을 갈고 닦도록 하는 데 있으니, 경전의 언어와 문자를 습득하는 것을 부처님 가르침으로 여긴다면 이는 ‘그 분’에 대한 철저한 거역이 된다.   

 

【강설】 상대적이고 유한하며 불안정한 세계를 넘어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평안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종교이다. 그렇다면 그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평안한 세계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의 종교가 ‘지금’ 그리고 ‘여기’는 아니라고들 한다. 그들이 얘기하는 영원한 안락의 세계, 절대적 평온의 세계는 흔히 저 아득한 하늘 끝 어딘가에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 늘 현실 밖에서 하나님을 찾고 천당을 찾는다. 과연 있던가? 그래도 요즘은 과학이 발달되고 교육이 널리 행해져 하늘 어딘가에 하나님과 천당이 실재하리라고 믿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그럼 절대적 가치를 지닌 하나님과 천당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불교에선 위로 하늘에서 찾으라거나 아래로 땅에서 찾으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절대적 가치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여기에 있으며 자기 자신이 절대자라고 부처님께선 말씀하셨다.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있고 마음 가운데 천당이 있고 마음 가운데 극락이 있는 것이다.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번뇌 망상에 가려 스스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주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찾지 말라고 하셨다. 마음을 밝히고 보면 그 속에 극락도 천당도 하나님도 부처님도 다 들어 있다. 그러니 실제로 인간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절대자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선인 동시에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다.

 

그럼 나 자신이 절대자란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공부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물맛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물을 마셔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공부를 해보면 그 사실은 저절로 증명된다. 그러니 마음속의 부처, 마음속의 하나님, 마음속의 절대자를 믿고 열심히 공부해서 번뇌 망상을 끊어야지, 공연히 밖으로 부처를 찾고 하나님을 찾고 극락을 찾고 천당을 찾는다고 부산떨지 말라. 부처님도 성불하기 전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대자재지大自在智로 관찰해 보니 모든 중생이 하나도 빠짐없이 불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신기하고 신기하구나!”하고 감탄했던 것이다. 

 

스스로에게 갖춰져 있음을 믿고 부지런히 공부해나가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불성이다. 설사 일자무식이라 해도 상관이 없다. 육조 스님 역시 일자무식이었지만 자기 마음 가운데 부처를 보고 나서는 팔만대장경을 열 번 천 번 본 사람보다 낫지 않았는가? 그분이 바로 산 증거이다. 마음속 부처를 본다면 팔만대장경을 어찌 그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또 설사 팔만대장경을 종횡으로 다 외운다 할지라도 마음속 부처를 보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저 죽은 문자일 뿐이다. 죽은 송장에 좋은 옷을 입히고 곱게 화장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오직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 그것이 산부처가 되는 길이고 영원한 진리의 길이다.

 

【4-8】 ①모든 아라한阿羅漢은 불성을 불견不見하였으니, 불성을 불견不見한 고로 무상정각, 즉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얻지 못하느니라. ①諸阿羅漢은 不見佛性이니 以不見故로 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大般涅槃經』 27, 『大正藏』 12, p.781a) 

 

* ①모든 아라한들은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지 못했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지 못했기에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했다.

【평석】 소승극과小乘極果인 무학지無學地의 아라한阿羅漢은, 유여열반有餘涅槃이어서 견성이 아니므로 정각을 성취하지 못하였다. 아라한뿐 아니라 범성(凡聖)을 막론하고 견성을 못하면 정각, 즉 성불이 아니다.

 

* 아라한들은 ‘결함 있는 열반’이므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지 못했기에 ‘올바른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했다. 아라한이든 누구든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지 못하면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한 것이 아니다.

 

【4-9】 ①지위地位가 최후인 제10지第十地에 도달한 대보살도 오히려 불성을 명료明了히 지견知見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성문연각聲聞緣覺이 능히 정견하리오. ①菩薩이 位階十地하여도 尙不明了知見佛性이니 何況聲聞緣覺之人이 能見耶아? (『大般涅槃經』 8, 『大正藏』 12, p.652c) 

 

* ①제10지의 경지에 도달한 대보살도 오히려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성문과 연각이 어찌 능히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겠는가?

【평석】 “제10지 대성十地大聖이 설법을 여운여우如雲如雨하여도 견성은 나곡羅穀을 장격障隔함과 같다.”고 하여, 종문정안宗門正眼은 제10지 대성十地大聖도 견성하지 못하였음을 지적, 가책呵責하였다. 또한 “3현賢이 오히려 선문 종지를 명료치 못하는지라 10성聖이 어찌 조사 선종에 도달하리오[三賢이 尙未明斯旨라 十聖이 豈能達此宗이리오]”(‘十玄詩’, 『景德傳燈錄』 29, 『大正藏』 51, p.455b)라 하였으니, 견성을 근본으로 하는 선종의 심현深玄한 종지는 3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제10지 대성大聖도 문외한임을 갈파하였으니, 10지 대성이 견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제10지의 경지에 이른 대보살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설명하기를 구름이 일고 비가 오듯이 자유자재로 해도 얇은 비단을 가리고 참다운 본성을 본 것과 같다.”고 하여, 올바른 지혜의 눈을 가진 선문의 선사들은 제10지 보살도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의 경지에 이른 3현은 선문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고, 보살 10지의 계위에 있는 보살들 역시 여전히 선문의 핵심 가르침을 체득하지 못했다.”고 했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見性]을 근본으로 하는 선종의 깊고 오묘한 가르침은 3현은 말할 것도 없고 제10지에 도달한 대보살도 제대로 모른다고 갈파했는데, 이는 제10지에 이른 보살도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10】 ①제불 여래와 십주보살十住菩薩은 양안兩眼으로 불성을 보고, 9지地에 이르기까지는 전문傳聞으로 불성을 보느니라. ②9지 이하는 이문耳聞으로 불성을 보고 10지十地는 양안兩眼으로 보나 명료하지 못하고, 여래의 불안佛眼이라사 요요명명了了明明히 궁진窮盡하느니라. ①諸佛如來와 十住菩薩은 眼見佛性이요 乃至 九地는 聞見佛性이니라. ②九地以還은 聞見佛性이요 十地는 眼見이나 未了了하고 如來佛眼이라사 窮盡하니라. (『大般涅槃經』 26, 『大正藏』 12, p.772c. 淸涼, 『華嚴鈔』 82, 『大正藏』 36, p.644c) 

