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및 특별서평]
암각화의 시원始原 탐색한 게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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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2020 년 11 월 [통권 제91호] / / 작성일20-11-25 11:42 / 조회9,009회 / 댓글0건본문
특별서평 | 일감 스님의 『하늘이 감춘 그림 … 』
김호석 | 수묵화가
내가 기억하는 일감 스님과의 첫 만남은 성철 스님 전시회를 준비하며 스님을 대신할 모델을 부탁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이후로도 불교계 다른 전시를 준비하면서, 여러 스님들과 다양한 의견이 있을 때에도 일감 스님은 늘 곁에 계셨다. 그 인연은 스님이 서울 정안정사와 하남 정심사에 계실 때는 물론, 멀리 멕시코 반리사에 머물던 때에도 간단없이 이어졌다. 스님과의 기억이 단편적인 것은 종교인과 속인의 차이일지 모른다. 그러나 스님과의 기억의 조각들이 여전히 힘 있게 자리하는 것은 스님의 가치 층위가 높고, 대상을 바라보는 따뜻함과 긍정성 때문일 것이다.
나와 스님과 암각화 인연의 출발은 이렇다. 2005년 즈음, 내가 경북 고령으로 암각화 답사를 갔을 때였다. 당시 해인사에 계신 스님께 연락하니 단숨에 달려오셨고, 우리는 함께 암각화를 완상(玩賞)했다. 그때 스님은 ‘반구대 암각화’를 떠올리며, 그림으로 그려진 한국 역사의 첫 장이 물에 잠기는 것을 내내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불현듯 스님에게 암각화 답사를 가자고 제안했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탐갈리 유적이었다. 암각화로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유적은 나에게 먼 이역이었지만, 암각화 연구자로서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곳이었다.
사진1. 「뱃속에 애기말도 뿔이 있더라」, 카자흐스탄 탐갈리, 청동기 시대. 일감 스님 탁본.
1월 초순에 도착한 카자흐스탄 탐갈리, 동토의 땅은 생각보다 훨씬 추웠고 바람도 거셌다. 상고대가 핀 너른 벌판은 흰 눈으로 덮여 있었고, 멀리 말 탄 경찰만이 순찰을 돌며 흰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스님과 나는 마침 겨울철이라 비어 있던 암각화 경비 초소에서 잠을 자고, 몸을 녹이며, 해가 뜨면 선사시대의 그림들을 보러 다녔다. 스님과 나는 많은 생각들을 공유했다. 탐갈리 암각화는 성스러운 그림으로 가득했다. 그 곳에서 스님은 펄펄 날아다녔다. 환희심이 읽혀졌다. 대부분의 암각화는 쉽게 내용을 추정할 수 있었지만, 어떤 그림은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지혜가 있어야 했다. 암각화를 읽어내는 스님의 논리는 때로는 명확했고, 다양했다. 스님은 선사시대 사람들은 왜 바위에 이런 독특한 그림을 그렸을까, 그림은 무엇을 말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이곳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그렸을까, 태양신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등, 스님의 추론은 다양하게 확장되어갔다.
나는 스님의 사고에 간섭하거나 이의를 달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도 내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일 수 있음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스님과 함께 한 첫 답사에서 암각화를 대하는 스님의 지극한 마음과 창의적인 해석에 감탄했다. 스님 또한 첫 답사에 깊은 의미를 두는 듯했다.
스님은 다른 지역으로 영역을 넓히며 암각화(참고 사진 1)를 답사하고 나름의 사고를 만들어나갔다. 나는 스님에게 몽골 알타이 지역 답사를 추천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차강살라와 바가오이고르 그리고 차강골 지역이다. 스님은 이 세 곳 중 특히 차강골에 관심이 많았다. 암각화가 있는 곳은 성소聖所이거나 제단祭壇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님은 이 지점에 특유의 촉수가 발동한 듯 4계절을 오가며 집중적으로 섭렵했다. 특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눈 덮인 겨울 답사를 선호했다. 암각화에 흠뻑 빠진 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느 순간 스님은 암각화를 그린 선사시대 사람들과 소통하며 자연과 신을 궁구窮究하는 깊은 세계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진2. 일감 스님, 『하늘이 감춘 그림, 알타이 암각화』, 불광출판사, 2020.
카자흐스탄에 있는 새로운 암각화 유적인 쿨자바시를 답사했을 때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본 도상圖像과 탐갈리에서 확인한 도상을 비교하며, 두 암각화의 상호 연관성과 영향 관계를 설파했다. 탁월한 추론이었다. 학위만 없을 뿐 박사급 수준의 식견이었다. 스님에겐 어떤 선입견도 없이 암각화가 말하고자 하는 그 떨림을 감지하는 특별한 감(感)이 있었다. 다음에 이어진 키르기스스탄 고산에 자리한 싸이말루 따쉬 암각화 유적까지 스님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해발 3천 미터의 고산 지대인 이곳은 일 년 중 특정 조건에만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기후 조건이 열악하다. 카자르만 마을에서 차로 40여 분을 올라가서 다시 말을 타고 3시간을 더 올라가야 할 만큼 오지 중의 오지이다. 장소의 특수성 때문인지 싸이말루 따쉬에는 독특한 암각화가 많았다. 일감 스님은 이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어떤 세계를 본 듯했다. 스님과 나눈 대화, 그리고 스님의 상기된 얼굴과 한껏 올라간 어깨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예감과 긍지가 느껴졌다.