 

* ①모든 부처님과 제10지에 이른 보살은 두 눈으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신 것이고, 제9지 이전의 보살들은 참다운 본성에 대해 전해들은 수준이다. ②제9지 이하는 참다운 본성에 대해 귀로 들은 수준이고, 제10지는 두 눈으로 참다운 본성을 보기는 하나 분명하게 본 것은 아니고, 부처님은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체득하신 것이다. 

 

【평석】 10주十住는 3현三賢의 초계初階요 9지九地는 10성十聖의 후반後班이다. 그런데 10주는 안견眼見이요 9지는 문견聞見이라 하니, 선후가 착도錯倒된 것 같으나 여기의 10주는 3현의 10주가 아니요 10지十地의 이칭異稱이다. 수종數種 경론에서 10지를 10주로 표현하였으니 본문의 10주는 10지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천태이조天台二祖인 관정灌頂도 “주지불이住地不異”, 즉 “10주와 10지가 다르지 않다[今文에 云住라 하고 又復云地라하니 故知此中의 住와 地가 不異하니라].”(『大涅槃經疏』 26, 『卍續藏經』 57, p.429b)고 하였다. 

 

* 10주는 3현의 초입 단계요 제9지는 10성의 후반이다. 그런데 10주는 눈으로 보고, 제9지는 전해 듣는 것이라 하니 앞뒤가 잘못된 것 같으나 여기의 10주는 3현(십주, 십행, 십회향)의 10주가 아니요 10지의 다른 이름이다. 여러 경론에서 10지를 10주로 표현하였으니 본문의 10주는 10지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천태종 제2조 관정도 “주住와 지地가 다르지 않다.”, 즉 “10주와 10지가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4-11】 ①10지 보살이 비록 불성을 보나 명료치 못하느니라. ②10주 보살은 불성이 있음을 아나 암야暗夜의 소견所見과 같고, 제불여래는 또한 보며 또한 아느니라. ③10주 보살의 소견所見한 불성은 흑야黑夜에 사물을 봄과 같고, 여래의 소견所見은 백주白晝에 색상色像을 봄과 같으니라. ④10주 보살은 지혜력이 많고 삼매력三昧力이 적으므로 불성을 명견明見치 못하느니라. ⑤10주 보살은 불성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열반이라 이름하고 대열반大涅槃이 아니니라. ①十地菩薩이 雖見佛性이나 而不明了니라. ②十住菩薩이 知有佛性이나 猶如闇夜하야 所見이 不了하고 諸佛如來는 亦見亦知니라. ③十住菩薩의 所見佛性은 如夜見色이요 如來所見은 如晝見色이니라. ④十住菩薩은 智慧力이 多하고 三昧力이 少故로 不得明見佛性이니라. ⑤十住菩薩은 不見佛性일새 名爲涅槃이요 非大涅槃이니라. (『大般涅槃經』 25; 15; 25; 28; 21, 『大正藏』 12, p.769b; p.705a; p.769c; p.792c; p.746b) 

 

* ①제10지 보살이 비록 참다운 본성을 보나 분명하지 못하다. ②10주 보살은 참다운 본성이 있음을 아나 어두운 밤에 본 것과 같고, 부처님은 보기도 하고 알기도 한다. ③10주 보살이 본 참다운 본성은 캄캄한 밤에 사물을 본 것과 같고, 부처님이 본 것은 밝은 대낮에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④10주 보살은 ‘헤아리는 지혜의 힘’은 많으나 ‘정신을 통일하는 삼매의 힘’은 적으므로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보지 못한다. ⑤10주 보살은 참다운 본성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열반이라 부르지 대열반이라 하지는 않는다.  

 

【평석】 차단此段의 10주도 10지를 말함이다. 10지 견성은 여야견색如夜見色이니 흑야중黑夜中의 견색見色은 정견이 아니요 여래와 같이 백주견색白晝見色이라야 정견이므로, 10지도 견성을 허락하지 않고 여래불지如來佛地에서 비로소 견성이라 하는 것이다. 상문上文에서 말한 열반은 유여열반이요 대열반大涅槃은 무여열반이다. 

 

* 이 단락의 10주도 10지를 말한다. 10지가 체득한 참다운 본성은 밤에 사물을 본 것과 같아서 밤에 사물을 본 것은 올바르게 본 것이 아니다. 부처님처럼 대낮에 사물을 보아야 올바르게 본 것이다. 10지도 참다운 본성을 체득했다고 인정되지 않고 부처님의 경지에서 비로소 참다운 본성을 체득했다고 한다. 위의 글에서 말한 열반은 ‘결함 있는 열반’이고 대열반은 ‘결함 없는 열반’을 말한다. 

 

【강설】 10지를 10주로 표현한 경론이 많음을 알아야 한다.

 

【4-12】 ①모든 선남자善男子의 소유所有한 불성은 이렇게 지극히 심현深玄하여 정지명견正知明見하기 심히 어려우니, 오직 정각正覺한 불타만이 이를 능히 알 수 있느니라. 이렇게 불성은 오직 불타만이 능히 아느니라. ①諸善男子의 所有佛性은 如是甚深하야 難得知見이니 唯佛能知니라. 如是佛性은 唯佛能知니라. (『大般涅槃經』 8, 『大正藏』 12, p.653a) 

 

* ①모든 사람들이 소유한 ‘참다운 본성’은 (그 의미가) 깊고 미묘해 정확하게 체득하기 정말 어렵다. 오직 위없고 정확한 깨달음을 증득하신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 이처럼 참다운 본성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 

 

【평석】 불성은 즉 여래여서 제불경계諸佛境界이니, 불 이외는 모두 정지정견正知正見하지 못함은 당연한 귀결歸結이다. 

 

* 참다운 본성을 체득함은 부처님의 경지에서 가능하다. 부처님 이외는 바르게 알 수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4-13】 ①제불여래諸佛如來만이 분명료료分明了了히 불성을 볼 수 있느니라. ②불안佛眼으로 보므로 명명료료明明了了하니라. ③불성을 분명히 보므로 명행족明行足이라 하느니라. ①諸佛이 了了得見佛性이니라. ②佛眼見故로 得明了니라. ③明見佛性故로 名明行足이니라. (『大般涅槃經』 25; 25; 16, 『大正藏』 12, p.768c; p.772b; p.711b) 

 

* ①모든 부처님만이 분명하고 뚜렷하게 참다운 본성[空性]을 체득한다. ②부처님의 눈으로 보므로 분명하고 뚜렷하다. ③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보기 때문에 ‘지혜와 수행을 모두 갖추었다’[明行足]고 말한다.

 

【평석】 무명의 암굴暗窟을 타파하고, 장야長夜의 미몽迷夢을 각성覺惺하여 청천백일하靑天白日下에 확연광조廓然廣照하여야 진성眞性을 정견正見한다. 제10지 대성은 미세무명이 정안正眼을 장폐障蔽하여 암야견색闇夜見色의 몽중미망夢中迷妄이므로, 정각이 아니며 견성이 못된다. 그리하여 아뇩보리阿耨菩提, 즉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성취하여 불성을 정견하는 불조정전佛祖正傳의 철칙 하에, 구경무심인 불지佛地 이외는 단연코 견성을 불허한다. 견성이 이렇게 극난極難하니 유불이래有佛以來로 견성득도가 얼마나 될는지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경각인 견성은 중생의 근본무명 즉 제8 아뢰야第八阿賴耶의 미세망상을 단진斷盡하는 데 있다. 중생의 불성은 불가사의하여서 불조佛祖의 성훈聖訓에 따라 여실히 수행하면, 5역10악五逆十惡의 극중 죄인極重罪人도 당세當世에 견성할 수 있음을 불조佛祖가 동설同說한 바이니, ‘불위야不爲也언정 비불능야非不能也’라 함은 이를 말함이다. 이는 오직 당자當者의 노력 여하如何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고自古로 선문의 정안종사 중에, 뇌야賴耶의 미세망상을 단진斷盡하여 구경무심지에 도달하지 않은 자는 없다. 그리하여 미세 망상을 종문宗門에서 제8 마계第八魔界라 호칭하여 수도상 극력 배견排遣하여, 제8 마계인 근본무명을 타파하여야만 정안으로 인허認許하는 것이니, 불조佛祖의 혜명이 여기에 달려 있다. 

 

* 어리석음의 어두운 동굴을 타파하고, 긴 밤과 같은 어지러운 꿈에서 깨어나 푸른 하늘에 뜬 밝은 태양 빛처럼 널리 분명하게 비추어야 참다운 본성을 올바르게 체득한다. 제10지 대성은 미세한 어리석음이 올바른 지혜를 가리고 있어 어두운 밤에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꿈속에서 어지러이 헤매고 있으므로, 올바른 깨침이 아니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여 참다운 본성을 정확하게 보아야만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제대로 계승할 수 있다는 철저한 원칙하에 궁극의 집착 없는 마음의 경지인 부처님의 경계 이외는 절대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 아니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 부처님이 나타나신 이래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의 깨달음은 중생의 근원적인 어리석음, 즉 제8 아뢰야식의 미세한 그릇된 생각을 모두 끊어 없애야만 가능하다. 중생의 참다운 본성은 알 수 없어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행하면, 극악한 죄를 지은 죄인도 현세에 참다운 본성을 체득할 수 있음을 부처님과 조사들이 함께 말씀하셨다[同說].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를 가리킨다. 이는 오직 당사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선문의 ‘눈 밝은 뛰어난 스승들’[正眼宗師] 가운데 아뢰야식의 미세한 망상을 완전히 끊지 않고 ‘궁극의 집착 없는 마음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없다. 그리하여 미세한 그릇된 생각을 종문에서는 제8 마계라 부르며 수행할 때 철저하게 경계하므로, 제8 마계인 아뢰야식의 미세한 망상을 타파해야만 올바른 눈을 가진 뛰어난 스승으로 인정하는 것이니, 부처님과 조사들의 지혜의 등불이 여기에 달려 있다.    