스님의 원시반본原始反本 철학은 러시아 알타이 암각화를 관찰하면서도 더욱 깊어졌다. 깔박따쉬와 바르브르가즈이, 엘란가쉬, 차강가, 브라뜨이, 이르비스뚜 등으로 넓혀가며 다양한 편린들을 채집했다. 나는 이 지역을 2번이나 스님과 함께 다녀왔다. 일감스님에게 제단은 수행처였다. 이른 새벽, 제단 앞에 앉아 깊은 명상에 든 스님의 모습은 그대로 하나의 암각화였다. 사람은 자기향상을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람은 초월하는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놓여 있다고 본다. 스님이 암각화에서 발견한 것은 이 ‘사이’에 있는 무엇이 아니었을까.
사진3. 일감 스님, 『하늘이 감춘 그림, 알타이 암각화』, 불광출판사, 2020.
암각화에 담긴 것은 인간에게 절실한 무엇이다. 그 절절한 이야기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절박한 문제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 결 같이 행복에 대한 염원일 테지만, 수천 년 세월을 흘러 오늘날의 언어로 담아낼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굳이 말하자면, 암각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 존재인데 저 존재가 되는 것’, ‘이 존재인데 저 존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 결과 서로 다른 것이 내가 그가 되어 나도 그도 아닌 것을 만들어 내는 것, 쌍성합일雙性合一이요 양성일체兩性一體다. 음양의 합치다. 생명의 시작이다. 역설이다. 우주 생성과 소멸이 모두 역설 아닌가. 끊어졌다 이어지고 찢어졌다 합일되는 것은 인간 삶에 흐르는 진리이자 원리일 것이다. 신의 예언이면서 역설적 모순이며 어쩔 수 없이, 거부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근원이 역설적인 그런 상태, 모순, 아이러니, 아이러니의 역설, 비극, 이 역설적인 상태가 다시 동력이 되어 되풀이되면서 새로운 생명이 생성한다. 나는 스님이 암각화 제단 앞에서 기도하며, 역설의 극점에서 기뻐 울고 계신 모습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암각화는 자기의 생각과 뜻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형상 표현이다. 그림을 보면 이상과 현실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전통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창신暢神했다. 형식화에 치중하는 것도 경계했다. 그래서 오래된 현재이다.
「붓다」, 카자흐스탄, 탐갈리따스, 철기이후. 일감 스님 탁본.
돌은 물질이고 재료일 뿐이다. 이 위에 손으로 긁고 피로 그려 형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형상 너머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여기에는 자기 수양, 자기철학에 따라 더 너른 세계가 표현되고, 감상자 또한 자기의 수양과 도야의 정도에 따라 해석의 층위를 갖는다. 공유와 공감이 생기면서 새로운 세계로 진전되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간다.
일감 스님이 해석한 암각화의 정신을 읽어 보았다. 종교인으로서 종교적인 해석이 주류임을 감안하더라도, 자기의 생각을 이처럼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상태로 쓴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자기를 객관화하고 공감하도록 노력하는 맑고 투명한 사유의 결과이다. 맑고 정갈한 단순함이 생각에 더께를 더하게 한다.
「만(卍)자, 믿음」, 키르기스스탄, 싸이말루이 따쉬, 청동기 시대. 일감 스님 탁본.
그림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물에 대한 의미, 대상에 대한 인식을 그려서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것이다. 공감대 형성은 제작자의 격, 대상에 대한 관찰력, 인격, 의식수준을 그 안에서 담론되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그림은 자기의 세계를 형상에 담아서 밖으로 내보이는 것이다.
형상은 동시줄탁同時啐啄처럼 울림을 동시에 주어 깨달음을 상승시킨다. 여기에 일감 스님만의 독자성이 빛을 발한다. 신神의 세계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신은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이다. 신은 신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소를 그려라」, 러시아, 깔박따쉬, 청동기 시대. 일감 스님 탁본.
이 책(『하늘이 감춘 그림, 알타이 암각화』, 불광출판사, 2020, 사진 2·3)에 담긴 자료들은 스님이 본 그림자일지 모른다. 말은 안 하면 안 할수록 좋다. 암각화에서 보면 꼭 필요한 내용만 간명직절簡明直截하게 표현하고 나머지는 가만히 남겨 놓았다. 남겨 놓은 그곳에 에너지가 숨 쉰다. 말하지 않는 것이 본질이다. 빛의 속도로 쏘아대는 스님의 작은 파편들이 용광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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