 

【4-14】 ①제불세존은 쌍안雙眼으로 불성을 통견洞見하되 장중掌中에 아마륵과阿摩勒果를 보는 것과 같으니라. ②제불세존은 불성을 요견了見하되 장중掌中의 아마륵과阿摩勒果를 봄과 같으니라. ③제불세존은 정定과 혜慧를 등지等持하므로 불성을 명견(明見)하여 요료了了히 장애가 없어서 암마륵과菴摩勒果를 봄과 같으니라. ①諸佛世尊은 眼見佛性하되 如掌中에 觀阿摩勒하니라. ②諸佛世尊은 見於佛性을 如觀掌中의 阿摩勒果하니라. ③諸佛世尊은 定慧等故로 明見佛性하야 了了無碍하야 如觀掌中의 菴摩勒果하니라. (『大般涅槃經』 26; 25; 28, 『大正藏』 12, p.772b; p.770a; p.792c) 

 

* ①여러 부처님들은 두 눈으로 참다운 본성을 명백하게 파악하되 손바닥의 아마륵과 산스크리트 ‘āmalaka’의 음역. 과실수 이름.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등이 원산지인 낙엽성의 열대 수목. 열매는 호도와 비슷하며 맛은 쓰고 떫으나 그 액즙은 맛이 좋다. 과실을 먹을 때는 떫지만, 먹은 뒤에 입 안에 단맛이 남기 때문에 여감자餘甘子라고도 번역한다. 암라āmra의 음역어와 비슷하여 곧잘 혼동되기도 하지만, 둘은 서로 다른 나무이다.

 

를 보는 것과 같다. ②여러 부처님들은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함이 손바닥의 아마륵과를 보는 것과 같다. ③여러 부처님들은 선정과 지혜를 균등하게 갖추고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해 장애가 없다. 마치 손바닥 가운데 있는 암마륵과를 보는 것과 같다.

 

【평석】 정혜定慧가 균등한 대적광삼매大寂光三昧 중의 여래위如來位가 아니면, 불성을 명견明見치 못하나니 견성이 즉 성불인 무상정각無上正覺이다.

 

* 선정과 지혜가 균등한 ‘크나큰 고요함과 지혜의 삼매’에 든 부처님의 경지가 아니면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하지 못한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함은 바로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을 말한다.

 

【강설】 아마륵과는 과일 이름이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손바닥에 놓인 구슬 보듯 한다’는 의미다.

 

【4-15】 ①대각여래大覺如來가 대열반에 들어가느니라. ②이 대열반은 곧 제불세존의 심심甚深한 선정禪定이니라. ③만약에 불성을 정견正見하면 능히 번뇌를 단진斷盡하나니 이를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④만약에 요료了了히 불성을 정견하면 대열반이라 하는지라, 이 대열반은 오직 대상왕大象王이 능히 그 심저深底를 궁진窮盡하나니 대상왕大象王은 제불을 말함이니라. ⑤중생의 불성은 제불의 경계니, 불성을 정견한 고로 생사를 해탈하여 대열반을 얻느니라. ①如來가 入大涅槃이니라. 是大涅槃은 卽是諸佛의 甚深禪定이니라. 若見佛性하면 能斷煩惱하나니 是卽名爲大涅槃이니라. 若了了見於佛性하면 得明爲大涅槃이라 是大涅槃은 唯大象王이 能盡其底니 大象王者는 謂諸佛也니라. 衆生佛性은 諸佛境界니 以見佛性故로 解脫生死하야 得大涅槃이니라. (『大般涅槃經』 28; 10; 23; 21; 26, 『大正藏』 12, p.790c; p.672c; p.758c; p.746b; p.776a)

 

* ①크나큰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이 크나큰 열반에 들어가셨다. ②이 크나큰 열반이 바로 모든 부처님들의 깊고 깊은 선정이다. ③만약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면 능히 어지러운 마음을 끊을 수 있으니 이것을 바로 크나큰 열반이라 한다. ④만약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하면 크나큰 열반에 들어간 것이다. 이 크나큰 열반은 오직 코끼리왕의 발이 철저하게 강바닥에 닿는 것과 같다. 코끼리왕은 부처님을 가리킨다. ⑤중생의 참다운 본성은 부처님의 경계이며, 참다운 본성을 체득했기에 삶과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 크나큰 열반을 얻었다.  

 

【평석】 제불의 심심선정甚深禪定인 대열반, 즉 무여열반은 오직 불성을 정견하여야 성취하나니 이는 견성이 즉 여래며 대열반인 까닭이다. 

 

* 모든 부처님의 깊고 깊은 선정인 크나큰 열반은 참다운 본성을 체득해야만 성취한다. 이는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이고 크나큰 열반이기 때문이다. 

 

【4-16】 ①『열반경』에서 말하기를,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무진보장無盡寶藏이 증감과 흠결欠缺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원교圓敎라 하느니라. ①涅槃經에 云호대 金剛寶藏이 無所減缺이라 하니 故名圓敎也니라. (智者, 『四敎義』 1, 『大正藏』 46, p.721b)

 

* ①『열반경』에 “금강석처럼 부서지지 않고 다함이 없는 보배 창고는 늘지도 줄지도 않고 이지러지거나 부족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므로 원만한 가르침[圓敎]이라고 한다.    

 

【평석】 지자智者는 『화엄』, 『법화』, 『열반』 등의 경經을 원교圓敎라고 판정判定하였다. 『열반경』은 여래 최후의 궁극설법이므로 원교라 한 것이며 소증불과所證佛果는 원교극과圓敎極果요 무여열반이다. 

 

* 중국의 천태 대사 지자(538-597)는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등을 원만한 가르침을 담은 원교라고 판정했다. 『열반경』은 부처님이 마지막에 하신 궁극의 교법敎法이므로 원만한 가르침이라 한 것이며, 깨달은 과보는 원만한 가르침이 도달한 궁극의 과보인 ‘결함 없는 열반’이다.  

 

【강설】 천태 교판에서는 여래의 일대시교를 그 가르침의 성격에 따라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의 4교 천태종에서 부처님의 전체 교설을 교리의 내용에 따라 4종으로 분류한 것. 장교藏敎는 경·율·논 3장으로 말한 소승교이다. 통교通敎는 앞뒤에 통하는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성문・연각・보살이 함께 받는 교인데 근성根性이 하열한 사람이 이것을 얕게 알면 앞의 장교와 같은 결과가 되고, 근성이 수승한 사람이 깊고 묘하게 알면 뒤의 별교나 원교에 통하므로 통교라 한다. 별교別敎는 다른 것과 같지 않은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성문 연각의 가르침과는 다르고 원교와도 같지 않으므로 별교라고 한다. 원교圓敎는 원만하고 완전한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법화경』이 이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로 분류하였는데, 혹자는 “『열반경』에서 말씀하신 성불 대열반이 혹 장교나 통교나 별교의 성불 열반이 아닌가?”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교의四敎儀』 6권으로 천태 지의智顗 지음. 고려 체관諦觀이 지은 『천태사교의』와 구별하기 위해 『대본사교의大本四敎義』라 함. 부처님의 가르침을 장藏·통通·별別·원圓의 4교敎로 분류하고 사문입리四門入理·판위부동判位不同·권실權實·관심觀心 등의 뜻을 서술하고 있다.

 

를 인용해 『열반경』의 가르침이 원교에 속하고 『열반경』에서 말한 열반이 구경의 대열반임을 말하는 것임을 입증하였다. 

앞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자. 먼저 성불하면 견성이고 견성하면 성불이므로 제10지의 대성인도 성불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10지를 제10주로 표현한 경론이 있어 혹 “3현위의 10주를 지칭한 것은 아닌가?”할까봐 여러 경론에서 10지를 10주로 표현한 구절들을 인용하였다. 또한 『열반경』에서 말한 극과極果가 장교나 통교나 별교의 극과가 아닌 원교의 구경 극과임을 천태대사의 『사교의』에 근거해 밝혔다. 다음엔 경론에 보살도 견성했다는 말씀이 있어 “10지의 계위에 든 보살들은 견성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품는 자들이 있을까 하여 그 내용을 자세히 밝혔다.

 


1975년 해인사 수선당 앞.

왼쪽부터 원택스님, 원융스님, 원명스님. 오른쪽 첫번째가 원해 스님. 두번째가 원행스님

 

【4-17】 ①다시 원願하노니 모든 중생이 일체번뇌를 영원히 파멸破滅하여 요료了了히 불성을 정견하되 문수보살 등과 같게 하여지이다. ②문수사리文殊師利와 모든 보살이 이미 무량세無量世에 성도聖道를 수습修習하여 불성을 요료명지了了明知하느니라. ①復願諸衆生이 永破諸煩惱하야 了了見佛性하되 猶如文殊等케 하여지이다. ②文殊師利와 諸菩薩等이 已無量世에 修聖道하야 了知佛性이니라. (『大般涅槃經』 18; 30, 『大正藏』 12, p.728b; p.803b) 

 

* ①다시 원력을 세웁니다. 모든 중생이 수많은 그릇된 생각을 영원히 부수어 없애 분명하게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되 문수 보살 등과 같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②문수사리와 모든 보살이 이미 한량없는 시간 전에 성스러운 가르침의 길을 따라 수행하고 닦아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체득했습니다.

  

【평석】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성취한 여래위如來位, 즉 불지佛地만이 요료견성了了見性임은 불타의 혜명이니 문수 보살을 요료견불성了了見佛性이라 함은 문수는 이성불已成佛의 권현 보살權現菩薩인 소이所以이다. 즉 문수는 영파제번뇌永破諸煩惱하여 이성정각已成正覺하여, 과거에 용종상 여래(龍種上如來,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 하下)로, 대신 여래(大身如來, 『대신여래보살영락경大身如來菩薩瓔珞經』 4)로, 보상 여래(寶相如來, 『적조음소문경寂調音所問經』)로, 환희장마니보적 여래(歡喜藏摩尼寶積如來, 『앙굴마사유경央崛摩四維經』 4) 등으로 출현한 대력 보살大力菩薩이니 요료견불성了了見佛性인 것이다. 문수 이외의 제 보살이라 함도 문수와 같은 대력 보살大力菩薩을 지칭함이다. 

 

*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의 경지만이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했다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이다. 문수 보살이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했다고 말하는 것은 문수는 이미 성불해 ‘방편으로 모습을 드러낸 보살’[權現菩薩]이기 때문이다. 문수는 모든 그릇된 마음들을 영원히 타파하여 이미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했고, 과거에 용종상 여래, 대신 여래, 환희장마니보적 여래 등으로 나타난 대력 보살이므로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했다는 것이다. 문수 이외의 여러 보살들도 문수 보살과 같은 대력 보살을 말한다. 

 

【강설】 문수 보살은 모든 번뇌를 영원히 부수어 이미 정각을 이루었다고 했으니 이는 곧 성불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보살도 견성했다.”는 『대열반경』의 말씀에서 그 보살은 문수 보살처럼 이미 정각을 이룬 대력보살大力菩薩을 지칭한 것이지 10지 등의 보살을 가리킨 말은 아니다.

 

【4-18】 ①어떤 것이 요료견了了見인고? 사람이 스스로 장중掌中의 아마륵과阿摩勒果를 보는 것과 같아서, 무상도無上道와 보리와 열반은 오직 여래만이 완전히 요지명견정각了知明見正覺하나니 모든 보살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①云何了了見고 如人이 自觀掌中의 阿摩勒果하야 道와 菩提와 涅槃을 唯有如來가 悉知見覺하나니 及諸菩薩도 亦復如是니라. (『大般涅槃經』 15, 『大正藏』 12, p.708c) 

 

* 무엇을 분명하게 보았다고 하는가? 이는 마치 사람이 자기 손바닥 안의 아마륵과를 보는 것과 같다. 위없는 진리, 깨달음, 열반을 오직 부처님만이 자세하게 체득해 깨달았으며 여러 보살들도 또한 이와 같다. 

 

【평석】 장중掌中의 늑과勒果를 명관明觀함과 같이, 불성을 요견了見함은 오직 불타뿐이라 함은 세존이 누누히 선설宣說한 바이다. 그러니 ‘급제 보살及諸菩薩’이라 함은 ‘유여문수등猶如文殊等’과 같은 대력 보살大力菩薩이다. 

 

* 손바닥 안의 늑과를 분명하게 보는 것과 같이, 참다운 본성을 확실하게 체득한 분은 오직 부처님뿐이라 함은 부처님이 여러 번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그러니 ‘또한 여러 보살’[及諸菩薩]이라고 한 것은 “오히려 문수 보살 등”에 나오는 대력 보살을 말함이다.

 

【4-19】 ①아뇩보리阿耨菩提와 대반열반大般涅槃을 만약에 요지명견정각了知明見正覺하면 마땅히 보살이라 이름 하느니라. ①阿耨多羅三藐三菩提와 大般涅槃을 若知見覺하면 當名菩薩이니라. (『大般涅槃經』 16, 『大正藏』 12, p.708c) 

 

* ①위없고 완전한 깨달음과 크나큰 열반을 만약에 분명하게 체득해 올바르게 알면 마땅히 보살이라 부른다.  

 

【평석】 무상정각無上正覺인 아뇩보리阿耨菩提와 제불심정諸佛深定인 대열반을 지견知見하면 불지여래佛地如來이니, 보살이라 명칭함은 대력권현大力權現의 과후보살果後菩薩임은 의심할 수 없다. 

 

*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인 ‘아뇩보리’와 여러 부처님들의 깊은 선정인 ‘크나큰 열반’을 분명하게 체득하면 부처님의 경지이다. 보살이라 부르는 것은 깨달음의 과보를 증득해[果後] 크나큰 힘과 방편으로 나타나는 보살을 말한다.

 

【4-20】 ①만약에 불성을 지견각知見覺한 자라면 보살이라 이름 하느니라. ②불성을 명견明見하면 이를 보살이라 이름 하느니라. ③해탈을 얻은 고로 불성을 보며 불성을 봄으로 대열반을 얻나니, 이는 보살의 청정지계淸淨持戒니라. ①若有知見覺佛性하면 名位菩薩이니라. ②明見佛性하면 是名菩薩이니라. ③得解脫故로 得見佛性이요 見佛性하면 得大涅槃이니 是菩薩의 淸淨持戒니라. (『大般涅槃經』 16, 『大正藏』 12, p.708c; p.709b; p.710a) 

 

* ①만약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자이면 보살이라 부른다. ②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하면 이를 보살이라 한다. ③해탈을 얻었기에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며, 참다운 본성을 체득했기에 크나큰 열반을 얻는데, 이것은 보살이 깨끗한 계를 지키는 것이다.   

 

【평석】 여기서 말한 보살도 명견불성明見佛性한 대열반의 보살이니 대력大力 보살菩薩이다.

 

【강설】 여기에서 거론하고 있는 보살들은 이미 정각을 이루고 방편으로 보살의 몸을 나툰 대력 보살임을 명심해야 한다.

 

【4-21】 ①대반열반大般涅槃은 오직 불과 보살의 소견所見이니, 그러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①大般涅槃은 唯佛菩薩之所見이니 故로 名大涅槃이니라. (『大般涅槃經』 31, 『大正藏』 12, p.746b) 

 

* ①크고 완전한 열반은 오직 부처님의 경지에 오른 보살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나큰 열반이라 한다. 

 

【평석】 과후여래果後如來만이 대열반이니, 이 불보살의 보살도 지상보살地上菩薩이 아니요 과후대력보살果後大力菩薩임은 불요재론不要再論이다. 

 

* 깨달음의 과보를 증득한 분만이 크나큰 열반을 증득하니, 이런 부처님과 보살님은 제1지부터 제10지에 있는 보살이 아니고, 깨달음의 과보를 증득한 보살임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4-22】 ①불세존을 대사문大沙門이나 대바라문大婆羅門이라 하느니라. ②대신중생大身衆生이라 함은 불타와 대력보살大力菩薩이니, 무상대지혜無上大智慧인 고로 대중생大衆生이라 하느니라. ①佛世尊을 名爲大沙門이며 大婆羅門이니라. ②大身生者는 諸佛菩薩이니 大智慧故로 名大生이니라. (『大般涅槃經』 16; 30, 『大正藏』 12, p.710c; p.805b) 

 

* ①석가모니 부처님을 크나큰 사문이나 크나큰 바라문이라 부른다. ②큰 몸을 가진 중생이라 함은 부처님과 대력 보살을 말함이니, 위없는 크나큰 지혜를 체득했기에 크나큰 중생이라 한다. 

 

【평석】 과후여래果後如來인 정각세존正覺世尊과 대력보살大力菩薩을 대바라문大婆羅門 대중생大衆生이라 호칭하여도 이는 정각正覺을 내용으로 하여 실지實地의 바라문과 중생이 아니니, 여하如何히 호칭하여도 정각인 내용에는 변동이 없다. 이와 같이 명견불성明見佛性한 여래세존을 방편상 보살로 표현하여도 명견불성明見佛性인 여래세존 임에는 추호秋毫의 상관도 없다. 

 

* 깨달음의 과보를 증득한 부처님을 올바르게 깨치신 부처님, 중생 구제에 큰 힘을 발휘하는 보살, 크나큰 바라문, 크나큰 중생이라 불러도 올바른 깨달음을 증득했다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바라문이나 중생은 실질적인 바라문이나 중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한 부처님을 편의상 보살로 표현해도 참다운 본성을 체득했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틀림이 없다. 

 

【강설】 누차 설명했듯 『열반경』에서 거론한 보살은 10지 등의 보살이 아니라 대력보살, 즉 부처님과 다름없는 보살임이 자명하다. 따라서 “불성을 보고 깨달은 사람을 보살이라 한다.”는 말씀은 견성하면 곧 부처라는 말과 다르지 않고, 부처만이 견성이란 원칙과도 전혀 위배되지 않는다. 다음은 결론이다.

 

【4-23】 ①진해탈眞解脫은 곧 여래요, 여래는 곧 열반이요, 열반은 곧 무진無盡이요, 무진은 곧 불성이요, 불성은 곧 결정決定이요, 결정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①眞解脫者는 卽是如來요 如來者는 卽是涅槃이요 涅槃者는 卽是無盡이요 無盡者는 卽是佛性이요 佛性者는 卽是決定이요 決定者는 卽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大般涅槃經』 5, 『大正藏』 12, p.636a) 

 

* ①참다운 해탈이 곧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곧 열반이요, 열반이 바로 ‘다함이 없는 것’[無盡]이다. 다함이 없는 것은 참다운 본성이요, 참다운 본성이 바로 ‘이미 결정되어 움직임이 없는 것’[決定]이다. ‘이미 결정되어 움직임이 없는 것’이 바로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이다. 

 

【평석】 해탈・여래・열반・불성과 아뇩보리阿耨菩提는 동체이명同體異名이다. 그리하여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든지 불성을 명견明見하면 무상정각無上正覺인 여래이다. 

 

* 해탈, 부처님, 열반, ‘참다운 본성’과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은 이름은 다르나 몸은 같다. 그러므로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거나 ‘참다운 불성’을 체득한 것이 바로 ‘위없고 올바른 깨달음’을 체득한 것이자 ‘부처님’이다.  

 

【4-24】 ①불타가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아, 인연이 없으므로 무생無生이라 명칭하며, 무위인 고로 무출無出이라 하고 조업造業이 없으므로 무작無作이라 이름 한다. 망결妄結과 업적業賊을 파괴하였으므로 안온安穩이라 하고, 모든 망결妄結의 업화業火가 영멸한 고로 멸도滅度라 하며, 각관覺觀을 사리捨離하였으므로 열반이라 호칭한다. 궤료憒鬧

함을 원리遠離하였으므로 적정寂靜이라 하며, 생사를 영단永斷하였으므로 무병無病이라 하고, 일체가 공무空無하므로 무소유無所有라 하나니, 보살이 이 심관深觀을 작득作得하였을 때 즉시에 불성을 명료明了히 정견하느니라. ①佛言하사되 善男子야 無因緣故로 故名爲無生이요 以無爲故로 故名無出이요 無造業故로 故名無作이요 壞結賊故로 故名安穩이요 諸結火滅故로 名滅度요 離覺觀故로 名涅槃이요 遠憒鬧故로 名爲寂靜이요 永斷生死故로 名無病이요 一切無故로 名無所有니 善男子야 菩薩이 作是觀時에 卽得明了於佛性이니라. (『大般涅槃經』 29, 『大正藏』 12, p.794b) 

 

* ①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아! 인연이 없으므로 ‘태어남이 없다’[無生]고 하며,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므로[無爲] 나타남이 없다[無出]고 하고, 업을 짓지 않음으로 ‘지음이 없다’[無作]고 한다. ‘그릇된 묶임’[妄結]과 ‘업이라는 도적’[業賊]을 없앴으므로 평온함이라 하고, ‘그릇된 묶임’에서 일어난 모든 ‘업의 불’[業火]을 영원히 없앴기에 ‘그릇된 생각을 없애고 피안에 도달했다’[滅度]고 하며, 감각적인 지각 작용을 완전히 버렸기에 ‘아픔이 없다’[無病]고 하며, ‘모든 것이 본래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앎으로 무소유라 한다. 보살이 ‘깊고 미묘한 수행관법’[深觀]을 ‘이뤄 체득하면’[作得] 즉시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깨닫는다.        

【평석】 무생無生 무위無爲와 열반涅槃 무병無病 등 호칭은 각이各異하나 여래가 현증現證한 동일한 내용이니, 제8 아뢰야第八阿賴耶의 미세망상을 영단永斷하고 구경대무심지究竟大無心地에 도달한 심심현경深深玄境을 표현한 명칭이다. 그리하여 적조쌍융寂照雙融하며 정혜등지定慧等持한 이 구경 삼매에서만이 견성이며 성불이니, 제불여래와 정안종사들이 무생無生 무위無爲 등을 철증徹證지 않고 견성하며 성도하지 않았다. 

 

『대반열반경』에서 “불생번뇌不生煩惱 단진번뇌斷盡煩惱 단제번뇌斷除煩惱 영파번뇌永破煩惱”를 견성이라 했는데, 이 번뇌는 추중(麤重)과 미세(微細)를 총괄한 것이니, 『기신론』에서 “영리미세永離微細를 득견심성得見心性”이라 함과 동일하다. 제10지 보살도 번뇌를 단진斷盡하지 못하였으므로 견성이 아니라 하였으며, 불지佛地에서만 영파번뇌永破煩惱하였으므로 제불여래만이 견성이라 한 것이다. 이 원리미세遠離微細 불생번뇌不生煩惱한 불지의 견성을 무심無心 무념無念 무생無生 대열반大涅槃 구경각究竟覺 여래지如來地라 하였다. 이렇게 전불후조前佛後祖가 이구동성으로 견성 즉 구경각인 무상정각無上正覺이며 무여열반인 대열반이며 불타여래임을 고구정녕苦口叮嚀으로 선설宣說하셨으니, 이로써 견성이 원증돈증圓證頓證의 증오證悟 즉 구경각의 대무심지大無心地임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그러니 수도고사修道高士는 불조佛祖의 유법遺法만 따를 뿐이요 여외餘外의 이단사설異端邪說은 정법正法의 기치旗幟 아래에서 단연 배제하여야 한다.

 

* 태어남이 없음, 인위적으로 함이 없음, 열반, 아픔이 없음 등의 호칭은 서로 다르나 부처님이 깨달으신 같은 내용을 말한다. 제8 아뢰야식의 미세하고 그릇된 생각을 영원히 끊고 ‘집착 없고 크나큰 궁극의 마음의 상태’[究竟大無心地]에 도달한 ‘깊고 깊어 그윽한 경지’[深深玄境]를 표현한 이름들이다. 그리하여 ‘고요함’[寂=止]과 ‘비춤’[照=觀]이 동시에 융합하고 ‘고요함에서 오는 선정’[定]과 ‘비춤에서 발생한 지혜’[慧]를 함께 갖춰 ‘마음이 하나가 된 궁극의 상태’[究竟三昧]에서만 참다운 본성을 체득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불이다. 모든 부처님과 ‘눈 밝은 뛰어난 스승들’[正眼宗師]은 태어남이 없음, 인위적으로 함이 없음 등을 철저하게 증득함으로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고 부처님이 되었다.  

 

『대반열반경』에서 “그릇된 생각이 생기지 않고, 그릇된 생각을 모두 끊고, 그릇된 생각을 끊어 없애며, 그릇된 생각을 영원히 타파한 것”을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그릇된 생각은 비교적 무거운 것과 미세한 것 모두를 말하며, (『대반열반경』의 이 구절은) 『기신론』에서 “영원히 미세한 것을 여의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다.”고 말한 것과 동일하다. 제10지에 오른 보살도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끊지 못하였으므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 아니며, 부처님의 경지에서만 그릇된 생각을 영원히 타파함으로, 부처님의 경지에서만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다고 한 것이다. 그릇된 미세한 생각을 멀리 여의고 그릇된 생각이 생기지 않는 부처님의 경지에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은 집착 없는 마음, 태어남이 없음, 크나큰 열반, 궁극의 깨달음, 부처님의 경지라고 한다. 이렇게 부처님과 조사들이 앞과 뒤에서 같은 말씀으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 즉 궁극의 깨달음이 ‘위없고 완전한 깨달음’이며, 남김 없는 열반이며, 크나큰 열반이며, 부처님의 경지임을 할머니가 손자에게 설명하듯이 자세하게 말씀하셨으니, 이로써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 바로 원만한 깨달음이자 몰록 깨친 증오證悟이며, 궁극의 깨달음인 집착 없는 참다운 마음의 경지임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그러니 수행하는 분들은 부처님과 조사가 남긴 가르침만 따를 뿐이요, 여타의 그릇되고 삿된 말들은 올바른 가르침의 깃발아래에서 단연코 없애야 할 것이다.  

 

【강설】 이렇게 고구정녕 반복해 견성([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 곧 성불임을 밝히는 까닭은 흐트러진 선문의 종풍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참선한다고 화두 한 사흘 들고는 견성했다 떠들고, 선을 가르친다는 이들이 견성한 이와 견성하지 못한 이로 패를 나누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 스님의 말씀에 근거해 삿된 주장과 이설들을 말끔히 청산하자고 이렇게 역설하는 것이다. 견성은 곧 성불을 의미한다는 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부처님 조사 스님들이 증명하신 바이다. 견성을 해도 바로 하고 성불을 해도 바로 하고 공부를 해도 바로 해야지, 잘못된 법을 의지한다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다 같이 죽는 짓이다. 그러니 고불고조의 말씀을 의지해 바르게 믿고 바르게 공부해서 바르게 성불하자는 것이다. 

 

앞의 내용을 총괄해 보자. 먼저 『화엄경』과 『열반경』의 말씀을 인용해 견성하면 성불한 것이고 성불을 하면 견성한다는 것에서 시작해, 제10지 만심(滿心)의 보살조차도 견성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또 10지를 10주로 표현한 곳이 많은데, 혹 “수행계위가 낮은 3현위의 10주 보살은 견성하지 못했다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이가 있을까 하여 10지는 종종 10주로도 표현됨을 밝혔다. 다음에선 “견성하면 보살이라 한다.”는 『열반경』의 말씀을 지적해 “‘10지 만심의 보살도 견성하지 못했다’는 말씀과 위배된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을 위해 『열반경』에서 말한 보살은 제불여래의 경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대력 보살을 지칭한 것임을 밝혔다. 문수 보살은 이미 성불해 과거 7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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